매일묵상(2024/6/24-28)


시편75:6,7절
“동녘에서도, 서녘에서도 아니요 사막에서도, 산악지대에서도 아니며  판결은 오직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 이 사람은 낮추시고, 저 사람은 높이신다.”(공동번역)

사람이 죽었다고 판단될 때도 귀는 살아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망자 앞에서는 말을 조심하여야 합니다. 다 듣고 세상을 떠나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 같습니다. 작년 이즈음에 친인척 중 한 분이 돌아가셨다는 부고를 받고 세브란스 장례식장에 갔습니다. 그분은 80 후반의 권사님으로 혈압이 ‘0’ 으로 떨어졌다가, 요양병원 목사님이 오셨다는 말을 듣자 다시 소생하여 기도를 받고 돌아가셨다고 유족들은 간증하였습니다. 그 권사님이 두 달 동안 세브란스 중환자실에 계실 때 병원비가 5천만원이 넘었다고 합니다만, 기적과도 같은 이 은혜의 경험은 유족들의 마음을 한결 가볍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잠시 동안만 입니다. 그분들의 삶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한편, 장례식을 치루고 나면, 망자에 대한 평가만 남습니다. 우리 각자도 결국 죽고, 사람들의 잠정적인 평가(역사의 평가)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과 재판장으로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임명받으셨음을 선포합니다(행10:42). 그러나, 현실의 삶 역시 유혹과 어려움이 많습니다.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느헤미야의 삶은 훌륭한 모범입니다. 이방 땅 페르샤에서 믿음을 지키고, 황제의 인정을 받는 삶이란 쉽지 않지만 느헤미야는 신임을 받았습니다. 그 비결은 느헤미야가 합법적 지위를 갖고 그 직분에 충실하게 살아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황제의 배후에는 공평하게 판단하시는 주님이 계심 또한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임금의 마음도 야훼의 손에는 흐르는 물줄기 같아 당신 마음대로 이끄신다.”(잠언21:1,공동번역)

느헤미야 1:11절
“주여 구하오니 귀를 기울이사….종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오늘 종이 형통하여 이 사람들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였나니 그 때에 내가 왕의 술 관원이 되었느니라”

제임스 홀이 평양으로 선교를 나갔을 때인 1890년 중반만 해도 조선민족은 땅이란 배처럼 물 위에 떠 있는 존재로 보았습니다. 만약 땅을 깊이 파면 구멍이 뚫어지고 땅은 배가 가라앉듯이 바다속으로 침몰한다는 생각에 우물을 깊이 파지 못하였습니다. 제임스 홀은 간신히 설득하여 깨끗한 물을 얻고, 전염병 확산과 예방에 이바지 하였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믿음의 싸움은 세계관의 싸움입니다. 느헤미야의 성서적 세계관은 철저히 신명기의 가르침에 그 기반을 두고 자신의 현재를 파악합니다(레위기26:3-13(축복)/14-39(저주)/40-46(회복)과 신명기28:1-14(축복)/15-68(저주)/30:1-10(회복)). 1천년 전에 기록된 회복에 관한 언약은, 사로잡혀 끌려간 곳에서 회개하고 주님의 얼굴을 구하면 다시 돌아오게 하여주신다는 내용이고, 비시 450년 경에는 이미 상당부분 성취되고 있었습니다. 그 회복의 와중에 자신이 페르샤 제국의 권력자의 신뢰를 얻어 왕의 술관원이 되어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섭리였습니다. 페르샤 제국은 자신의 조상의 영토를 지배하지만, 성서적 세계관 하에서는 결코 타도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징계의 도구이기에 그 지배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라는 행동양식이 도출됩니다. 그 증거는 지금까지 존재하는 에스더 황후였고, 재상이었던 모르드개였습니다. 이제 페르샤 통치 하의 유대인들은 합법적 지위를 갖추려고 하고 그 중 하나가 느헤미야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통치자의 환심을 사려고 하지만, 사람의 일을 판결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다.”(잠언29:26, 새번역)

잠언30:17절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

잠언30:10 – 17절은 사회에 만연한 어리석고도 악한 행위 유형들이 열거되고, 본절에서 불효에 대한 형벌로 결론을 맺습니다. 동양 사회의 근본이념이 충효입니다. 충((忠)이란 자신의 진심을 다해 남을 대하는 자세를 말하는데, 사람의 가장 가까운 이웃이 부모이기에 ‘충’가운데 특히 부모님과의 관계를 규정하는 덕목을 ‘효(孝)’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효’는 백행의 근본이 되는 것입니다. 명심보감은 “자녀가 효도하면 부모님이 즐거워하고, 가정이 화목하면 모든 일이 잘 이루어진다(子孝雙親樂 家和萬事成)”고 가르칩니다. 예외도 있지만, 부모와 관계가 좋지 않으면 그 사람의 인간 관계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잠언은 단순히 인간들의 차원만 아니라, 하나님의 차원에서 봅니다. 가정을 세우신 하나님의 계획에 따르면, 부모란 말씀과 지혜의 교사요, 가정에서 하나님을 대리하는 역할을 하는 분입니다. 따라서, 부모에 대한 불효는 주님의 진노를 받도록 정해져 있습니다. 아굴은 11절의 내용을 반복하면서, 불효자에게 무서운 벌을 선포합니다. ‘눈’은 부모를 멸시하고 불순종하는 자녀의 모습을 상징하며, ‘쪼이고’와 ‘먹히리라’는 동사는 미완료형으로 계속적으로 까마귀들에게 쪼이고, 이어 독수리 새끼들이 파먹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그것은 불효자가 객사한다는 의미로써 그 당시 사회의 가장 무서운 저주입니다(삼하21:10). 벌을 떠나 부모님을 명예롭게 여기는 삶이 마땅합니다.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6:1-3)

