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4/4/22-26)


기도하고 감사하라
빌립보서4:6절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항상 기뻐하고 관용을 베풀며 살아갈 때 종종 ‘염려’가 침입하곤 합니다. 이때 사도가 주는 두 번째 처방은, ‘기도하고 감사하라’입니다. 기도 그것도 감사를 동반한 기도가 염려를 치료합니다. 먼저, 6절의 시작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염려가 들어 왔을 때 ‘두려워 하지 않는 마음 가짐’이 중요한데, 주님을 의지하고 마음을 단단히 먹지 않으면, 흔들리기 쉽기 때문입니다.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뒤쫓는 애굽 군대와 가로막은 홍해를 보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 우리를 이끌어 내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고 모세를 몰아세웠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에 서서 ‘오늘 하나님이 주신 구원을 보라’고 대답합니다. 자신이 있었던 것이죠! 다음으로, 본문은 ‘하나님께 아뢰라(기도)’고 권면하는데, 그 기도는 “감사”가 수반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영접하신 것을 생각하면 늘 감사하게 되는데, 바로 그 감사의 마음입니다. 또,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 아닙니까? 주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 하나님께서 문제를 맡으셨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한편, 심리학자는 자신을 잘 아는 동료나 가족에게 염려에 관해 대화를 나누라고 조언하는데, 믿음의 공동체의 필요성이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께 아뢰면, 응답이 오고 있는 것은 불문가지입니다.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구원이 당도할 때까지 마음의 긴장은 믿음의 형제들과의 대화를 통해 완화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걱정을 모두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벧전5:7,표준새번역)

하나님의 초월적 평강
빌립보서4:7절
“그리하면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 넘는 하나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새번역)

본절은 감사와 함께 아뢴다면, 그 결과 “모든 지각(이해력)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그 평강(에이레네)”이 군사처럼 와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준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그 평강”이란 무엇일까요? 이는 주님의 초자연적 평강으로, 염려를 쫓아내고 강물처럼 우리 마음을 점령합니다. 그 순간은 진짜 “강 같은 평화입니다.” 재수시절 모의고사 성적이 계속 잘 나오지 않았습니다. 염려되어 기도하자 초월적 평강이 주어졌고 충만한 기쁨으로 버스 타고 집에 가는 중 마귀는 온갖 가정, 염려, 근심을 다 집어 넣었습니다. 저는 그것들과 투쟁으로 받았던 평강이 다 사라졌습니다. 우리는 당면 문제 해결이 중요하나, 하나님의 뜻은 좀 더 높습니다. 하나님은 기도 전에 그 해법을 다 준비하셨습니다(마6:8-9). 오히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것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인격을 갖추고 그리스도의 충만함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죄된 세상에 고난과 선한 투쟁 없이 어떻게 그분의 아들의 믿음에 도달할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본문의 응답을 자꾸 받으려고 애를 쓰는 사람은 믿음이 자라지 못합니다. 한 두번 경험한 뒤는 믿음의 추론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삼손의 부친 마노아는 여호와의 사자를 만난 후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는다’는 공포에 떨었으나, 그 아내는 그렇지 않음을 믿음의 추론 3가지를 들고 안심시켰습니다.(삿13:23).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1:5)

잠언29장19절
“종은 말로만 하면 고치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가 알고도 따르지 아니함이니라”

19절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합당한 조치(통제)는, 자녀, 백성 그리고 자신은 물론, 종에게도 필요함을 밝힙니다. 전단은 “종은 말로는 결코 교정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고치지 아니한다’의 원문은 가장 강한 부정어와 미완료 동사를 결합시켜, ‘절대로 아니다’란 의미를 갖습니다. 더구나, 일반어순과 달리, 솔로몬은 ‘말로만 하면’(전치사구)을 문장 서두에 두어, 부정의 의미를 더욱 강조하였습니다. 즉, ‘말만 가지고서’는 종들은 절대로 교정될 수 없는 존재들임을 솔로몬은 경험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잠언은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을 구분하지 않고, ‘아는 것은 곧 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여기 묘사된 종은 어리석어 알지만 행하지 않기에, 물리적 징계를 초래합니다. 주인과 종의 관계는 고대 지혜문학에서 자주 다루어지는 주제로 ‘회초리가 주인에게서 멀면 종은 그의 말을 듣지 않는다’(파피루스인싱거)는 격언도 그 하나입니다. 물리적인 징계를 가해야만 순종하는 종들과 달리,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면, 바로 순종하라는 교훈을 내포합니다(신10:16,마음의 할례). 다락방 강화에서, 주님은 제자들을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친구로 여기겠다고 하셨는데,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벗으로 여기신 것과 같이 말입니다. 그래서, 아버지께 들으신 모든 것을 제자들에게 전하셨습니다. 이는 그들로 열매를 맺고 그 맺은 열매가 항상 있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요15:16). 주님의 기대에 어긋남이 없이 제자들은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데 일생을 바쳤습니다.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혀 있으나, 훈계의 매가 그것을 멀리 쫓아낸다.”(잠언22:15,표준새번역)

