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적 신앙과 하나님)
사무엘상4장22절
“또 이르기를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므로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였더라”
구약성경이 ‘갑돌’(신2:23)이라 부르는 ‘크레타’ 섬은 해양민족 블레셋의 기원입니다. 주전1400년 경 그리스 본토의 침략 시 크레타 주민들의 일부가 이스라엘 해변에 정착하여 가사, 아스글론, 아스돗, 에그론, 가드라는 다섯 도시를 형성하였고(BC1200경), 부침을 거듭하다 주전 586년 경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하고 모든 주민은 포로로 잡혀 다시 돌아오지 못하였습니다. 주전 1120년 경 이스라엘과 블레셋은 아벡에서 충돌합니다. 아벡은 고대 해변의 길이 통과하는 교통의 요충지요, 그곳을 경계로 북은 샤론평야, 남은 블레셋평야로 구분되는 전략적 도시였습니다. 첫 전투에서 패배한 이스라엘은 주의 언약궤와 제사장들을 모셔왔으나, 오히려 대패 당하고 언약궤는 빼앗깁니다(삼상4장). 이로써 하나님은 백성들의 마법적 신앙, 즉 ‘언약궤’와 관련된 잘못된 ‘강력한(?) 믿음’내지 ‘논리’를 산산히 부수셨습니다. 언약궤를 빼앗기자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을 영영 떠났다는 충격에, 제사장 엘리는 죽었습니다. 그러나 십계명의 두 돌판이 보관된 ‘언약궤란 하나님 임재의 상징이요 계명을 행하라는 의미이지, 인간의 뜻(승리, 번영 등)을 이루기 위한 도구가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데 힘쓴다면 주님의 돌보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다면, 징계를 받거나 아니면 버려질 것입니다(히12:7-13). 신앙은 하나님을 부리는 마법이 아님에도, 역사는 이스라엘의 다수가 육신적 생각을 벗어나지 못하였음을 보여줍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우상숭배와 하나님)
사무엘상5:4절
“ …다곤이 또 주님의 궤 앞에 엎어져서 땅바닥에 얼굴을 박고 있었다. 다곤의 머리와 두 팔목이 부러져서 문지방 위에 나뒹굴었고, 다곤은 몸통만 남아 있었다.”(새번역)
아벡의 전쟁에서 이긴 블레셋은 아벡에 가장 가까운 아스돗의 다곤 신전에 주님의 궤를 안치합니다. 그러나 이틀 후, 바닥에 있는 언약궤에 의해 다곤 신상이 부수어진 것을 알자, 누구도 아스돗의 다곤에게 가지 않았습니다.(삼상5:3-5). 우리의 우상과 싸우시는 주님을 생생하게 표현합니다. 십계명의 두 번째는 ‘우상숭배하지 말라’인데, 고대인의 세계관에 맞게 풀어서 말씀하십니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섬기지 말라”(출20:4,5). 그리고 경고와 축복의 약속을 덧붙입니다: “나, 주 너희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그 죄값으로, 본인뿐만 아니라 삼사 대 자손에게까지 벌을 내린다”(5,경고). “그러나 나를 사랑하고 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수천 대 자손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베푼다”(6,축복). 즉, 자신을 위해 우상을 만들면, 주님에게 벌을 받고, 우상을 버리고 주님을 사랑하여 그분의 계명들을 지킨다면 자신은 물론 수천 대 자손까지 은혜를 입는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에 ‘믿음의 역설’이 존재합니다 : “버려야 산다!” 우상숭배의 시작은 언제이겠습니까? 우리가 무엇인가 좋은 것을 탐내어 하나님처럼 다룰 때입니다(골3:5). 만약 우리가 탐심이란 우상을 치우지 않는다면, 주님께서 오셔서 그 우상을 부수어뜨릴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자유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참으로 자유롭게 될 것이다.”(요8:36,새번역)
(현대의 우상과 하나님)
로마서1:26절
“사람들은..창조주 대신에 피조물을 숭배하고 섬겼습니다.”(새번역)
‘우상숭배’란 참되신 하나님 대신 피조물을 숭배하는 것입니다. 그 모습은 다양하나 근원은 인간의 ‘탐욕’과 ‘두려움’입니다. 탐욕은 인간에게 좋은 것과 연결되기에 분별을 위한 ‘진리’가 요청됩니다. 야곱이 도망나올 때 라헬은 아버지 라반의 신(神), 즉 ‘드라빔’이라는 작은 우상을 훔칩니다. 만약 라헬이 ‘드라빔’은 단지 조각된 나무임을 알았다면 훔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위엄으로 충만합니다(롬1:20). 문제는 피조물이 아니라 피조물에 대한 인간의 잘못된 시각입니다. 태양을 숭배한 고대인들이 모두 면에서 어리석지는 않습니다. 태양은 모든 생물을 살리는 열과 빛의 근원되는 복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은 아닙니다. 