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4:15절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스탈린의 부하들이 명령에 잘 따르자, 처칠이 부러워하여 비결을 물어보니 “공포는 사람을 겸손하게 만든다”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이것은 순종이 아니라 굴종입니다. 애굽에서 파라오의 권력 밑에서 400년 동안 노예생활을 한 것이 좋은 예입니다. 하나님은 큰 권능으로 그 노예들을 이끌어 내사 자유를 주시고, 시내 산에서 십계명을 선포하셨는데, 그 두 번째는, ‘우상숭배 하지 말라’는 내용이고,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여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시겠다’는 약속을 부가하셨습니다(출20:6). 40년 뒤 모세는 십계명을 재해설하면서, 이 대목을 다시 한 번 반복합니다(신5:10).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선택의 이유도, 십계명을 주시고, 능력으로 돌보신 하나님의 사랑도,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주시는 이유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의 사명은 가나안 땅에서 모세율법을 행하여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라는 것이나, 그분에 대한 사랑이 없기에 불가능한 작업입니다. 그들의 순종은 공포나 이익이 동기여서, 가나안 땅(소원 성취)이 주어지자, 자신들의 뜻대로 살아 갔습니다. 오늘 본문은 주님께서 체포되시기 직전 말씀으로, 출애굽기(20:6)과 신명기(5:10)의 말씀이 그 배경입니다. 제자들은 영적 이스라엘이요, 당신은 새계명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그분의 계명을 지켜 세상에서 주의 제자들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순종의 동기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마태복음10:28절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한국의 국가 GDP는 계속 성장하다가 2040년경부터 감소로 돌아서는데, 그 원인은 저출산으로 인한 인구감소입니다. 저출산이유와 그 해결에 대해 채상욱 작가는 도시기능의 관점에서 접근합니다(피크아웃코리아). 그에 따르면, 지방도시는 일자리, 교육(대학), 의료, 편의시설 등 도시 필수 기능이 결여되어서 20살이 넘으면 수도권으로 이주를 해야만 합니다. 수도권의 부동산 가격은 계속 상승하여 결혼과 출산률은 낮아지고, 지방은 출산률은 높지만 청년이 되면 탈출하여 고령화가 심화되고 결국 소멸합니다. 작가는 연금개혁과 재택근무의 보편화에서 해법을 모색합니다. 스웨덴 노벨경제학자 군나르 뮈르달은 1930년대에 집값과 출생률의 관계를 언급하며 집값 통제를 경고한 바 있지만, 현실은 스웨덴조차 집값은 높아져있고 출생률은 현저히 떨어져 있습니다. 모두 다 인구소멸을 걱정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죽음 다음의 삶이 존재하고 그 삶이 문제임을 지적합니다. 따라서,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도성」에서 ‘죽음 다음의 영생을 걱정하라’고 경고합니다. 영생은 ‘영원히 살아가는 삶’이나, 영생이 다 축복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과 함께 하는 영생만이 축복이며, 그렇지 않은 영생은 지옥이라는 저주입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담당하신 이유이지만, 군나르 뮈르달의 경고를 듣지 않은 스웨덴처럼, 인간은 주님의 경고를 듣지 않으려고 합니다. 주님의 뜻을 우선순위에 두는 것, 그것이 금생과 내생의 열쇠입니다(딤전4:8).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잠언30:9절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8절에서 아굴은 부와 가난을 모두 거부하고 오직 필요한 양식만을 간구하는데, 9절이 그 이유를 보여줍니다. 그의 기도의 출발점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입니다. 부와 가난 그 자체는 중립적이나, 그것들이 주님과 자신의 관계에 미치는 결과를 생각해 보자 아굴은 두려웠습니다. ‘배불러서’의 원어는 ‘(질릴 정도로) 실컷 먹다’란 의미로서, ‘육체적 욕구의 만족, 인간적 행복과 번영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이해됩니다. 이때 아굴이 예상하는 자신의 모습은 ‘하나님을 모른다’로 표현됩니다. ‘모른다’의 히브리어 원어는 ‘거짓으로 부인하다’는 뜻으로, 하나님을 알 만한 내적·외적 증거가 있지만 모른체 하고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한다는 의미입니다. 아굴은 ‘여호와가 누구냐?’