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4/1/29-2/2)

시편23편, 관계의 축복(2) – 목자되신 주님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2절)

시편 23편은 다윗의 시로서, 복음서의 이해를 위하여 중요합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요 10:11)는주님의 말씀은, 단지, 그 당시 청중들에게 친숙하기에 사용하신 은유가 아닙니다. 시편 23편과 다른 시편들에서 왕 다윗과 이스라엘 민족의 목자로 은유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주님은 목자의 은유를 통해 자신이 왕 다윗과 이스라엘의 목자되심을 암시하신 것입니다. 다윗은 왕이었지만 죄와 사망의 권세 앞에 무릎을 꿇었고, 하나님의 집에 영원히 살지 못하고, 쫓겨나야만 하는 죄의 종이었습니다(간음과 살인죄). 구속의 복음에 비추어 시편 23편을 “다시 읽을” 수 있도록 하신 것은 그리스도 자신의 말씀입니다(벧전 2:25 및 5:4). 시편에는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속한 출애굽 사건이 여기저기 메아리칩니다. 그러나, 그 메아리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려서 영원한 속죄를 이루신 다윗의 목자가 쟁취한 구속의 메아리로 우리에게 다시 들려집니다(요10:11). 암으로 죽어가는 어린 소년의 어머니는 그에게 시편 23편을 가르쳐 주면서 엄지손가락부터 시작하여 손가락으로 다섯 단어를 세면서 “The Lord is my shepherd”를 반복하게 했습니다. 그의 약지는 “my”라는 단어였습니다. 어머니는 예수님이 그와 맺은 관계를 상징하는 손가락을 주먹에 쥐라고 가르쳤습니다. 그 소년은 약지를 잡은 채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목자의 품에 안긴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주님이 나의 목자라고 말할 수 있는 자리에 와야 합니다 “선지자의 글에 그들이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요6:45).

잠언28:15절
“가난한 백성을 압제하는 악한 관원은 부르짖는 사자와 주린 곰 같으니라”

악한 통치자의 등장으로 우리 민족도 많은 수탈을 당하였으며, 우리가 겪은 그들의 학정은 ‘부르짖는 사자와 주린 곰’과 같이 두렵고 떨렸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일반적인 가르침은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하라’(롬13:1;출22:28)는 요구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이 선하매, 통치 권력 역시 선한 것이나(딤전4:4; 롬13:1), 악한 통치자는 그 ’선한 제도’를 타락시켜 사익을 채우는 도구로 전락시킵니다. 따라서, 모두 힘을 합쳐 이 짐승들을 몰아내듯이, ‘악한 통치자(관원)’를 쫓아내라는 내용도 담겨 있다 하겠습니다(프랑스 대혁명; 저항권). 한편, 국가와 교회(성도)의 관계에 관해 4가지 모델이 있습니다: (1)국가가 교회를 통제한다는 ‘국가 만능론’, (2)교회가 국가를 통제한다는 ‘신정’, (3)국가가 교회에 호의를 베풀고 교회는 그 호의를 계속 받기 위해 국가의 편의를 도모하는 타협안인 ‘콘스탄틴주의’, (4)교회와 국가가 건설적 협력 정신으로 하나님 주신 각자의 독특한 책임을 인정하고 격려하는 ‘동반자 관계'(타당, 존 스토트). 로마서 13장은 로마나 유대 당국은 대체로 교회에 비호의적이고 심지어 적대적이기도 하지만, 그들에게 순종하고 협력하라는 메시지입니다. 어떻게 행동해야 하겠습니까? 고 김수환 추기경은 박정희 현직 대통령에게는 날 선말로 비판하였으나, 4천억 비자금을 가진 노태우 전직 대통령에게는 ‘어떤 돌이라도 맞겠다’고 하였으니 품어 주자 한 말은 참고가 됩니다만,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도자들이 선출되어야 합니다. 기도하고 투표해야 합니다. “이전 총독들은…백성을 압제하였으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이같이 행하지 아니하고”(느5:15).

잠언28:16절
“무지한 치리자는 포학을 크게 행하거니와 탐욕을 미워하는 자는 장수하리라”