잠언29장20절
“네가 말이 조급한 사람을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희망이 있느니라”

본절은 22절과 함께 ‘자기통제력’을 위한 교훈입니다. 솔로몬은 충동적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는 사람을 걱정하는데, 그보다 미련한 자를 더 높게 평가할 정도입니다. 왜 그럴까요? ‘말이 조급한 사람’은 자신의 언어가 초래하는 도덕적 사회적 파장을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극심한 바보이지요! ‘말’의 원어는 ‘따바르’이며, ‘말’ ‘사건, 일, 행적’ 등을 나타냅니다. 또, ‘조급한’에 해당하는 ‘아츠’는 ‘경솔하고 성급한 행동이나 말’을 지칭합니다. ‘조급함’의 원인은 자제심의 결여이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잠언의 제자는 세상은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되었음을 언제나 기억하고, 그분의 뜻에 언행심사 일체를 맞추는 것이 으뜸가는 지혜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 바보의 말은 이런 생각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자신의 어리석음을 만 천하에 드러내게 되고, 그것도 성급히 또 경솔하게 쏟아냅니다. 그의 어리석음은, ‘속히 부하고자 하는 자’ (28:20)나, ‘발이 급하여 잘못 가는 사람’(19:2)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마땅히 원할 때 원하는 것을, 그 방법까지 합리적으로 계산한 뒤, 비로서 말과 행동하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후단은, 그가 바보보다 교정받기 힘들다고 단언합니다. 이는 바보는 자신의 정욕에 지배당하여 다루기 힘들지만, 불경건한 자는 탐욕에 지배당하여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서는 도덕조차 백안시 하기 때문입니다. 잠언에서는 그런 자를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와 함께 “가장 최악의 바보”로 분류됩니다. “네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를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희망이 있느니라”(잠언26:12).

잠언29장21절
“종을 어렸을 때부터 곱게 양육하면 그가 나중에는 자식인 체하리라”

‘곱게 양육하다’는 말은 ‘파나크’의 번역입니다. 이 단어는 구약성경에 오직 한 번만 등장하기에 그 의미를 단정하기 어렵지만, 학자들은 ‘지나친 사랑으로 애지중지 키운다’는 뜻으로 해석합니다. 한편, ‘자식’이란 말의 원어 ‘마논’도 그와 같아, ‘풍족하게 자라 버릇없이 구는 자식’을 의미한다고 추측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종이 어리다고 응석을 받아 주면 자라서 버릇없이 군다’고 한 공동번역처럼, 귀엽다고 종을 지나친 사랑으로 키우면 결국 예의도 모르는 종이 된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종이 주인의 사랑이나 호의를 받는다면 좋은 일이나, 그가 겸손하고 성실함을 유지할 때만 축복입니다. 만약 주인의 총애를 받았다고 해서 분수를 모르고 자식처럼 행세하면, 주인은 물론 주위 사람들을 참을 수 없게 만들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은 ‘땅을 뒤흔들고 세상이 견딜 수 없게 하는 사건으로, ‘종이 임금이 되고 바보가 부자 되고 꺼림칙한 여자가 시집가고 계집종이 안주인 자리를 빼앗는 것’을 언급합니다(30:21-23,공동번역). 그러나 이런 일들은 종종 일어나는데, 인간 내부에 자리잡은 ‘죄의 속성’(원죄)이라 하겠습니다. 따라서, 우리들이 성공, 축복, 은혜를 위해서는 밤을 새워 부르짖으나, 겸손을 위해서는 별로 노력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징계로 바로잡지 않으면 은혜와 사랑이 오히려 심판을 초래할 수 있음을 유의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지극히 큰 계시와 능력을 부여한 사도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를 둔 이유입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