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약궤와 블레셋 사람들)
사무엘상5:1절
“블레셋 사람들은 하나님의 궤를 빼앗아서, 에벤에셀에서 아스돗으로 가져 갔다.”
하나님의 언약궤를 아스돗으로 가져온 순간부터 블레셋의 성읍들에 독종의 재앙이 닥쳤습니다. 그 독종은 아마도 농작물을 먹고, 질병을 퍼뜨리고, 심장을 멈추게 하는 쥐의 전염병으로 판단됩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궤를 이리저리 옮겨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으나 사태만 악화시켰습니다. 7달 동안 고통을 겪은 뒤에야, 이스라엘 신을 잡아두었다는 모든 교만은 사라지고 문제해결에 집중합니다. 제사장과 복술자들은, ‘비슷한 것이 비슷한 것을 치유한다’ 는 마법적이자 원시적인 생각에 따라 금 독종 다섯과 금 쥐 다섯을 만들어 속건제를 삼습니다. 그들은 값진 예물을 드리고 자발적으로 언약궤를 돌려보냄으로 이스라엘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나, 그 이외에 그들은 이스라엘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도 갖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헌금, 기도, 구제, 예배와 같은 종교 행위로 하나님의 호의를 조작해 내려는 욕망은 아담 만큼 오래되었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강력합니다. 그들은 야훼를 경외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질병을 막기 위해 필요한 정도까지만 입니다. 더 나아가,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라엘 하나님의 힘을 인정하나 그들이 바라는 바는 그분을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분이 떠나는 것입니다. 마치 거라사의 광인으로부터 쫓겨 나간 귀신들 때문에 2천 마리의 돼지들이 죽자 그 지역 주민들이 와서 예수님께서 떠나 가시기를 구하는 모습과 같습니다. 이것이 징계 받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회개하고 그분의 얼굴을 구하는 것과 다른 점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이신 주님을 사랑하여라.”(막12:30,새번역)
사무엘상6:12절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선까지 따라 가니라”
블레셋 사람들은 닥친 큰 재앙이 언약궤 때문인지 여부를 시험합니다. 그들은 멍에 멘 적 없는 젖 나는 두 암소가 끄는 수레에 언약궤를 놓고, 벧세메스로 곧장 가는 여부를 확인합니다. 경험칙상, 훈련받지 않은 암소들이 젖 먹는 송아지들을 떠나 알지 못하는 벧세메스로 곧장 올라 갈 수는 없기 때문입 니다. 두 암소는 수레를 끌고 벧세메스로 가는 길을 정확히 걸어 갔고, 블레셋 방백들은 야훼의 능력을 인정합니다. 본문에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암소들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은, 그분의 자유 의지에 근거한 것이지 의무 때문은 아니며, 하나님은 아무의 도움도 필요 없이 스스로를 구원하실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 언약궤에 무슨 마법적인 능력이 있다고 믿고 진영에 갔다 놓았습니다. 물론 이스라엘 역사를 살펴보면 하나님이 거룩한 언약궤를 적군의 손에 넘기신 적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언약궤를 빼앗기고 전쟁에서 패배하는 쓰라린 경험과 함께 언약궤가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 돌아온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 신앙생활의 본질은 주님에 대한 경외입니다 우리가 기복신앙, 마술적 신앙, 징크스 등에서 자유롭게 되려면,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의 주권에 따라 행동하시는 분임을 배워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고 모든 두려움에서 자유함을 받습니다.. 두려움을 가졌던 욥은 시험을 통해 이 진리를 배우고, 자유와 축복을 함께 받았습니다. 주님은 가장 자비하신 분입니다(약5:11).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요일4:17)
신명기24:20절
“네가 네 감람나무를 떤 후에 그 가지를 다시 살피지 말고 그 남은 것은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며”
소렉 골짜기의 남서쪽에는 에그론에서 벧세메스로 올라오는 큰길이 있습니다. 언약궤가 올라온 그 길입니다. 김상목 작가가 이스라엘 유학생 시절, 소렉 골짜기 현장 답사를 마치고 팀원들과 함께 돌아오다가 수확을 막 끝낸 오렌지 과수원을 만났습니다. 그 과수원 오렌지 나무들은 이곳 저곳에 아직도 탐스러운 오렌지들이 달려 있었습니다. 학생들의 질문에, “저 나무에 있는 탐스런 오렌지는 하나님이 3,500년 전 특별히 우리가 이곳을 지날 것을 아시고 모세에게 명하여 율법으로 정해놓은 것이니 마음껏 즐기라”라고 교수가 대답하였습니다. 헌데, 학생 김상목은 오렌지로 갈증을 풀자 집에서 먹으려고 배낭에 주워 담아 벧세메스로 향하는 대로에 이르렀을 때 오후 늦은 시각이 되었습니다. 온 종일 걸었고 거기에 오렌지까지 한 짐 등에 짊어진 몸은 지칠대로 지쳤습니다. 그는 회개합니다: “은혜를 족한 줄로 여겼어야 했건만,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길을 지나는 또 다른 나그네를 위해 준비해 놓은 것이었음을 생각해야 했는데…나의 생각은 거기까지 미치지 못했구나!” 그리고 한참을 더 걸은 경험은 모세 율법의 의미를 몸으로 체험하게된 계기였습니다. 그러나 신명기는 “네 이웃의 포도원의 포도를 배불리 먹어도 그릇에는 담지 말라”(신23:24)고 규정하고 있음을 유의해야 합니다. 욕망은 좋은 것이나 율법의 범위를 넘어가는 순간 죄(탐심)로 정죄되고, 이 탐심은 인간의 능력으로 이길 수 없습니다(롬7장). 따라서 성령께서 도와 주셔야만 하며(롬8:13), 이것이 성령님의 인도 중 하나입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8:14)
