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4/3/11-15)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1)

어거스틴(AD354-453)의 「고백록」은 전 세계와 모든 세대에서 널리 읽힌 고전으로 어거스틴은 당대 제일의 수사학자요 신학자였기에, 뛰어난 문체와 신앙에 유익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고백록」은 어거스틴이 북아프리카 히포 교구의 주교로서 교구 성도들의 신앙교육을 위해 쓰여졌으며, 아들의 눈으로 보기에 어머니 모니카(AD332-387)성도는 훌륭한 어머니요 아내요 이웃이었습니다. 모니카는 어거스틴이 밀라노에서 세례를 받고, 수사학 교사의 직을 던지고 주님을 섬기기로 결심하여, 함께 아프리카로 돌아오던 중 로마의 항구 도시 오스티아에서 죽습니다. 이때 모니카는 자신의 기도를 너무나도 풍부하게 응답하신 주님의 선하심을 가슴에 품고 기쁘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거스틴은 어머니의 삶을 고백록에 적어 후세에 남기기 원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모니카는 육신으로도, 영적으로도 그를 낳은 어머니여서, 그에게 육신의 빛과 영원한 빛을 모두 볼 수 있게 해 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니카가 훌륭한 어머니이지만 초점은 주님께 두어져서, 사사로운 정에 흐르지 않았고 경건함도 잃지 않았습니다. 어거스틴은 지금이나 그때나 동일한 사실 하나를 말합니다: “어머니는 자기 자신을 지은 것도 아니었고, 자기 자신을 양육한 것도 아니었으며, 조부모도 자기들에게서 어떤 아이가 태어나게 될 것인지를 알지 못하였지만, 오직 주님께서 어머니를 지으시고, 주님의 교회의 신실한 지체였던 한 그리스도인의 가정에서 태어나게 하셔서, 주님의 독생자이신 그리스도의 교훈의 회초리로 양육 받게 하신 것이었기 때문입니다”(p284). 이 대목은 우리 모두 가슴에 담아 두어야 할 것입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엡6:4)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2)

「고백록」에 따르면, 모니카의 신실한 삶은 자신의 열심이 아니라, 집안의 나이든 하녀 덕분입니다. 그 하녀는 모니카의 부친을 업어 키우다시피 했는데, 워낙 오랫동안 일해 온 데다가 나이도 아주 많고 성품도 훌륭해서, 그 그리스도 가정의 어른들도 그녀를 존중했습니다. 그래서 그 집안의 딸들(어린 모니카 자매들)을 돌보는 일도 그 하녀에게 맡겨졌고, 그녀는 성심을 다해 수행하였으며, 필요시 경건함과 엄격함으로 딸들을 엄하게 통제하면서도, 지혜롭고 사려 깊게 가르쳤다고 전합니다. 지금부터 1700년 전 북아프리카에서도, 여자들이 술에 빠져 사는 문제가 심각하였던 것 같습니다. 따라서, 그 하녀는 술을 먹는 것과 같은 나쁜 습관이 아예들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너희가 지금 물을 마시는 것은 술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이 아직 너희에게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물 마시는 것도 절제하지 못하면, 나중에 결혼하여 부엌살림을 맡고 곳간을 마음대로 출입하게 되면, 물은 쳐다보지도 않고 맨 날 술을 마셔서, 술 마시는 것이 몸에 밴 습관이 되어 버리게 된다” 이런 교훈과 함께, 자신이 가진 권위로 명함으로써 아직 어려 자신의 욕구들을 자제하기 힘든 그녀들을, 갈증나서 목이 타들어가도 물조차 마시지 못하게 하는 훈련을 통해 절제와 인내심을 갖도록 양육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 집안의 딸들은 자신이 하지 않아야 하는 일들은 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 그녀들의 몸에 배게 하였답니다”(p284). 그러나, 모니카 역시 아주 사소한 일이 계기가 되어 은밀히 술 마시는 습관을 갖게됩니다. 주님은 어떻게 어린 모니카의 악습을 고치셨을까요? 모욕과 충격을 통한 금주의 결단입니다.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네가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도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잠언3:15).

잠언29:4절
“왕은 정의로 나라를 견고하게 하나 뇌물을 억지로 내게 하는 자는 나라를 멸망시키느니라”

