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4/5/6-10)


시련과 기쁨
야고보서1:2절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 가지 시험에 빠질 때에, 그것을 더할 나위 없는 기쁨으로 생각하십시오.”(새번역)

야고보서는 신앙의 박해로 각 지역에 흩어진 디아스포라 유대인 크리스찬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참조 행8:1-3). 사도는 그런 어려움을 오히려 크게 기뻐하라고 명령합니다.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낸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인내 없는 믿음은 불량품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하고, 합격된 믿음을 보면 항상 인내가 담겨 있습니다. 믿음이 인내를 만들어 내려면 시험이라는 원재료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시련 중 믿음이 없다면, 염려라는 독소만 생겨 삶을 뒤흔들고야 맙니다. 인내를 온전히 갖춘 신앙 인격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것이고 그분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된 생명의 면류관을 얻게될 것입니다(12). 따라서, 시험이 강도처럼 들이 닥칠 때, 더할 나위 없는 기쁨으로 맞이하라는 말씀은 그리스도인들만이 갖는 지혜입니다. 한편, 이런 성경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막상 여러 가지 시험이 들이닥치면 걱정 근심에 휩싸이는 것이 연약한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때 야고보서는 ‘시험을 이길 지혜를 위해 기도하라고 명령하는데(5), 이는 그리스도인들만이 갖는 능력입니다. 구할 때 풍성히 주실 것을 믿고 흔들리지 말라고 경고합니다(6-8) 왜냐하면 반드시 응답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고 있는 것은 다 받으리라”(마21:22,사역). 사도 바울 역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아뢰라’(빌4:7)고 명령합니다. 그리스도인들만이 갖는 감사가 여기서 나옵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6-18).

평강의 하나님
빌립보서4:9절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하나님의 평강으로 염려를 극복하게 되면(빌4:6-7), 하나님의 평강이 늘 우리 마음과 삶 가운데 머물도록 평강의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환경을 구축해야 합니다. 어떤 방법이 있을까요? 사도는 두 가지를 말합니다(4:8,9). 첫째, 주님 앞에서 가치있는 것들을 생각해야 합니다(8). 사도가 “형제 여러분, 선함을 추구하며 가치가 있는 것들에 마음을 쏟기 바랍니다. 참되고, 고상하고, 옳고, 순결하며, 아름답고, 존경할 만한 것들을 생각하십시오.”(4:8,쉬운성경)라고 가르친 이유입니다. 둘째, 그 생각을 행하여야 합니다(9). 사도는 빌립보에 머물러 있을 때 빌립보 교인들이 자신으로부터 직접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고 권면하는데, 바울의 그 삶은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이기 때문입니다(고전11:1). 우리가 배워야만 하는 중요한 진리입니다. 어려움에 처하여 기도하고 응답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평강을 맛 보면, 이웃과 다툴 이유가 사라집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이 이루어지기 위한 능력의 근원이 우리 안에 와 계심을 알기 때문입니다(약4:2,3). 그래서 전에는 타인을 이용하여 나의 이익을 취하고자 하였다면, 이제는 남을 배려하는 방법을 생각하고 연습합니다. 그 와중에 사람의 칭찬을 받을 만한 탁월함(기림)을 보여주었더라도, 겸손하게 되는 것은 “만약 주님께서 그런 기회와 재주를 타인에게 주셨다면, 나보다 훨씬 나은 성과가 나왔을 것이다”는 생각 때문입니다(8). 자연히 다툼은 사라지는데, 이것이 성령 충만한 개인·가정·교회·직장입니다.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빌4:13 새번역)


잠언29장25절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지만, 주님을 의지하면 안전하다.”(새번역)

이 잠언은 피조물 인간이 아니라 오직 창조주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권면입니다. ’사람을 두려워 한다’를 직역하면 ‘사람의 공포’이며, ‘의지한다’의 원어의 뜻은 ‘믿다, 신뢰하다, 의지하다’이고, ‘안전하다’는 문자적으로 ‘(도달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곳에 놓여지다’는 의미입니다. 25절 전단의 좋은 예가 24절에 나온 진실치 못한 증인입니다. 24절 은 재물을 탐하여 도둑과 한 패거리가 된 자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다는 맹세에도 진실된 증언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25절은 그 이유와 결과를 보여줍니다. 그의 위증 이유는 함께 한 도둑 패거리의 보복을 두려워 하기 때문이나, 그 두려움 때문에 침묵한 결과 그것이 오히려 올무가 됩니다. 이는 그 도둑 패거리들이 증거를 없애고자 해를 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범죄 영화의 흔한 소재 중 하나라 하겠습니다. 만약 그가 주님을 두려워 하여 진실된 증언을 하고 신변보호를 요청한다면, 주님은 섭리 가운데 혹은 국가의 제도를 통해 적극적으로 그 증인을 보호함으로 안전하도록 만들 것입니다. 25절 후단의 예로, 다니엘과 세 친구가 있습니다. 그들은 황제의 노함을 두려워 하지 않고, 주님만 의지하고 풀무와 사자굴에 던져져 죽기를 선택하였지만, 모두 주님의 초자연적인 개입을 통해 안전히 구출 받았음을 성경은 증언합니다. 여러분 주님이 지켜주심으로 악한 자가 우리를 만지지도 못함에 감사드려야 합니다(요일5:18) 다만, 하나님을 시험하면 안 됩니다. 이는 우리 주 예수께서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실 때 마귀가 요구한 바 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너의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의뢰하고, 너의 명철을 의지하지 말아라.”(잠언3:5,새번역)