베드로전서2:9a절
“그러나 여러분은 택하심을 받은 족속이요, 왕과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민족이요,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어제 라오스 방비엔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들려준 한 목사님이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한 아프리카 선교사가 선교사역 중 구겨지고 지저분한 와이샤스 칼러를 기도하여 깨끗하게 되는 기적을 몇 번 경험하였습니다. 이분이 선교대회 연설 차 미국에 가서 문제가 된 와이샤스 칼러를 위해 기도드렸으나 아무 변화도 없었습니다. 연설 후 주님께 그 이유를 묻자 “미국에는 월풀(세탁기)이 있지 않니?”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아마 한국의 선교대회였으면 “엘지나 삼성이 있지 않느냐?”고 대답하셨을 것입니다. 유사한 사례가 문익환 목사님이 7-80년 대 민주화 운동과 관련하여 장기간 수감생활 중 병든 사람들에게 파스를 붙이면 낫는 ‘파스요법’은 잘 알려진 일화입니다. 그분이 출감 후에도 그렇게 하셨겠습니까?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으라고 대답하셨겠지요! 우주는 주님이 만드신 창조물이며, 삶의 주된 도구는 지혜입니다. 그러므로 ‘상식’내지 ‘이성’은 올바른 신앙 생활을 위해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살아계신 주님을 무시하며, 인간의 ‘이성’ 내지 ‘상식’을 우상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점이 문제입니다. 이 세상은 ‘이성’이나 ‘상식’으로 해결되지 않는 사건들도 아주 많습니다. 만유의 주님을 섬기는 교회는 ‘왕 같은 제사장’의 직분을 갖고 있으며, 각 신자들은 교회에 소속된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따라서 이들은 공동체나 혹은 소속된 구성원의 자격으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적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들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을 어둠에서 불러내어 자기의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하신 분의 업적을, 여러분이 선포하는 것입니다”(벧전2:9b).
베드로전서2:4절
“주님께 나아오십시오. 그는 사람에게는 버림을 받으셨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받은 살아 있는 귀한 돌입니다.”(새번역)
사도 베드로는 부활 때문에 예수님을 ‘살아 있는 돌’이라 지칭합니다. 사도는 6-8절에서 구약성경(사28:26;시편118:22;사8:14)을 계속 인용하여,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주님께서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아 성전 모퉁잇돌이 되셨고, 신자에게는 보배로운 돌이지만, 불신자에게는 걸려 넘어지는 돌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일찍이 베드로는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를 일으킨 후, 같은 메시지를 선포한 바 있습니다(행4:11). 또한 베드로의 이 가르침은 시편118:22절을 인용하여 유대지도자들의 심판을 선포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합니다(마21:33-46). 이떼 자신을 모퉁잇돌로 지칭하신 것은 역시 부활을 의미합니다. 한편, 본절에서 사도는 예수님을 버린 건축자들을 유대지도자들 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모든 자에게 확장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리스도의 삶의 패턴과 같다는 점입니다. 베드로 당시 신자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경멸당하고 있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택함을 받은 살아 있는 귀한 돌입니다(5절). 부활하신 그들의 주님과 같이, 고난을 견디어 낸 후에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도록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약1:12). 그러므로 신자는 하나님의 성전과 나라를 세우는 살아 있는 돌들이며, 그들 가운데 계시는 성령님을 통해 거룩한 제사장 직분을 행하는 자들 입니다. 그 목적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며, 우리 삶의 영적 본분을 확연히 알게 합니다.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