그러면 인간과 태양의 관계는 무엇일까요? 태양은 하나님의 피조물이고 인간은 그것의 관리자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태양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해야 합니다. 고대인은 이 진리를 몰라 태양을 숭배하였지만, 지식을 우상삼은 현대인은 교만하여 하나님을 부인합니다. 그들이 이성을 통해 세상은 충분히 운영할 수 있음을 주장하나, 러·우 전쟁에서처럼 땅, 돈 그리고 인간에 대하여 실제적인 결정은 탐욕이 강하게 작용하기에, 절대로 합리적·중립적일 수 없습니다. 현대인에게도 복음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복음은 모든 민족과 세대를 위한 진리이고, 그 핵심은 ‘나, 너, 우리, 너희’가 아니라, “예수께서 주님되신다”는 선포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령님의 지혜와 능력을 통해 세상을 섬김으로써, 그분의 통치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롬10:12)
잠언30:15절
“거머리에게는 ‘달라, 달라’ 하며 보채는 딸이 둘이 있다. 전혀 배부른 줄 모르는 것이 셋, 만족할 줄 모르는 것 넷이 있으니,”(새번역)
11-14절에서 인간의 대표적인 범죄 4가지-불효, 교만, 위선,탐욕-를 제시한 아굴은, 15,16절을 통해 탐욕의 죄에 특히 초점을 맞춥니다. ‘탐심은 곧 우상숭배’(골3:5)이기 때문입니다. ‘거머리’의 양쪽 끝의 빨판은 ‘달라, 달라 하며 보채는’ 두 딸로 표현됩니다. 거머리는 온 몸이 부풀어 올라도 만족을 모르고 두 빨판으로 계속 피를 빨아댑니다. 이는 결코 만족을 모르고 더 가지려는 ‘탐욕자’를 은유합니다. 특히, 성경에서 ‘피’가 생명의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기에, 전단의 묘사는 타인의 희생을 개의치 않고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냉혹한 행태를 생생히 느끼게 합니다. 본절의 경고는 16절에 열거된 네 가지 만족할 줄 모르는 것들로 이어집니다. 그리스도인은 도착되어진 것에 언제나 만족해 하고 마음도 든든합니다. 이는 예수께서 우리 주님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빌4:13)는 고백을 하는데, 이것이 신자의 자랑이고, 지혜이며 세속의 현인들이 부러워 하는 경지입니다: “만족하며 두려움이 없다!” 그러나 자족의 삶을 넘는 것이 섬기는 삶이며, 주님의 모범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11:1)고 하셨는데, 모든 것을 소유하신 주님은 죄인들을 위해 은혜를 베푸셨고, 바울은 수고하여 일하면서 주님을 섬겼습니다. 여러분의 자랑은 어디에 있습니까? “보아라, 내가 곧 가겠다. 나는 각 사람에게 그 행위대로 갚아 주려고 상을 가지고 간다.”(계22:12,새번역)
잠언30:16절
“곧 스올과 아기 못 낳는 태와 물로 갈증을 없앨 수 없는 땅과 만족하다고 말할 줄 모르는 불이다.”(새번역)
15절 후단의 만족할 줄 모르는 네 가지가 교차대구법을 사용하여 열거됩니다: 멸망(죽음)-생명(자녀)-생명(곡식)-멸망(불). ‘스올’은 ‘무덤, 지옥’ 등으로 번역되지만, 선악을 불문하고 죽은 자가 거처하는 곳을 말합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죽어도 ‘스올’을 다 채울 수 없습니다. ‘아기 못 낳는 태’란 아이를 얻고자 하는 강한 열망을 가진 여인의 모습을 말합니다(창30:1), 세번 째는 메마른 중동지역을 배경으로 이슬, 비, 눈 등이 내려도 곧 흔적 없이 대지에 흡수되어 버리는 자연현상을 언급합니다. 네번 째는, 불로서, 불은 수없이 많은 물건을 태우더라도 만족하지 못하고 계속 삼키는 특질이 있습니다. 우리는 생각하고 살아야만 합니다! 아굴이 만족할 줄 모르는 대상으로 상기 네 가지를 든 이유는 무엇일까요? “[숫자] 잠언은… 결코 교훈을 강요하지 않고, 독자가 숙고하고 삶에 적용할 여지를 남겨둔다”(아이트켄)는 말을 염두에 두고, ‘멸망과 생명’이 교차적으로 등장한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아마도, 아굴은 아들들이 상기 네 가지를 비교하고, 땅이 존속하는 한 계속되는 생명과 죽음, 선과 악의 영원한 전쟁을 깨닫게 의도하고 있을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알곡과 가라지를 분리하실 때까지(2:20-22), 탐욕스런 자들은(11-15a) 결코 ‘충분하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지만, 의인은 생명과 선을 만들어 내면서, 주님의 영광을 위해 힘써 싸우며 나가야 합니다. 주님의 도우심이 절실하다 하겠습니다. “ 의인의 입은 지혜로우며 그의 혀는 정의를 말하며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으니 그의 걸음은 실족함이 없으리로다”(시37:3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