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8: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종교 개혁자 요한 칼빈(1509-1564)의 신학은 사도 바울의 “섭리와 은총”에 기반합니다. 칼빈은 어머니를 일찍 여의었고, 오로지 부친의 뜻을 따라 신학과 법학을 공부하였지만, 그가 배운 신학과 법학은 언어와 변론 능력을 향상시켰고, 법철학은 판단력과 인간 본성에 대한 통찰력을 주었습니다. 부친이 죽자(1531) 헬라어와 히브리어의 습득 및 많은 고전을 섭렵하면서 고전학을 전공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섭리적 준비를 거친 칼빈은 탁월한 라틴어 문장가요, 엄격한 성서주의자인 동시에 뛰어난 인문학자로 탄생하였습니다. 그는 30년 뒤 『시편 주석』의 서문에서, 자신의 일생이 부친이나 자신의 뜻대로 살아간 것처럼 보이나, 오직 하나님의 섭리의 결과임을 강조하였습니다. 또한, 칼빈은 자신이 종교개혁에 뛰어든 것 역시 하나님의 섭리임을 고백합니다. 칼빈은 성격이 수줍고 소심하였기에, 은거하여 늘 혼자 연구하려고 하였으나, 격동하는 16세기 종교개혁의 상황 속에서 파렐이나 마르틴 부처와 같은 하나님의 종들은 그의 은사– 『기독교 강요』, 교부들에 대한 탁월한 학문적 능력 등- 를 보고 대중 앞으로 불러내었고, 그에게 성서를 가르치고 제네바에서 개혁교회를 세우게 하였습니다. 많은 고난이 예상되었음에도, 칼빈은 그런 부르심을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들여 개혁신학과 교회를 세워나갔습니다. 칼빈의 삶이 말하듯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인격적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으로 이끄신다’는 섭리 신앙은 그리스도인들만이 가질 수 있는 위대한 영적 지혜입니다.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막4:27)
잠언28:4절
“율법을 버린 자는 악인을 칭찬하나 율법을 지키는 자는 악인을 대적하느니라”
본 잠언은 율법을 기준으로 사람을 두 영적 범주로 분류합니다: ‘율법을 버린 자’와 ‘율법을 지키는 자.’ 그들의 각각의 특징은 악인을 ‘칭찬는 자’와 ‘대적하는 자’입니다. 이처럼 인간을 구분짓는 선(線)은 인종, 정치적 성향, 종교적 믿음도 아니고 오직 영적 특성이며, 그 중심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 성품으로부터 악인들 대적하고, 다른 사람은 하나님을 대적하기에 악인을 칭찬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율법’은 ‘토라’의 번역으로 모세율법을 지칭하나, 통상 확대되어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말씀, 교훈 등을 일컫습니다. 따라서, 모세율법의 정신에 충실한 부모나 현자의 교훈은 모두 본절의 ‘율법’에 포함됩니다. ‘악인을 칭찬하다’는 말은, 국가와 공동체에 해를 끼치는 악인을 분별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혹은 그들의 행동에 동참함을, 혹은 악을 사랑하는 태도를 의미하며,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영적 질병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후단의 ‘악인을 대적한다’는 표현은 악인의 악을 분별하여 미워할 뿐 아니라, 그 악을 제거하여 주님의 공의를 세우려는 한다는 의미입니다. 로마서 8장은 사람을 ‘육신을 따르는 자’와 ‘영을 따르는 자’로 구분하여, 전자는 오로지 육신에 속한 것(육신=자기 중심의 사람을 의미)에 초점을 두고 살아가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뜻인 계명(=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굴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롬8:5-8). 그들은 영원한 생명이 없습니다. 영생을 가진 자는 누구나 주님의 계명에 삶의 주소를 두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8:13).
잠언28:5절
“악인은 정의를 깨닫지 못하나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것을 깨닫느니라”
‘여호와’란 이름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맺은 창조주 하나님의 호칭입니다. 대한민국에서 주권자인 국민을 떠나서는 정치를 논하지 못하는 것처럼, 만유의 통치자인 주님을 고려에 넣지 않는다면 심히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더구나, 주님께 반역하는 악인의 경우 무엇이 정의(미스파트)인지조차 이해하지 못합니다. ‘정의’는 ‘미스파트’의 번역입니다. 히브리어 ‘미스파트’는 ‘정의’ ‘판결’ 혹은 ‘소중한 것’을 의미하고, 삶의 옳고 그름과 가치관의 선악을 판단할 기준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만약 주님이 배제된다면 정의나 가치관을 판단할 객관적인 기준을 세울 수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잠언은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시작)” 임을 가르치며, 이 가르침을 따라 주님을 경외하여 그분의 뜻을 찾는다면 선악의 문제를 분명히 깨닫고 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 후단의 ‘모든 것’에는, 가난하고 힘 없는 자를 구제해주고, 압제자를 벌주는 등 공동체를 회복시킬 적절한 시기와 방법이 포함됩니다. ‘여호와(주님)를 찾는 자’는 그것을 깨달아 하나님의 정의를 세우며, 주님께 보상을 받습니다. 느헤미야가 바로 그렇습니다. 그는 1600km 떨어진 수산성에서 예루살렘 성은 훼파되고 백성들은 고난 받는다는 소식을 듣자, 하나님께 자신을 총독으로 보내달라고 간곡히 기도드렸고, 그 응답으로 적법절차를 밟아 유대총독으로 부임하여 즉시 성을 중건하고, 모세율법에 따른 바른 예배를 확립하였습니다. 12년 이상 총독의 녹도 받지 않은 느헤미야에게 주님은 마지막날 생명의 부활로 보상하실 것입니다.“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9)
섭리, 성경, 그리고 믿음
“아프리카 초원의 버섯흰개미들은 4미터 이상의 높이에 복잡한 내부 구조를 가진 탑 모양 둥지를 만들어 거기서 수백만 마리가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 안에는 습도를 조절하는 환기시설이 구비되어 있고 새끼들을 기르는 육아실과 소화를 돕는 균류(흰개미버섯)를 재배하는 넓은 방들도 따로 있습니다. 생물학자들은 이 개미들이 아무런 계획도 없이 단지 페로몬이라는 화학물질에 기초한 10개 내외의 빈약한 소통 수단만으로 이토록 놀라운 일들을 해낸다는 것을 알아내었습니다. 즉 흰개미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4미터 넘는 거대한 탑 모양의 둥지를 건설할 목적의 노동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다만, 본능적 욕망이 만든 몇 가지 단순한 규칙을 따라 맹목적으로 움직여서 이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흰개미의 산출물인 4미터의 탑은 우연이나, 지성의 측면에서 보면 필연입니다”(김용규, 신, 482). 한 쪽은 우연, 다른 쪽은 필연이란 말은 관점의 차이에서 나오며, 하나님의 섭리도 같습니다. 섭리신앙이란 우리와 전혀 다른 차원에서 일하시는 하나님께 삶의 결과를 맡기고 신실하게 살아가는 믿음입니다. 우리의 현실은 여러 고난이 존재하고, 이러저러한 두려움과 미래의 불안은 사람으로 고뇌하며 살게 만듭니다. 그래서, 성경과 믿음이 필요합니다. 성경은 역사의 주님으로 숨어서 일하시는 하나님과 그분의 지혜, 섭리, 선하신 목적 등을 증언하는데, 그 어떤 책에도 없는 내용입니다. 성경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은 두려워 하나, 그리스도인들은 부활하신 주님의 통치를 믿음으로 담대히 살아갈 수 있습니다. 3,000년 전 다윗 시의 일부입니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시편37: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