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4/5/20-24)

고린도후서4:7절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 엄청난 능력은 하나님에게서 나는 것이지, 우리에게서 나는 것이 아닙니다.”(새번역)

수사법 중 역설법(逆說法)이란 “의미가 모순되고 이치에 맞지 않는 표현”을 말합니다. 좋은 예가 사도 바울이 자신을 고린도후서에서 7개의 역설을 통해 변호한 대목입니다: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6:8-10). 사도의 글은 매우 힘이 있습니다. 사실 “그리스도께서 죽었으나 살아났다”는 표현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역설법이지만, 우리 믿음은 그 역설에 기초합니다. 또한, 복음을 살아내는 힘도 자신이 아니라 바울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임을 오늘 본문이 증거합니다. ‘주님의 능력’은 세상의 냉혹한 평가나 많은 역경에도 사도가 늘 기뻐하고 마음의 평정을 유지한 비밀이지만, 세상은 이 능력을 알지 못한다는 점을 감안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겸손히  살아가면서 종종 받는 이유 없는 비난, 박해, 오해에 온유해야 합니다. 만약 화를 내면 상대방은 걸려넘어지고 그리스도께서 전파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은 좋은 길잡이로서, 질그릇과 같이 연약한 우리는 그 길을 따라 갈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님께서 힘 주시며, 좀 더 자신 있고 고결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은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마28:20).“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시84:5).

디모데후서2:6절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러우 전쟁(2022/2)의 발발로, 폴란드는 독일제 무기 구입을 고려하다가 돌연, 가성비와 납기가 확실한 한국 무기를 도입하였습니다(30조원). 독일은 당황하였지만 당연한 결과입니다. 1990년 통일과 냉전 종식으로 독일은 무기 개발을 등한 시 하였으나, 한국은 북한의 위협 하에 70년 간 무기개발에 노력해 왔습니다. 위협적인 남북대치 상황이 플러스로 작동한 순간입니다. 더구나, 사계절을 두루 갖춘 한국은 어떤 기후에도 적합한 전차나 자주포 등을 공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습니다. 한국민이 상황에 불평하지 않고 적응하도록 노력하자 그것이 성공의 비결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독일의 레오파르트 전차 보다 한국의 K-2전차의 우수성이 입증되었으나, 노르웨이는 정치적 이유로 독일을 선택한 사례처럼, 노력이 곧 성공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한편, K-2 전차 생산에는 우연한 기회에 러시아 최신기술이 적용되었는데, 불곰사업을 통해 컵라면, 쵸코파이를 주고 러시아산 전차 T80 등을 도입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는 한국의 명품 무기인 K-9자주포, K-2 전차, 천궁 탄생으로 이어졌습니다. 주님이 만드신 세상에서 노력은 인간의 몫이고 성공의 기회는 주님의 권한입니다. 따라서, 노력하지 않으면 기회를 잡을 수 없습니다. 또한, 모든 사람들은 성공을 바라고 뛰지만, 오직 소수만 정상에 섭니다. 신자라고 예외는 아닙니다. 이때 낙담하거나 기복신앙에 빠지면 안 됩니다. 우리 안에 사시는 분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이기에, 실패도 유익한 것입니다(빌1:21). 주님은 주권을 갖고 계십니다. 그런 주님을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경건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잠언30:5절
“하나님의 말씀은 모두 순결하며, 그분은 그를 의지하는 사람의 방패가 되신다.”
(새번역)

아굴은 2-4절에서 인간의 보편적 무지와 그 존재의 미미함을 수사학적 표현을 통하여 진술하였다면, 본절과 6절은 하나님의 말씀의 완전성에 대한 신앙고백으로, 야금술과 군사적 은유를 동원하여 교훈합니다. ‘순결하다’로 번역된 ‘차라프’는 금속을 정련시켜 찌끼를 제거하는 것을 뜻하는데, 정련된 금이나 은에는 불순물이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는 잘못된 것이나 오염된 사상이 섞여 있지 않고 완전하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다윗의 신앙고백과 궤를 같이 합니다: “ 주님의 말씀은 순결한 말씀, 도가니에서 단련한 은이요, 일곱 번 걸러 낸 순은이다”(시편12:6,새번역). 따라서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을 접해본 사람은 순금이나 순은을 볼 때처럼 그 아름다움에 매료되고 그 말씀을 통해 빛나는 진리를 삶의 등불로 삼지 않을 수 없습니다(시119:105). 어느 칸트 철학자는 매일 아침 순수이성비판과 같은 칸트의 저서를 읽으면 머리가 맑아져 하루를 시작하는데 힘이 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머리를 맑게 하는 것뿐 아니라, 마음까지 기쁘게 하며, 그 교훈을 들으면 용기가 나고, 그 깨끗함에 우리의 눈이 밝게 빛나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갖게 됩니다. 세상에서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를 수 있는 진리는 오직 하나, ‘주님을 경외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이 말씀을 의지하여 의를 행하고, 또 경고를 받아 허물에서 벗어나고, 그것을 지킴으로 주님의 상을 받게 됩니다(시편19:7-11). 끝으로, 주님은 이들의 방패가 되심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의 법도들로 말미암아 내가 명철하게 되었으므로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시편119:104).

