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믿음 그리고 평안
마태복음6:11절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주기도문의 이 대목은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들을 그날 그날 공급해 주실 것을 요청하라는 내용이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살아가는 신자들이 당면한 여러 문제에 대해 걱정 근심하지 말고 하나님께 기도하여 응답받으라는 가르침입니다. 광야로 인도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일 아침 그 날 먹을 만나를 내려주신 것이 좋은 예입니다. 그러나 40년 뒤 백성들이 요단을 건너 길갈에 이르러 그 땅 소산물을 먹은 다음 날 만나는 그쳤습니다(수5:12). 범죄한 아담에게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창3:17)고 선고하신 뒤, 아담의 모든 후손(남자)은 일하여 가정을 부양할 책임이 있습니다. ‘만나’는 광야라는 예외적 상황 때문입니다. 한편 본문에 대해 세 가지 태도가 가능합니다. 첫째, 무관심한 태도 – 자신의 재력과 능력으로 여유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흔히 나타지만, ‘양식 bread’은 병, 근심, 고난 등 모든 필요를 함축하기에, 결핍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둘째, 마법적 신앙- 요술 주문처럼 보는 태도로, 복권을 사고는 왜 당첨을 시켜주지 않느냐고 소리치는 사람들이죠! 본문이 위치한 문맥과 취지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셋째, 보물과 같이 간직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며, 이는 하나님의 계명(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성취의 삶을 말합니다. 이것이 바른 태도입니다. 열심히 일하는 것은 다른 사람과 같지만, 온갖 풍파가 닥쳐도 기도하면 ‘일용할 양식’을 주실 하나님 아버지를 생각하고 마음에 늘 평안이 있는 것이 다릅니다. 경건의 훈련은 여기서 나옵니다.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4:8)
믿음의 추론
마태복음6장24절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태복음6:24-34절은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으니(24), “그러므로 염려하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25). 그 근거는 제자들이 하나님을 주인 삼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분의 나라와 의”를 염려해야 합니다. 주기도문 순서 그대로입니다. 따라서, 이 단락(6:24-34)은 주기도문의 해설판이며, 주님은 믿음에 근거한 이성적 추론을 전개합니다. “하찮은 미물인 공중의 새도, 들의 백합화도 하나님이 그처럼 먹을 것을 주시고, 입혀주시는데, 하물며 당신의 나라와 의를 염려하고 먼저 구하며 살아가는 제자들을 어떻게 돌보시지 않겠는가?” 누가복음은 한 발 더나아가, “그런 것들을 구하지도 말고 근심하지도 말아라”(눅12:29)고 명령하십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들은 세상 백성이 구하려고 달려가는 것이지만, 하나님은 제자들의 필요를 아시기 때문입니다(눅12:30). 그러나 현실에서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기에, 세상 사람들과 그리스도인의 결정적 차이는 노력이 아니라, 삶에 임하는 자세입니다. 이것은 비행과 같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뜻을 따라 비행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말씀을 간직하고 그 좌표를 따라 비행하는 연습을 합니다. 평시에는 별 차이 없어도, 인생의 밤이 오면, 하나님을 주인 삼은 제자들은 재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말씀을 따라 안전히 비행합니다. 조종사가 계기판만 보고 비행하는 법을 배우듯이(계기비행), 제자들은 말씀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믿음의 지혜). “돈이 사람을 보호하듯, 지혜도 사람을 보호한다. 그러나 지혜를 깨우쳐 아는 지식이 더 좋은 까닭은, 지혜가 그 사람의 목숨을 살려 주기 때문이다.”(전7:12,새번역).
잠언29장22절
“화를 잘 내는 사람은 다툼을 일으키고, 성내기를 잘하는 사람은 죄를 많이 짓는다.”(새번역)
본절은 화가 치밀어 오를 때 자기 절제의 중요성을 교훈합니다. “화를 잘 내는 사람”의 원어 ‘이쉬 아프’의 직역은 ‘분노의 사람’으로, 상습적으로 분노를 표출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잠언은 화를 절제하지 못하면 다툼을 일으키고 죄를 많이 짓는다고 선포합니다. ‘다툼’이란 인간 관계에서 야기되는 분쟁을, ‘죄를 짓는다’는 표현은 그것을 넘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실패까지 내포합니다. 이는 범죄란 하나님의 공의로운 기준(율법)을 넘는 모든 행위를 일컫기 때문입니다. 왜 분노하게 될까요? 원인은 다양하지만, 상대방의 도를 넘는 행동, 급한 성격, 교만한 마음 등이 주요 동인이라 보여집니다. ‘자로’는 공자의 제자입니다. 이분이 무예와 힘이 뛰어나서, 직선적으로 사건을 보고 사람들을 대하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자로가 벼슬하는 위나라에서 정변이 일어나자 공자는 자로의 급한 성격과 의기를 알기 때문에 비명횡사할 것을 예견합니다(논어). 따라서 공자는 평소에 “정직함을 좋아하나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 폐단은 급하게 되는 것이다.”며 자로를 훈계한 적이 있습니다. 부모에 대한 김지현 씨의 조언입니다. “일단 멈추자. 화가 났을 때는 일단 멈추어야 한다. 분노의 감정은 파도가 한번 밀려왔다 가는 정도의 시간 안에 절정에 달했다가 내려오게 된다. 그 고비만 넘기면 힘들지만 이성적인 사고를 쥐어짤 수 있고 해결이 가능해진다. 화장실이든 욕실이든 차고든, 5분 정도를 피할 수 있는 곳으로 몸을 움직여 자리를 옮기는 게 좋다”(오마이뉴스, 자녀양육칼럼). “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언16:32).
