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4/1/15-19)


시편105:18,19- 요셉과 하나님의 섭리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의 무고로 감옥에 갇혔으나, 계속 신실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바로 이 신실함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19절이 답을 줍니다. 요셉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나타나사 ‘가나안 땅을 후손에게 유업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유산을 가졌습니다. 특히, 요셉은 하나님께서 증조부 아브라함에게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400년 동안 그들을 섬길 것이나….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창15:13)는 말씀을 간직하였기 때문입니다. 신앙유산과 하나님의 말씀을 간직하는 것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이 믿음과 소망을 갖고 요셉은 늘 신실하게 하나님 앞에서 살아갔습니다. 섭리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가 지녀야 할 믿음의 태도는 이것입니다. 재미 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대학에 입학한 어떤 여대생이 어머니와 함께 용하다는 점쟁이로부터 영부인이 될 관상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후로 그 여대생은 미팅조차 삼갈 정도로 삶의 자세가 달라졌다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붙잡고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믿음의 시련은 인내를 만들어내며, 그렇게 인내하는 동안 성품은 온전하게 되고, 겸손이 몸에 밸 것입니다. 또한 필요한 은사를 주시므로, 내게 도착된 것들이 무엇인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요셉은 죄수생활 동안 ‘꿈 해몽능력’을 받아 죄수에서 총리로 수직상승할 수 있었으나, 파라오 앞에서 겸손히 하나님께 영광 돌린 모습은 좋은 예입니다.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눅8:15).

잠언28:9절
“사람이 귀를 돌려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

‘율법’의 중요성이 다시 강조됩니다. ‘율법’의 원어는 ‘토라’이며, 모세율법이나 이를 토대로 한 현자와 부모의 가르침이 포함되며, 잠언의 교훈 역시 들어 있습니다(28:4, 7). ‘율법을 듣지 않는다’는 말은 불순종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에게 불순종하는 자를 미워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귀를 돌려 율법을 듣지 않는 자’가 고난을 당해 부르짖는 기도를 듣지 않으십니다. 본절에서 두 가지 교훈을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자는 그의 종교적 선행(기도, 금식, 헌금 등)조차 하나님께 역겹다는 점과, 둘째, 하나님의 말씀에 토대를 두지 않은 기도는 정욕을 위해 잘못 구하는 것이므로 응답될 수 없다는 점입니다(약4:3). 그러나, 불순종하던 자라도 회개하고 그분의 율법에 귀를 돌려 순종한다면, 그의 기도는 들으실 것입니다. 따라서, 성서는 회개를 강조하는데, 돌아온 탕자의 비유는 그 백미입니다(눅15장). 탕자는 아버지 재물을 분배 받아 먼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하여 거지가 되자, 아버지께로 돌아가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아버지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품꾼의 하나로 받아달라고 요청하나, 아버지는 오히려 그를 다시 아들로 받아들이고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돌아온 탕자는 가인과 틀립니다. 가인은 아벨을 죽였으나 결코 뉘우치지 않았고 다만 처벌만을 두려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벌을 면하자 가인은 주님 앞을 떠나 놋 땅으로 갔습니다, 가인에게는 하나님과의 사귐이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그래서 가인은 율법에서 귀를 돌렸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참으로 주님은 역겨운 일을 하는 사람은 미워하시고, 바른길을 걷는 사람과는 늘 사귐을 가지신다.”(잠3:32,새번역)

잠언28:10절
“정직한 사람을 나쁜 길로 유인하는 사람은 자기가 판 함정에 빠지지만, 흠 없이 사는 사람은 복을 받는다.”(새번역)

악한 자가 된다는 것은 아주 나쁜 일이지만, 정직한 자를 유혹하여 타락시키는 것은 배나 더 나쁩니다(마23:15). 악인에게는 심판이 예정되어 있지만(마23:33),  ‘흠 없이 사는 사람’ 즉, 온전하고 슬기롭게 행동하는 자들은 오히려 악인이 원하는 좋은 것들(=복), 예를 들면 재물, 명예, 건강, 화목한 가정, 영생, 하나님과 바른 관계 등을 유산으로 받습니다. 그러면, 악인과 선인의 구별기준은 무엇이겠습까? 하나님의 말씀(계명)입니다. 선악은 하나님의 계명을 떠나서 논할 수 없으며, 가장 중요한 두 계명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고, 여기에 온 율법과 선지자가 매달려 있습니다(마22:40). 한편, 정직한 자도 유혹 받지만, 만약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간직하면 이길 수 있습니다(시119:11). 마귀의 시험을 받자 주님은 간직하였던 하나님의 말씀을 터잡아 이기신 것은 그 본보기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말씀(계명)은 신자의 가장 큰 재산이며, 그 재산을 우리 소유로 만들려면 밤이 필요하고, 그 밤에 주님을 생각하여 그분의 법도를 지키면 우리는 큰 영적 재산을 얻게 됩니다(시편119:55-57) 또, 주님은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눅17:1)하시면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명령하신 것은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얼마나 위험하고 선악분별이 힘든지 알려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시험을 이기는 또 하나의 길은 아예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의 계명들이 항상 나와 함께 하므로 그것들이 나를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시편119:98)

