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움6:29b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
원수되는 둘째 예는 옷을 빼앗는 경우입니다. 누가복음은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 고 기록한 반면, 마태복음은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라고 적어, 옷의 순서가 바뀌어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겉옷의 전당을 금지하는 모세율법과 미쉬나를 가진 유대인 독자를, 누가복음은 그런 규정이 없는 이방인 독자를 각각 염두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방인 데오빌로 각하에게 누가 역시 관대함에 관한 주님의 거룩한 명령을 전달해야만 합니다. 누가는 겉옷을 강탈당하는 상황을 전제하고, 겉옷을 빼앗길 때 보복하지 말고 오히려 속옷까지 주라고 변형시켰습니다. 메시지는 동일합니다. 세관에서 일을 보고 있던 레위는 부르심을 받았을 때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듯이, 기꺼이 자신의 것을 주라는 교훈을 말입니다. 매우 훌륭한 성경 해석 방법입니다. 작고하신 송기식 목사님은 어느날 교회의 사무실에 앉아 있는데 도둑이 들어와 칼을 대면서 돈 내놓으라고 강요하였습니다. 목사님은 ‘내가 목사인데 무슨 돈이 있겠냐?’ 하시면서 칼을 내려놓고 사정을 말해보라고 타일렀습니다. 도둑은 칼을 내려놓고 고향에도 갈 수 없는 사정을 털어놓았고, 목사님은 차비를 주어 보냈습니다. “현자는 남의 경험에서 배우고, 보통 사람은 자신의 경험에서 배우고, 미련한 자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동서양의 고전의 중요성이 여기 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영감된 지혜로 넘쳐납니다. 읽고, 묵상하고, 행하여 주님의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내가 주의 증거들을 늘 읊조리므로 나의 명철함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 나으며”(시119:99).
마태복음6:21절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주님은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요3:3) 하셨는데, ‘중생’의 여부는 단순히 우리의 고백이나 느낌보다, 참된 믿음과 사랑을 갖고 주님의 뜻을 실천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 첫째 시금석이, 우리가 중요시 여기는 보물의 소재입니다. 하나님도 내세도 없는 이방인의 삶은 ‘무엇을 먹고 마시고 입을까’ ‘어떤 집에 살며, 어떤 차를 살까’ ‘어떻게 해야 재물을 더 많이 모을까’에 초점을 두게 됩니다. 그들의 보화는 ‘의식주’로 대변되는 생존, 부귀영화, 혹은 ‘자기실현’이 인생의 목표입니다. 논어의 이상인 ‘수신제가치국평천하’가 좋은 예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그것들은 인생의 전부나 목적이 아닙니다. 이는 지나갈 세상에 속한 것이라, 영원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의 ‘보물이 있는 곳’은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하신 주님의 칭찬과 그분과의 영원한 교제에 있습니다. 이 같이 참된 재산, 명예요 만족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데 있지, 세상의 소유는 단지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주님의 일을 하는데 필요한 정도, 혹은 인간다운 생활을 영위할 정도면 족합니다. 만약 필요 이상의 소유가 주어졌다면, 재단법인을 세우든지, 선한 사업을 위해 기부하든지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데 힘써야 합니다(딤전6:17-19).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소유의 문제를 쉽게 해결합니다. 우리 인생의 목적과 의미는 그분의 나라와 의를 구할 때만이 채워지기 때문에, ‘자기실현’이라는 인본주의적 목표의 도달에 안주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
잠언29:1절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이 곧은 사람은 갑자기 패망을 당하고 피하지 못하리라”
이 잠언은 건설적인 비판을 무시하는 자에게 갑자기 닥쳐올 파멸을 경고합니다.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에 해당하는 ‘토카호트’는 명사 ‘토케하=책망’의 복수형이며, ‘이쉬=사람’와 연계되어 ‘책망들의 사람’으로 직역됩니다. 그는 자신의 잘못과 죄를 충분히 깨달아 알 수 있을 정도로 많은 견책과 책망 받은 자를 의미합니다. ‘목이 곧은’이란 대목은 주인의 말을 듣지 않는 고약하고 못된 짐승이 멍에를 지지 않으려는 모습에서 유래한 것으로, 책망과 경고를 받아들이기 거부하는 완악함과 교만함을 함축하는 표현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악인의 자세를 연상케 합니다. 일찍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항상 불순종하자 하나님은 그들을 ‘목이 곧은 백성’(출32:9)이라고 탄식하셨습니다. 후단은 이처럼 책망을 귀담아듣지 않는 패역한 악인의 비참한 운명을 다루는데, 그들에 대한 멸망은 ‘갑자기’ 닥쳐오나 피할 수 없다는 선언입니다. 솔로몬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는 순간’을 나타내는 ‘페타으= 눈을 뜨다’라는 부사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다’라는 의미를 가진 ‘잇솨베르’를 함께 사용하여. 악인이 눈을 뜨고 일어나 보니 전혀 예상하지도 못한 심판이 도래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릇이 한번 깨어져 산산조각 나면 다시 복구할 수 없듯이 악인도 홀연히 닥치는 심판을 받고 결코 회복될 수 없는 처지에 이르게 됨을 배울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의 죽음도 그렇지만, 죽자마자 들이닥치는 영원한 심판은 본 잠언의 가장 좋은 예입니다. 그리스도를 굳게 붙잡고 성령님을 따라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전12:14).