3절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불의(창기와 방탕)가 개인의 재산을 잃게 함을, 4절은 공적인 불의(뇌물과 중세 등)로 인한 국가의 파멸을 경고합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 하면 생기는 지혜를 갖고 정의를 추구해야 합니다. 후단의 ‘뇌물을 억지로 내게 하는 자’는 ‘뇌물을 받는 자,’ ‘중세를 부과하는 자’ 혹은 ‘탐욕스러운 자’등으로 번역되나, 앞의 ‘정의’와 함께 생각하면, 주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모든 불의를 지칭합니다. ‘멸망시킨다’ 말은, ‘넘어뜨리다’, ‘파괴하다’란 뜻의 원어 ‘하라쓰’의 번역으로 성벽이나 건물의 파괴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불의를 행하는 자’는 사회와 국가를 공격해 무너뜨리는 ‘용맹한 적국의 장수’와 같은 존재입니다. 왕은 전력을 다해 그런 자를 발본색원하고, ‘정의로운 통치’를 확립해 혼란을 미연에 방지해야만 합니다. 따라서, 이 교훈은 언제나 옳지만, 지혜로운 왕은 현실을 수용하는 통치기술이 있습니다. 황희 정승은 태종때부터 무려 40년 간 공직에 있을 정도로 유능하고 처신에 밝았습니다. 그러나, 절의 여종 사이에서 태어난 서자 황중생의 궁중 창고 절도 사건, 처남들의 위법 행위에 대한 구차한 변명, 사위 서달이 아전을 죽인 죄를 은폐하려고 상주문을 조작한 행위 등을 알고도 세종대왕은 황희를 계속 중용하였습니다. 유능한 신하의 약점을 잡고 충성을 다하도록 한 세종의 통치기술로 생각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왕 같은 제사장들로서, 미워하는 자에게도 선을 행하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기술을 가져야 합니다(눅6:27). “지혜로운 왕은 악인들을 키질하며 타작하는 바퀴를 그들 위에 굴리느니라”(잠언20:26).

잠언29:5절
“이웃에게 아첨하는 것은 그의 발 앞에 그물을 치는 것이니라”

5,6절은 ‘그물’과 ‘올무’라는 표현을 각 사용하여 악인은 타인과 자신을 멸망하게 하나, 의인은 기쁨과 행복의 삶을 누린다는 사실을 밝힙니다. 영원한 심판과 생명까지 함축되어 있음 역시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첨하는’에 해당하는 원어 ‘할라크’는 ‘매끄럽다’, ‘부드럽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른 진실을 외면하고 이웃의 환심을 사려고 거짓된 칭찬의 말, 즉 듣기 좋은 소리를 늘어 놓는 상황을 묘사합니다. ‘그물’에 해당하는 ‘레쉐트’는 새와 같은 사냥감을 잡는 도구로서, 누군가를 파멸에 이르게 할 때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문제는, 파멸의 대상인 ‘그’가 아첨하는 자 본인인지, 아첨을 받는 자인지 확실하지 않은 점입니다. 전자의 견해를 따르면, 남을 해하려는 악인의 아첨이 궁극적으로 자신을 멸망케 한다는 의미가 되고, 후자의 견해를 따르면, 아첨을 받은 이웃이 올바른 상황 판단을 못하여 파멸한다는 뜻입니다. 6절이 전자의 사례를 다루기 때문에 후자의 견해가 좀 더 타당합니다. 좋은 예가 길르앗 라못에서 아람 왕국과 전투 중 죽은 이스라엘 왕 아합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악한 왕 아합의 승리가 하나님의 뜻이라면서 부추켜서 아합은 확신을 갖고 전쟁터로 갔으나, 실상은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아합은 전사하였습니다. 악행을 보고도 책망치 않는다면, 파멸을 방조하는 행위입니다. 2001년 영화 ‘친구’에서, 친구 동수를 죽인 죄를 자백한 준석은 법정에서, “어릴 때 ‘너 그런 짓 하면 안돼!’ 라는 말 한 마디만 들었어도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는 최후의 진술은 시사하는 점이 많습니다. “지혜 있는 자의 교훈은 생명의 샘이니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느니라”(잠언13:14).

잠언29:6절
“악인이 범죄하는 것은 그 자신에게 올무를 씌우는 것이지만, 의인은 노래하며 즐거워한다”(새번역)

전단을 직역하면, “악인의 범죄에는 올무가 있다”입니다. 악인은 자신의 이익에만 초점을 두기에, 숨겨져 있는 파멸의 덫을 깨닫지 못합니다. 영화나 드라마의 소재가 바로 그 올무에 잡혀 파멸하는 악인입니다. 이른바 반전의 반전입니다만, 역사는 어느 드라마 보다 더 극적인 사례들을 수 없이 증언해 왔습니다. 신천지 이만희 총회장은 수십억원의 교회 돈을 제멋대로 사용하여, 자신의 노후와 신혼집을 위해 ‘평화의 궁전’(가평)을 짓고 자신의 명의로 등기하는 범죄를 저질렀다가, 서둘러 신천지 교회의 명의로 바꾸는 등 여러 경제범죄를 저질렀습니다. 어리석은 노인입니다. 대법원은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의 형을 확정하였습니다(2022.8.12). 현재 이만희 씨는 조심하지 않으면 집행유예가 취소되어, 90 고령에 수감생활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 반면, 의인은 노래하며 즐거워하는데, 자신을 잡으려고 악인이 설치한 ‘올무’를 하나님의 은혜로 피하게 된 것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하만은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장대를 만들어 놓고 왕의 허락을 받기 위해 대궐로 들어 가고 있을 때, 왕은 잠이 오지 않아 역대의 일기를 읽다가 모르드개의 선행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마침 왕국에 도착한 악한 하만에게 명령하여 모르드개에게 왕복을 입혀 수산 성 전체를 다니며 높여주라고 합니다. 모르드개는 하나님의 섭리로 악인의 올무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는데, 하나님이 그의 대적이 되시기 때문이며, 의인은 밤에도 발뻗고 잠을 잘 수 있는데, 하나님이 그의 보호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악인은 쫓아 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 같이 담대하니라“(잠언2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