잠언28:11절
“부자는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나 가난해도 명철한 자는 자기를 살펴 아느니라”

본절은 “‘부’의 지배와 획득 시 ‘율법(=토라)’과의 관계”를 가르치는 단락(28:1-11)의 결론입니다. 잠언은 부를 긍정하며 가난보다 좋은 것라고 가르칩니다. 문제는, 부자가 자신의 재물을 어느 누구도 넘을 수 없는 견고한 성이라고 생각하는 순간(18:11) 일어나는 자신에 대한 과대평가입니다. 잠언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는 어리석은 자보다 더 소망 없는 자로 정의합니다(26:12). 따라서, 그 부자는 지혜(가르침)를 통해 고침받을 가능성이 훨씬 더 적습니다. 재물이 자부심과 결합될 때 재물의 긍정적인 가치가 사라지는 이상한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 반면, 세상의 재물은 부족하여도 하늘의 지혜에 부유한 사람이 있습니다. 본절은 그를 ‘가난해도 명철한 자’로 정의합니다. 그의 목적은 어지러운 세상에서,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맺는 삶’(약3:18)이며, 그의 방법은 하나님의 진리와 계명을 마음에 간직하고 그 교훈대로 행하는 것입니다(요8:31-32). ‘가난해도 명철한 자’는 교만한 부자를 만나면, 하나님의 계시에 토대를 둔 도덕적 분별력으로 그를 살핍니다. 그때 그 부자의 이기적 동기와 이중 인격의 냄새가 나면, 악의 유혹에 빠지지 않게 스스로를 지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 ‘주님의 말씀은 즐거움이요, 천천금은보다 더 낫기’ 때문입니다(119:72,111).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여 신실하게 살아가는 자와 교제를 나누어 지혜, 지식, 희락을 주시며, 부자가 모아 쌓은 재물을 넘겨주사 관리하게 하시고(전2:26), 영생을 그의 보상으로 주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눅11:28).

(믿음과 섭리)
하만에 의한 유대인 학살 음모가 시작되자 모르드개는 황후 에스더에게 이 사실을 알리면서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고 행동을 촉구하였습니다. 에스더는 결단을 내려 금식 기도한 후, 죽음을 각오하고 민족 구원을 위해 나섰으며 주님은 에스더를 통해 유대인을 구원하였습니다. 이 역사적 구원의 경험이 부림절의 기원입니다. 요셉은 옥에서 나와 7년 풍년과 7년 흉년을 대비하도록 애굽의 총리로 임명 되자, 비로서 만백성의 생명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습니다. 그리고 300킬로 밖 헤브론에 살고 있는 아버지 야곱을 찾지 않고 오직 총리 직에 몰두합니다. 8년 후, 흉년을 당한 형제들이 곡식을 사러 애굽으로 내려와 자신 앞에 절할 때 20년 전 꾼 꿈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섭리의 종착점을 깨닫습니다(창42:6-9). 이는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의 성취의 시작이었습니다(창15:13-16). 우리도 우리 자신의 삶에 관한 섭리, 즉 ‘자신, 가족, 그리고 이웃의 구원’을 이루시려는 주님의 뜻을 깨닫기까지 인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캘빈의 말입니다: “철학자들도 바울의 말(행17:28)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힘입어 기동하며 살아간다는 것에는 동의하나, 바울이 찬송하는 그분의 은혜에 대한 진지한 감정과는 거리가 멀다. 이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돌보심을 맛보아야만 그분의 아버지다운 사랑을 깨닫는데, 그 돌보심을 전혀 맛보지 못하기 때문이다”(기독교강요 상권 239-40). 운명이나 우연은 없습니다. 주님께서 선을 행하시기에 충분한 능력이 있다는 확신을 갖고 안식을 누리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