잠언29:2절
“의인이 많아지면 백성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권세를 잡으면 백성이 탄식하느니라”
본 구절은 28:12, 28과 동일한 내용이며, 의인과 악인이 국가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대조합니다. 전단의 ‘의인이 많아지면’은 후단의 ‘악인이 권세를 잡으면’이라는 표현에 비추어, 숫자의 증가 보다는 ‘의인이 권세를 잡거나 뜻이 관철되는 상황’을 말합니다. 의인이 권세를 잡으면 백성이 즐거워하는 이유는 의인 자신의 삶도 모범적일 뿐만 아니라, 지혜와 정의로 공동체를 이끌게 될 것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악인이 권세를 잡으면 탄식할 수밖에 없는데, 그들이 내릴 어리석은 결정이나, 착취가 충분히 예상되기 때문입니다. 잠언에서 의와 지혜, 악과 미련함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지혜의 본질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잠1:8). 지혜자는 그 가르침을 마음에 간직하여 하나님의 명령인 율법을 준행하고, 미련한 자는 교만하여 그것을 버리고 자신의 뜻대로 살아갑니다. 의인들은 율법에 귀를 기울이는 지혜자로서, 국가를 번영으로 이끌고, 백성들은 행복을 누리며, 열방 가운데서도 영광을 얻게 됩니다. 다윗, 솔로몬, 여호사밧, 히스기야 시대의 통치는 좋은 예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귀를 돌려 듣지 않는’ 어리석은 악인이 권력을 잡으면 백성들은 고통을 당하기 마련입니다. 므낫세의 55년 통치가 그 예입니다. 공동체의 번영 없이 개인의 번영은 없습니다. 그러나, 다윗과 솔로몬의 통치에서도 드러나듯이 완전한 의인과 지혜자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다만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일 뿐입니다.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사9:7).
잠언29:3절
“지혜를 사모하는 자는 아비를 즐겁게 하여도 창기와 사귀는 자는 재물을 잃느니라”
2절이 국가와 사회적 차원에서 의인과 악인의 영향력을 관찰하였다면, 이 구절은 개인적 차원에서 양자를 묘사합니다. 전단에서 ‘지혜를 사모한다’는 말은 주님을 경외하며 의롭고 바르게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1:7). 그는 지혜자로서, 잠언은 부귀와 장수가 있다고 하니(3:16), 부모에게 기쁨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창기를 사귀는 자는 재물을 잃는다’ 하였는데, 재물은 물론 인생 자체를 낭비하고 귀한 생명조차 빼앗깁니다. 방종한 삶에는 늘 병이 따라 다니고 그 결과 단명한 사례는 아주 많습니다. 따라서 잠언은 “음녀로 말미암아 사람이 한 조각 떡만 남게 됨이며 음란한 여인은 귀한 생명을 사냥함이니라”(6:26)고 엄히 경고합니다. 한편, 좀 더 넓게 보면 창기는 사단의 지배 하의 음란한 세상을 상징합니다. 탕자의 비유가 있습니다(눅15:11-32). 그는 아버지로부터 재산을 받아 멀리 타국으로 가서 창기와 함께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인생의 바닥에 떨어지자 아버지 집이 생각나 돌아옵니다. 아버지는 멀리서 아들을 보자 달려나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아들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하나, 아버지는 ‘제일 좋은 옷과 가락지, 그리고 발에 신을 신기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라.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잃었다가 다시 얻었다’하며 즐거워 하고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이를 깨달은 인간의 반응에 대한 아름다운 글입니다. 복음의 메시지를 마음에 품으면, 사이가 소원한 사람들을 사랑해 줄 수 있습니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눅1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