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3)- 어린 시절
사려깊은 하녀로부터 엄한 교훈을 배우고 자랐지만, 모니카는 오히려 술마시는 악습에 빠졌습니다. 당시에 흔히 그랬듯이 모니카 부모님은 어린 모니카에게 술통에서 술을 가져오라고 심부름을 시켰는데 그때마다 호기심이 발동하여 아주 조금 술을 맛보다가, 점점 더 빠져 결국 습관이 되었습니다. “작은 것을 멸시하는 자는 조금씩 넘어지게 된다”는 격언이 맞습니다. 어거스틴은 말합니다: “만일 주님이 준비하신 약이 우리를 지켜 주지 않는다면, 그 무엇이 우리의 이 은밀한 병을 고쳐 줄 수 있겠습니까?…주님은 다른 사람의 비수 같이 날카롭고 통렬한 모욕적인 말을 통해서, 어머니의 저 썩은 부분을 한 방에 도려내신 것이 아니었습니까?” 당시 모니카는 곳간으로 술을 가지러 갈 때에는 한 하녀와 함께 갔습니다. 그러나 그 하녀와 단둘이 있을 때는 종종 다투었고 그날도 말다툼이 벌어졌습니다. 그 하녀는 모니카가 남몰래 술을 마시는 악행을 들추고는, “술주정뱅이”라고 부르면서, 아주 지독한 모욕을 안겨 주었습니다. 큰 충격을 받은 모니카는 그 즉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악습을 끊었습니다. “친구들의 아부하는 말들이 우리를 망쳐 놓는 것처럼, 원수들의 모욕하는 말들은 흔히 우리를 바로잡아 놓습니다.” 그 하녀는 모니카의 나쁜 버릇을 고쳐주기 위함이 아니라, 격동시키고 괴롭히기 위함이었지만, 주님은 “광분한 하녀의 말”을 통해 모니카를 고치시는 약으로 사용하셨습니다. 따라서, 비록 우리의 어떤 권면과 훈계가 다른 사람의 잘못을 고치는 계기가 되었더라도, 마치 우리 자신의 힘으로 그렇게 한 것처럼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이 세상에 없는 그리스도인의 지혜와 겸손입니다.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잠11:2)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4)- 결혼생활
어머니 모니카가 조신하고 분별력 있게 성장 한 것은, 인간적인 교육의 결과로만 보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이다’고 말한 점은 새겨두어야 합니다. 어거스틴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에 대한 순종은 부모님을 넘어, 주님께 대한 순종임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외형상으로는 사려깊은 늙은 하녀, 모욕을 준 하녀 등을 통해 배우고 결단한 것이지만, 실상은 모니카 안에 계시는 성령님께서 그녀에게 주님께 순종하는 법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사람들과의 차이입니다. 혼기가 찬 모니카는 비그리스도인 파트리키우스를 남편으로 맞아들였습니다. 모니카는 남편을 주님께 드리기 위해, 자신의 행실로써 남편에게 주님을 전하였고, 주님은 모니카의 그러한 행실을 사용하셔서, 남편에게 아름답고 사랑스러우며 대단한 사람으로 보이게 하였다고 적고 있습니다. 남편이 바람을 피워도 인내로써 감당하였고, 그 일로 남편을 미워하여 불화하지 않고, 도리어 주님의 자비가 남편에게 임하여 주님을 믿고서 그 삶이 정결하게 되기를 기다렸다고 합니다. 믿음과 인내 그리고 기도가 모니카의 ‘절대 무기’였던 것 같습니다. 남편은 아주 너그럽고 친절한 사람이었지만, 때론 불같이 화를 내는 성격이었습니다. 그러나 모니카는 화난 남편의 심기를 건드리는 것은 어리석다고 보고 말도 행동도 조심하였고, 남편의 화가 가라앉고 진정되면, 적당한 기회를 보아서 자신의 행동과 그 이유를 조곤조곤 이야기 해서 오해를 풀곤 하였습니다. 그 결과 모니카의 결혼 생활에 남편의 폭행은 없었습니다. 우리가 배워야 할 지혜와 인품입니다. “여러분은….썩지 않는 온유하고 정숙한 마음으로 속 사람을 단장하도록 하십시오. 그것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값진 것입니다.”(벧전3:3,4)
잠언29:7절
“의인은 가난한 자의 사정을 알아 주나 악인은 알아 줄 지식이 없느니라”
‘지식이 없다’는 말은 단순히 학력이나 배움의 부족이 아니라, 타인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공감하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학력이 높고 교육을 많이 받아도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의 처지나 아픔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는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반면, 은혜를 통해 거듭난 사람들은 비록 배움이 부족해도 곤란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고통을 누구보다 빨리 느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님을 통해 그들을 거듭나게 하신 주님의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고전2:16). 