잠언30:6절
“그의 말씀에 아무것도 더 보태지 마라. 거짓말쟁이라고 꾸지람을 들으리라.”
(공동번역)

본문은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 위에 인간이 자의적으로 덧붙이는 행위는 물론, 자의적으로 빼는 행위도 금지하고 있습니다(계22:18,19). 그 기준은 말씀의 본래 취지를 존중하고 있는지 여부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바른 순종의 열매를 맺을 수 없기 때문에 말씀을 전하는 자나 듣는 자 모두 거짓되었다는 책망을 받게 됩니다. 거짓된 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 올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영원한 사망이 선고된 것입니다(계21:8). 의의 열매는 오직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하여 모든 불순물이 제거된 금과 은과 같이 순결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때만 맺어집니다. 이를 위해서는 하나님의의 뜻이 듣는 자들의 마음에 생생하게 살아 있도록 해석·선포되어야 하는데, 말씀하신 환경과 말씀을 전할 때의 환경이 다르기에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모세는 40년 동안 광야에 머물다가 마침내 요단 강 동쪽 모압평지에 이른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은 한마디도 보태거나 빼지 못한다. 내가 받들어 너희에게 전하는 너희 하느님 야훼의 계명들을 너희는 지켜야 한다.”(4:2,공동번역)고 경계한 뒤, 시내 산에서 받은 십계명을 상황에 맞게 해설합니다(5장). 십계명의 핵심은 ‘하나님 사랑’이며, 이웃 사랑은 거기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신명기 6장이,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 사랑하라”는 메시지를 선포한 이유입니다(6:4-5). 하나님을 사랑해야 그분의 말씀을 마음에 새길 수 있고, 제대로 순종하여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교훈은 완전하여서 사람에게 생기를 북돋우어 주고, 주님의 증거는 참되어서 어리석은 자를 깨우쳐 준다.”(시편19:7,새번역).

잠언30:7-8절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이전의 구절에서 아굴은 인간의 보편적 무지와 한계(2-4),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의 완전성에 대한 신앙고백(5,6)을 하였습니다. 연약한 인간은 오직 주님의 말씀과 그 원천인 주님을 절저히 붙잡고 신뢰해야 온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계명을 따라 살아 가는 믿음과 지혜를 가질 때”부터, 온전하고 성숙한 제자의 길에 들어섭니다. 그것은 마치 칠흙 같은 악천후에 눈이 아니라, 계기만을 보고 목적지를 향해 바르게 비행하는 노련한 조종사와 같습니다. 만유의 주님을 알면 우리는 진실해지고, 허탄과 거짓말을 멀리합니다. 그것들이 내게 해가 됨을 직시하게 되어서 온갖 인간적 잔꾀는 사라지고, 우리 눈 앞에 ‘십계명의 대로’가 나타납니다. 주님 경외, 부모공경, 살인·간음·도둑질의 금지, 거짓과 탐심의 금지를 명하는 계명만 지켜도 삶은 경건으로 넘쳐납니다. 공자는 70세에 “종심소욕불유구”- 마음의 소욕대로 행하였지만, 법도를 넘지 않았다-라고 자평하였는데, 15세에 시작된 자신의 배움이 70에 성숙하였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그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입니다(갈5:24). 아굴은 본문에서 십계명 중 두 가지를 구합니다: 거짓됨과 탐욕의 금지. 이 두 계명은 물질적 환경에 큰 영향을 받으므로, 연약한 자신은 주님이 정하신 몫의 양식만을 달라고 간구합니다. 신구약 전체를 관통하는 경건의 향기가 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마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