잠언29장26절
“많은 사람이 통치자의 환심을 사려고 하지만, 사람의 일을 판결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다.”(새번역)

26절은 통치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모든 일의 결정권자 되심을 밝힙니다(잠언21:1). 이는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지만 주님을 의지하면 안전하다”고 선언한 25절의 좋은 예시이자 확실한 근거입니다. 물론 26절이 법적 수단을 통한 구제를 금하라는 취지는 아닙니다. 다만, 주님에 대한 순종 없이 통치자의 환심만을 사려는 세태를 경고합니다. 전단을 직역하면, “많은 사람들이 통치자의 얼굴을 구한다’입니다. ‘얼굴을 구한다’는 표현은 존경과 동시에 호의를 얻으려는 노력을 지적하는데, 사람의 일과 재판의 결정이 권세자에게 달렸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사람들이 문제에 직면하면 통상 취하는 행동양식이지만, 후단을 보면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후단을 직역하면 “각 사람에 대한 재판(판결)은 주님께로부터 온다”입니다. 사람의 일이 외형상 통치자나 재판관들의 결정으로 보이지만, 그 배후에는 보이지 않는 주님의 섭리가 작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동기까지 감찰하시는 주님을 두려워하며 선을 행하고 바르게 살아가는 것이 최선입니다. 의인에게는 주님의 변호하심이 있고, 또 있어야만 하는 것은, 그분이 정의 실현의 최종 책임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악한 하만이 모르드개를 처형하기 위해 아하수에로 왕의 얼굴을 구하다가, 오히려 모르드개를 높이게 된 사건은 그 예입니다. 하만이 밤에 왕궁으로 가는 그시각 왕은 잠이 오지 않아 역대의 일기를 듣다가 모르드개가 자신의 목숨을 구한 선행을 알게 되며, 그로 인해 모든 것이 바뀌어 버립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시편37:11).

잠언29장27절
“의인은 불의한 사람을 싫어하고, 악인은 정직한 사람을 싫어한다.”(새번역)

28:1 – 29:27절은 ‘의인과 악인이 맺고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와 그 결과’를 고찰하면서, 27절에서 결론을 내립니다: ‘의인과 악인은 본질적으로 상대방을 싫어한다.’ 전단의 ‘불의한 사람’이란 범죄하고 사법제도를 남용하는 자들이며, 후단의 ‘정직한 사람’이란 타인의 사회적, 법률적, 경제적 권리를 보호하려고 확립하신 하나님의 경계선을 침범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광야에서 40년을 보낸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 강 동쪽으로 이동할 때의 모습이 좋은 예입니다(신2장). 에돔 땅 와디 푸논을 통하면(15킬로) 쉽게 ‘왕의 대로’에 이르고, 요단 동쪽 모압평지에 집결할 수 있었지만, 이스라엘은 남동쪽으로 3백킬로미터를 돌아갑니다. “이 지역은 에서 자손에게 주었으니 전쟁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고, 두 번에 걸친 모세의 간청에도 에돔 왕은 불허했기 때문입니다. 먼 길에 지친 백성들이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자 불뱀들이 나타나고, 회개하는 자들을 위해 놋뱀이 만들어집니다(민21:4-9). 광야는 이 세상을, 놋뱀은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요3:14),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간직한 신자의 삶을 각각 상징합니다. 의인과 악인이 서로를 싫어하는 이유는, 의인은 하나님과 공동체의 이익을 먼저 추구하나, 악인은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옳고 그름, 선과 악의 갈등은 근본적인 문제요, 열정의 문제이다. 따라서 타협될 수 없고 서로 싫어하는 마음을 완화시킬 수 없다”(말빔). 잠언은 의인의 이런 비관용적 자세를 칭찬하면서, 그들의 보호자는 주님이심을 밝힙니다. “주의 이름은 견고한 성루이므로, 의인이 그 곳으로 달려가면, 아무도 뒤쫓지 못한다.”(잠언18:10,새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