즉, 그들 모두는, 주 예수께서 인간이 되셔서 가정의 생계를 위해 땀 흘리며 일하셨으며, 병자들과, 가난한 자들을 돌보시면서 하나님 나라의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셨고, 더나아가 당신의 몸을 죄인들을 위한 희생제물로까지 드리셨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독일의 여성 신학자 도로시 죌레(1929-2003)는 뉴욕 성당의 한 집회에서 큰 충격을 받았는데, 우아한 차림의 한 여성이 나와, 자기가 본 남미의 아름다운 경관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다가,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것은 모두 미국 백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간증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남미의 거의 모든 나라가 독재정권에 의한 탄압과 심각한 인권유린, 극심한 빈부격차, 개발과 성장이란 이름 아래 무차별적인 자연 파괴가 자행되어 온 곳이었지만, 그녀는 화사한 차림으로 고급호텔과 관광명소만 드나들며 남미의 겉모습만 보고 원더풀을 외쳤습니다. 마치 문 앞 거지 나사로를 무시하고 살아간 부자와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주님을 본받아 균형 있는 사고가 필요합니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잠언19:17)
잠언29:8절
“거만한 사람은 성읍을 시끄럽게 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분노를 가라앉힌다.”(새번역)
본 절은 의인과 악인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묘사합니다. 6,7절에 등장하는 ‘악인’을 ‘거만한 자’로 표현하는데, ‘거만한 자’는 히브리어 ‘라촌’의 번역입니다. ‘라촌’은 ‘입을 삐죽이다’, ‘비웃다’는 뜻이며, 권위의 멸시나 하나님의 말씀을 조롱함을 내포합니다. ‘시끄럽게 하다’의 원어는 ‘야피후’이며, ‘불다’ ‘내뿜다’란 뜻으로, ‘불’이나 ‘거짓말’과 함께 사용됩니다. 그렇다면, 전단은 거짓된 입술로 선동하여, 불을 일으킴과 같은 극심한 혼란을 야기한다는 뉘앙스를 전달하여, 사회가 불안정한 이유를 알게 합니다. 이는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악인들이 사람들을 선동하고 다니기 때문입니다. 그 반면, 의인은 ‘지혜로운 사람’으로 묘사되며, 그들은 사람들의 분노를 가라앉게 합니다. ‘분노’는 악인에 의해 야기된 성난 감정으로, 의인은 그런 사회적 동요를 진정시켜 사회 질서를 회복시키는 지혜자입니다. 사회질서의 안정이야말로 평화스러운 삶의 가장 중요한 전제입니다. BC 990년 경 일어난 둘째 아들 압살롬의 반란을 극복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다윗 왕은 비그리의 아들 세바의 반란 선동에 직면하였습니다. 세바는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 두루 다녀서 얻은 추종자들을 이끌고 아벨 성에 들어갔고, 그들을 뒤쫓은 군대장관 요압은 토성을 쌓고 성을 쳐서 헐려고 하였습니다. 그때, 아벨 성에서 한 지혜로운 여인이 나타나 요압을 진정시키고, 성읍 백성들을 설득하여 세바의 머리를 요압에게 던짐으로 성을 보전하였습니다(삼하20:14-22). 다툼이 있을 시 우리가 배워야 할 자세입니다. “부드러운 대답은 분노를 가라앉히지만, 거친 말은 화를 돋운다.”(잠언15:1,새번역)
잠언29:9절
“지혜로운 자와 미련한 자가 다투면 지혜로운 자가 노하든지 웃든지 그 다툼은 그침이 없느니라”
악인은 여기서 미련한 자로 등장합니다. 지혜자는 합리적으로 문제를 처리하지만, 미련한 자는 교만과 탐욕을 버리지 않아서 그 분쟁은 그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지혜로운 자와 미련한 자 사이의 다툼은, 차분하게 결론으로 향하지 못하고 오직 혼란이 있을 뿐입니다. 이때 미련한 자는 목을 곧게 하고 어떤 지혜도 무시하려는 특질을 염두에 두면서, 치밀어 오르는 노를 자제해야 합니다. 잠언이 “미련한 사람이 어리석은 말을 할 때에는 대답하지 말아라. 너도 그와 같은 사람이 될까 두렵다.”(26:4,새번역)라는 권고는 많은 경우 타당하므로, 그런 자와는 아예 논쟁 자체를 시작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만, 불가피한 다툼이 전개될 시, 본 잠언은 해결될 때까지 인내하라는 의미로 생각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미련한 사람이 어리석은 말을 할 때에는 같은 말로 대응하여 주어라. 그가 지혜로운 체할까 두렵다.”(26:5,새번역)는 잠언이 참고가 됩니다. 솔로몬 시대에, 창기 두 사람이 산 아기와 죽은 아기를 두고 서로 다투다가 왕 앞에 왔습니다. 악한 여인이 벌린 이 다툼이 그칠 수 없음은 자명합니다. 그렇다고, 실제 어미가 자신의 아들을 포기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왕 앞에 온 것은 지혜로운 처신입니다. 왕의 지혜에 대한 소문을 무시한 미련한 여인은, 증거 없음을 확신하고 거짓으로 일관하였으나 탄로 났고, 큰 벌을 받았을 것입니다. 솔로몬은 주님의 상징입니다. 마지막 날 정의의 심판이 내려질 것이므로, 미해결의 문제들은 주님을 신뢰하고 인내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네 갈 길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만 의지하여라. 주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시편37:5,새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