16절은 15절의 악한 통치자의 출현의 이유와 공의로운 통치자가 되는 비결을 진술합니다. 전단은 악한 통치자의 학정의 이유는 ‘무지함’ 때문이며, 후단은 장수하는 공의로운 통치자의 비결이 ‘탐욕을 미워하는’ 것임을 말합니다. ‘무지한’의 원어는 ‘하싸르 테부노트’이며, ‘이해력이 없는’ ‘지식이 부족한’ 뜻이 담겨 있습니다. 공동 번역은 ‘어리석은’, 새번역은 ‘슬기가 모자라는’으로 번역하였으나, 단순히 통치 기술이나 능력의 부족으로만 이해하면 안됩니다. 근원을 보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통치자의 도덕성 문제입니다. 그 통치자는 참된 통치의 길인 하나님의 뜻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기에, ‘잘못된 행위’로 요약되는 탐욕, 착취, 수탈 등의 ‘포학’을 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그런 ‘포학을 크게 많게 행한다’고 묘사되어, ‘부르짖는 사자와 주린 곰’(15)의 모습을 또 한 번 생각나게 합니다. 1989. 12. 25에 총살 당한 독재자 차우체스코 루마니아 대통령 부부가 떠오릅니다. 루마니아 국민들이 차우체스코의 학정에 분노하여 들고 일어나자, 이들은 헬기를 타고 도망가다 잡혔습니다(12/23 체포). 그리고 전격적으로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사형이 결정되었고, 2시간 만에 집행되었습니다. 북한 김일성, 김정일 부자는 이를 알고 매우 두려워 하였습니다. 후단의 ‘탐욕을 미워하는’이란 ‘폭력에 의한 취득’ 혹은 ‘불의한 이득’을 뜻하며, 전단의 포학의 목적을 알려줍니다. 공의로운 통치자는 당연히 이런 불의한 짓을 거부하고 바르게 백성들을 다스림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며 장수하게 되는 것입니다.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상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잠언22:4).

잠언28:17절
“사람의 피를 흘린 자는 함정으로 달려갈 것이니 그를 막지 말지니라”

홍수 심판 후 하나님은 노아의 가족에게 번성의 축복과 생명 존중의 계명을 주셨습니다: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창6:6). 17절은 성경 전체에 흐르는 인간 생명의 고귀성을 또 한 번 확인합니다. ‘사람의’에 해당하는 원어는 ‘나페쉬’이며, 이는 ‘숨쉬는 존재’를 지칭하나, 여기서는 살아 숨쉬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피’는 생명을 상징하며(창9:4), ‘흘리다’의 원어는 ‘아슈크’로서 ‘학대 받는 자’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전단은 ‘사람의 피를 흘린 것 때문에 몹씨 괴로워 하는 자’를 의미하여, 살인자가 받는 무서운 죄책감을 극명하게 표현합니다. ‘함정으로 달려갈 것이다’는 ‘죽을 때까지 도망 다녀야 한다’ 혹은 ‘무덤(구덩이)으로 달려갈 것이다’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이는 ‘함정’을 말하는 원어 ‘뽀르’가 ‘숨는 장소’나 ‘죽음을 상징하는 무덤’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개정개역은 ‘함정’으로 번역하여 심판과 멸망의 뉘앙스를 줍니다. 한 예가 가룟 유다입니다. 그는 예수께서 십자가의 정죄를 당하자, 자신이 ‘무죄한 피’를 흘린 것을 알고 무서운 양심의 가책을 받아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습니다. 후단은, 살인의 죄책을 진 후, 도망다니는 자(가인)나,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하는 자(가룟유다)를 불쌍히 여겨 도와주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다만, 다윗과 같이 회개하여 구원받는 경우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시편51장). 15,16절과 연관하여 보면 회개하지 않는 악한 통치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확인하는 메시지입니다.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요일5:17)

시편23편, 인도의 축복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4절)

본 시편 1-3절에서 다윗은 목자되신 주님의 인도로 부족함이 없었으며, 4절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안전하게 인도받았음을 고백합니다. 그 인도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주님의 계명입니다. 다윗은 골리앗을 죽인 영웅이요, 왕 사울의 사위와 군대장관이었지만, 사울의 질투를 받아 광야로 도주하여 숨어지냈습니다. 그 와중에 사울이 군대와 함께 다윗을 잡으러 엔게디로 왔다가 용변을 보러 들어간 동굴에 다윗이 숨어 있었습니다. 이미 원수를 넘겨준다는 주님의 신탁과 부하들의 압력에도 다윗은 몰래 옷자락만 자르고 살려보냈습니다. 또 다윗을 쫓던 사울의 전 군대가 하길라 산에서 진을 치고 모두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때, 함께 내려 간 아비새의 요청을 거절하고 오직 사울의 창과 물병만 가지고 돌아갔습니다. 왕이 되려는 야망, 부하들과 가족이 받는 고생, 주님의 신탁 등 이 모든 것은 주님이 세우신 왕을 치면 안된다는 계명에 비하면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10년 간의 광야와 망명을 통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수도 없이 지났지만, 하나님의 계명은 그의 인도자였습니다. 그분의 계명을 따라 살아가십시요! 삶이 어두울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기도로 상황을 변화시키려고 몸부림치지 마십시요. 조용히 주님 손에 맡기고 삶을 계획하십시요(딤후2:7). 어려움에 닥치면 기도하십시오! 주님 피할 길을 만들어내시고(고전10:13) 반드시 지혜를 주십니다(약1:5). 고생은 되지만 후에 되돌이켜 보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편119: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