잠언30:18,19절
“기이한 일이 셋, 내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넷이 있으니, 곧 독수리가 하늘을 날아간 자취와, 뱀이 바위 위로 지나간 자취와, 바다 위로 배가 지나간 자취와, 남자가 여자와 함께 하였던 자취이다.”

18절은, “나에게 세 가지가 경이롭다. 내가 깨닫지 못하는 네 가지가 있다”로 직역되고, 19절은 그 네 가지 대상을, 20절에서 교훈의 목적인 성범죄를 경고합니다. 19절에 언급된 경이로운, 그리고 깨닫지 못하는 네 가지 대상은 하늘에서 시작하여 땅으로, 이어 바다로 그리고 남녀간의 관계로 초점이 옮겨 갑니다. ‘자취’의 원어는 ‘페레크’이며, 19절에서 네 번, 20절에 한 번 사용되어 서로를 연결시킵니다. ‘페레크’의 통상의 뜻은 ‘길’(창3:24)이며, 그 밖에 ‘생의 여정’이나 ‘행동 양식’ 혹은 ‘방법’ 등의 의미로 사용됩니다. 만약 ‘방법’으로 번역하면, 독수리가 어떻게 공중에 머무르고, 뱀이 다리도 없이 어떻게 움직일 수 있는지, 배가 어떻게 물에 떠서 가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이고, 만약 ‘길’로 번역하면 독수리나 뱀, 혹은 배가 진행한 경로를 복원하거나 설명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한글성경은 후자의 의미로 판단하여 ‘자취’라고 의역하였으나, 어떤 의미로 취하든, 도저히 이해하거나 설명할 수 없는 대상을 지칭합니다. 이어 남녀의 성적관계가 적시되는데, 남녀 관계의 미묘함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이나, 성적 관계의 흔적이 남지 않음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보입니다. 이는 20절의 간음한 여자(음녀)의 뻔뻔함의 이유를 보여주고 있다 하겠습니다. 신자는 성적 부도덕에 물들지 않도록 세심히 경계해야 합니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엡5:3).   

잠언30:20절
“간음한 여자의 자취도 그러하니, 먹고도 안 먹었다고 입을 씻듯이 “나는 아무런 악행도 한 일이 없다” 한다.”(새번역)

 ‘그러하니’의 원어는 ‘켄’이며, 원문은 서두에 위치시켜, 19절에 열거된 대상들을 ‘간음한 여자’의행태와 연관시켰습니다. 개정개역이 ‘음녀’로 번역한 ‘잇솨 메나아페트’의 문자적 의미는 ‘간음한 여자’이며, ‘간음’이란 결혼이나 약혼한 여자가 다른 남자와 관계를 맺는 것을 말합니다. 모세 율법은 사형을 규정하고(신22:23,24) 제사로써 속죄할 수 없습니다(시51:16-19). 후단은 간음한 여자의 말을 직접 인용합니다: “나는 아무런 악행도 한 일이 없다.” 용의주도하게 간음을 행한 후에, 아무도 알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시치미 떼는 모습입니다. 원문을 직역하면 더욱 명료합니다: “그녀는 먹고서 그녀의 입을 씻는다. 그리고 “나는 잘못을 한 바가 없다”고 말한다.’ ‘먹다’란 성행위의 완곡어법입니다(9:16,17). ‘씻다’란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는 간음한 여자의 노력을 묘사하며, 이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모순되고 뻔뻔스런 모습입니다. 흔적을 남기지 않고 숨기려 할 바에는 처음부터 범죄하지 말아야 합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한 행동이 좋은 예입니다. 그녀는 요셉의 용모가 잘 생겼음을 보고 날마다 동침하기를 요구하다가, 드디어 기회를 잡아 요셉의 옷을 잡고 유혹합니다. 거절하고 도망친 요셉의 옷을 간직하고 거짓말을 위한 증거로 남편 보디발에게 보여줍니다. 분노한 보디발의 손에 잡혀 옥에 갇힌 요셉은 수년 후 출감하여 총리의 지위에 올랐으나 보디발의 아내를 벌하거나, 보디발에게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고 하나님의 손에 맡긴 행동은 부활하신 주님과 일치하며 우리의 본보기입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