잠언29장23절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
23절은 ‘교만’과 ‘겸손’의 마음 및 각 결과를 비교하여 교훈합니다. ‘절제와 양육’이란 문맥을 감안하면, 교만하더라도 정당한 꾸지람, 징계 등을 겸허히 받아들일 경우, 높아져 영예롭게 될 수 있음을 함축합니다. ‘교만, pride’의 원어는 ‘높다, 솟아오르다’란 의미의 동사에서 파생된 것이며, 겸손은 ‘낮음’을 뜻합니다. 교만의 원인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의 재산, 재능, 힘, 지혜를 믿고 상대를 내려다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학자 스미스와 해밀톤은 ‘교만은 스스로 충분함을 느끼고, 겸손을 버린 뒤 마음을 높여 이기적 욕망을 추구하는 것’으로 정의를 내립니다. 사람이 교만하면 하나님과 그분의 율법을 따라 살아야 할 당위성을 거부하며, 이익추구의 사회적 한계인 도덕과 공동체 규범을 무시합니다. 그 결과 그들은 하나님 혹은 공동체에 의해 낮아지게 됩니다(사회적 불명예, 재산의 상실, 범죄에 대한 형벌 등). 반면, ‘마음이 겸손하면’ 타인과 잘 지내고, 좋은 사회관계를 형성함으로 좀 더 많은 성공 기회를 잡게 됩니다. 또한 겸손한 자의 마음은 화평한데, 타인의 성공을 질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겸손한 자는 자신에게 충실함으로, 맡겨진 일에 능숙하게 되어, 천한 자가 아니라 왕 앞에 서는 영예를 얻습니다. 예외는 있지만 이것이 하나님이 정하신 세상의 법칙입니다. 전단의 예는 ‘자식인체 하는 종’(29:21)이며, 후단의 예는 ‘징계를 받아 행동을 고친 자식’(29:17)입니다. 신자는 축복을 받았을 때 본문을 마음에 새기고 교만하지 않아야 합니다. “겸손한 자와 함께 하여 마음을 낮추는 것이 교만한 자와 함께 하여 탈취물을 나누는 것보다 나으니라”(잠언16:19).
잠언29장24절
“도둑과 짝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미워하는 자라 그는 저주를 들어도 진술하지 아니하느니라”
본절은 재물보다 하나님을 중하게 여기는 자의 말로를 보여줍니다. 그는 재물을 탐하다가 도둑의 재물에 이르고, 마침내 위증죄까지 범하게 되어 불안 속에 떨며 살아갑니다. 전단에서 ‘도둑과 짝하는 자’의 직역은 ‘도둑과 함께 나누는 자’로서, 도둑의 행동에 동참하고 재물을 나누는 모습이고, ‘자기의 영혼을 미워하는 자’란 ‘자기의 목숨 혹은 자기 자신을 미워한다’는 의미입니다. 후단은 증인 선서 후 증인이 된 자의 책임과 벌칙을 규정한 레위기(5:1)가 그 배경인데, 그는 도둑과 한 패여서 진실된 증언을 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재물을 중하게 여기는 자들은 수단을 가리지 않고 재물에 접근하고자 하나, 이는 오히려 자기의 목숨을 미워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감찰하고 계셔서 그 죄가 폭로되든지 늦어도 죽은 후에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대 앞에 서게 됩니다. 후자는 더 나쁜 경우인데,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한편, ‘도둑’이란 단순히 절도죄 등을 범한 자가 아니라 악행을 일삼는 죄인들을 총칭한다고 본다면, 본 잠언은 재물에 대한 탐욕을 넘어,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신의 이익만을 관철하려는 인간의 본질적 죄에도 적용됩니다. 이 경우, ‘재물이냐 하나님이냐’에서 ‘세상이냐 하나님이냐’로 범위를 넓히게 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들리신 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는 세상의 악한 정체를 폭로하심으로, 속고 있던 인간들이 마음의 주인을 세상(사탄)에서 하나님으로 바꾸게 하는 계시의 사건이요(요12:30), 회개한 자들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도록 길을 여신 은혜의 사건입니다(요14:6).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요1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