란 말로 다시 강조하는데, 하나님을 부인하는 태도는 어리석고 악한 자들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시14:1). 또 ‘욕되게 할까’의 원어는 ‘붙잡다, 얻다’는 뜻입니다. 도적질 후, 형벌을 면하려고 하나님의 이름을 두고 거짓 맹세를 하거나, 하나님께 원망 불평하는 모습을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서 모범은커녕 그분의 명예를 훼손하는 행동이기에, 아굴은 두려워 하고 있습니다. 경건한 아굴은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고 싶지만, 자신의 신앙이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과 달리 물질적 조건에 큰 영향을 받을 수 있음을 솔직히 인정합니다. 겸손한 자에게 지혜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굴은 기도하는 것이며, 아굴은 응답받아 주어진 삶에 자족하며 경건히 삶을 마쳤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딤전6:6)
잠언30:10절
“너는 종을 그의 상전에게 비방하지 말라 그가 너를 저주하겠고 너는 죄책을 당할까 두려우니라”
아굴의 교훈의 시작은 약자의 대명사인 종에 대한 보호입니다. 이 당시 종은 주인의 재산의 일부여서, 자신을 보호할 수단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학대받는 종들이 주인에게서 도망치는 예는 빈번 하였습니다. 모세는 그런 종들을 주인에게 돌려보내지 말라는 규정을 두어 보호합니다(신23:15). ‘비방하다’란 히브리어는 ‘은밀한 말로 헐뜯다(중상모략)’란 뜻입니다. 그렇다면, 본절의 종은 악하고 게으른 종이 아니라 특별한 잘못이 없는 종임을 암시합니다. ‘저주하다’는 ‘남에게 재앙이나 불행이 일어나도록 빌고 바라다’는 의미입니다. 만약, 그 저주가 까닭 없다면 아무에게도 미치지 못하므로 웃어넘길 수 있지만(잠26:2), 이유 있는 저주는 그렇지 않음을 아굴이 경고하고 있습니다. 정의의 수호자이신 하나님께서 듣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늘에서 유죄판결이 나면 하나님의 형벌이 찾아올 수 있음을 두려워 해야만 합니다. 이렇게 보면, 종도 은밀히 하지만 저주할 권한이 있다 하겠습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이 약자들을 보호하지 않고 착취하면 같은 결과를 초래할 것입니다. 기드온의 첩의 아들 아비멜렉이 이복형제 70명을 죽일 때, 화를 피한 요담은 그리심 산에 서서 아비멜렉과 세겜사람들을 저주하였습니다. 사사기는 하나님이 그들을 벌하여 요담의 저주가 응했다고 증언합니다(삿9:57). 그 반면, 전도서는 ‘종이 너를 저주하는 말을 들을 수도 있으니’ 남의 말에 신경쓰지 말라고 가르칩니다(전7:21-22). 우리는 바르고 균형잡힌 판단을 내릴 수 있어야 합니다. “잘 들어라. 심판 날이 오면 자기가 지껄인 터무니없는 말을 낱낱이 해명해야 될 것이다.”(마12:36,공동번역)
잠언30:11절
“아비를 저주하며 어미를 축복하지 아니하는 무리가 있느니라”
11절은 ‘부모님’이라는 통상의 문구 대신 ‘그들의 아버지들과 그들의 어머니들’이란 표현을 사용함으로, 부모를 공경하지 않고, 축복을 빌지 않는(저주하는) 저주받은 불효자식들이 부각됩니다. 모세율법은 그들에게 사형을 규정하였습니다(출21:17). 누군가 그리스 현자 솔론에게 왜 존속살해를 금지하는 법을 제정하지 않았느냐고 묻자, 자신은 그렇게 불경건하고 잔인한 자를 생각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성경학자 브리짓의 말대로, “율법수여자이신 하나님은 당신의 피조물의 마음의 사악함은 상상초월이란 사실을 더 잘 알고 계십니다”(렘17:9). 이 어리석은 반역자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빚진 부모님들의 건강과 평강의 삶을 위해 기도하는 마음은 전혀 없고, 오직 탕자처럼 유산을 좀 더 빨리 받거나, 부양책임을 회피하려고 온갖 시도를 다합니다(마15:3-6).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그러하였습니다. 그는 장자 암논을 죽이고 장자가 되었음에도 하루빨리 왕이 되려고 반역을 일으켰으나, 첩자인 아렉사람 후세의 말을 듣고 아히도벨의 좋은 모략을 버려 파멸하게 됩니다. 성경은 그 배후에 하나님께서 결정하셨음을 증언합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섭리적 통치는 이처럼 은밀합니다. 비록 그들의 부모는 지혜로울 수 있을지라도, 이 바보들은 낳고 기른 부모의 마음을 고통스럽게 만들어서, 정의의 주님께서 그냥 놓아두실리가 없습니다. 잠언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들과 똑같은 비참한 운명을 맞는다고 거듭 강조합니다(20:20;30:17). 그러나 자식의 행동은 부모의 책임에 귀착되는 경우가 많다는 현대적 연구결과도 마음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지 말고, 주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하여라.”(잠3:7,새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