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3/12/18-22)


잠언27:25절
“풀을 벤 후에는 새로 움이 돋나니 산에서 꼴을 거둘 것이니라”

23-27절은 자신의 산업을 부지런히 돌보라는 교훈입니다. 우리가 날씨 변화를 예측하지 못하듯이, 경제상황은 위기와 기회를 산출하며 역동적으로 변화합니다. 만약 위기 시 우리가 잠깐 방심하면 재물과 면류관은 날개를 달아 날아가 버릴 것입니다. 따라서, 추수시기에 보아스는 자신의 밭에 와서 일꾼들을 감독하였고, 그러는 중 믿음과 효성의 여인 룻을 만나 가정도 세울 수 있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중요 산업인 양떼를 먹이는 ‘풀’은 어느 때 그리고 어디에 있었겠습니까? 이스라엘에서 들풀은 늦가을의 비가 내린 후에 산에서 자라나며, 베고 나도 우기에는 계속 새롭게 싹이 돋아 나옵니다. 한편, 팔레스틴에서는 10월 중순 경 이른 비가 내려야 곡식을 파종하고 풀도 자라는데, 매 년 이런 일이 발생한다고 누가 약속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다만, 이를 통해 인간은 자연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성경적 진리를 깨우치며 그분을 경외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후단은, 새로 난 들풀이 팔레스틴의 고원지대(산)를 덮은 모습을 전제하는데, 이는 번영과 풍부의 상징입니다. 이른 비가 내리면 지혜로운 농부는 산이나 광야로 가축떼를 데리고 떠납니다. 여인들은 집에서 보리 농사를 짓고 풀을 거두어 말려 여름철 가축의 먹이를 준비합니다. 본 잠언은 주님이 창조한 질서와 그것을 적절하게 이용하여 살아가는 인간 지혜 사이의 아름다운 조화를 밝힙니다. 우리는 기도에도 열심을 내야 하지만, 이런 농부의 지혜를 배워야 하는 것은 짐승의 먹이인 꼴은 산에 있기 때문입니다. “너는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놓지 말라 이것이 잘 될는지, 저것이 잘 될는지, 혹 둘이 다 잘 될는지 알지 못함이니라”(전11:6)

잠언27:26,27절
“어린 양의 털은 네 옷이 되며 염소는 밭을 사는 값이 되며 염소의 젖은 넉넉하여 너와 네 집의 음식이 되며 네 여종의 먹을 것이 되느니라

26, 27절에서, ‘양의 털’은 옷감 재료이며, 양가죽은 물주머니, 천막, 그리고 종이의 역할을 하였고, ‘염소의 젖’도 유용한데, 모두 다 농부의 일상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열심히 일만 하면 생활하는데는 충분하지만, 남을 도울 수 있을 정도의 부는 갖기 어렵습니다.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의 책에서 저자는 부자 아빠인 친구 아버지가 건물과 건물을 맞바꾸면서 부를 축적하는 기술을 터득하였음을 밝히고 있는데, 후단에서 ‘염소’를 팔아 밭을 사라는 솔로몬의 권면과 일맥상통합니다. 염소들을 주고 밭을 사면 귀중한 작물을 재배하여 부의 원천을 만들고, 위험을 분산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필수품을 얻으려고(노력하면 누구나 충분함), 혹은 재물과 명예를 가지려고(세상 것들임) 성전에 와서 기도하지 말고, 가축과 같은 평범한 네 산업을 근면성실히 돌보데서 시작하라는 의미도 내포합니다. 그러면, 의식주를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은 물론, 다른 재산(밭 등)을 소유하여 부요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권고입니다. 훌륭한 인생전략임에 틀림없습니다. 만약 근면성실하게 일하는 과정에서 정직한 보상으로 갚아주시는 분이 주님이심을 배운다면, 더할 나위 없는 영적 지혜입니다. 그러나, 신명기에서는 재물을 얻게 되었을 때 내 능력이라고 교만하지 말고, 오직 주님께서 재물얻을 능력을 주셨음을 인정하라고 명령합니다 (신8:16,17). 주님을 경외하는 잠언의 제자들은 양 구절을 조화시키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습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6:7). 

누가복음2:7절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2000년 전 성탄절, 주님은 이사야의 예언을 따라 아기로 세상에 들어 오셨습니다(사9:6). 이 당시 베들레헴의 집들은 석굴 위에 두 개의 방을 가졌습니다. 큰 방은 부엌과 침실을 위해, 작은 방은(헬라어로 ‘카탈루마’) 창고와 손님방을 겸하였고 가축들은 집 밑 석굴에 가두어 길렀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로마황제의 명을 따라 호적하러 베들레헴으로 갔으나 해산 할 곳을 찾지 못하는데, 그 당시 많은 사람들도 호적하러 왔서 방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관’ 이란 번역은 문제가 있습니다. 여행객들을 위한 여관은 ‘판도케이온’(눅10:34)을, 손님방을 위해서는 ‘카달루마’란 용어를 사용하였으며(눅2:7), 베들레헴은 유대 산지 마을로서 여관이 없습니다. 따라서, 상기 구절은 그들이 베들레헴에 도착했을 때 친척이나 촌장의 집에 갔지만 손님방을 구할 수 없었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레위기에 따르면, 산모는 의식(儀式)적으로 부정하고 (레12장), 산모가 만지는 것마다 부정하기에 집 전체가 부정하게 될 우려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손님방도 없고, 부정이 온 집에 전가되지도 않도록, 그들은 가축이 있는 석굴로 내려가서 그리스도를 해산하였다고 생각됩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주님이 아기로 탄생하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 하신 약속들을 이루려 하심입니다. 그 약속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뒤 이은 부활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의 일환이었고, 마침내 주님은 마리아의 몸을 빌려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2:11)

누가복음2:7절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께서 인간으로 태어나신 장면을 포착하여 전하고 있습니다. 이 장면은 BC 700년 당시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예언하신,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는 말씀의 성취를 보여줍니다. ‘임마누엘’이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으로, 처녀 마리아는 요셉과 정혼하였으나 아직 동침하기 전에 성령님의 능력에 의해 잉태하여 출산하였습니다. 그 결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자 인간이란 유일무이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시자 천사들도 이 감격을 인간들에게 전하려고, 한 밤에 베들레헴의 들에서 양 치는 목자들에게 나타났습니다. 즉, 베들레헴에서 남쪽으로 2-3km 떨어진 곳에, “목자들의 들”로 불리우는 장소가 있습니다. 여기는 성전 제사를 위한 양을 기르는 들로서, 이 양들은 세상 죄를 지고 가실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잘 예표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천사들은 특히 이곳을 택하여 나타난 것입니다. 천사는 그들에게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자, 홀연히 수 많은 천군이 나타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고 찬송하였습니다. 이같이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세상에 들어오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큰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마태복음1:21절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만물을 창조하시자 하나님은 “심히 좋으셨습니다”(창1:31). 그러나 아담의 반역과 그 죄의 심판으로 사망이 온 피조세계를 지배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도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사탄에게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3:15)고 선언하시어 여인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야에 관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메시야의 일은 죄, 사망 그리고 마귀의 일을 멸하시고 아담의 불순종으로 좌절된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목이 중요하고, 또한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자발적 순종을 확보하셔야 합니다. ‘화목’은 당신의 몸을 속건제로 하나님 앞에 드리심으로 율법의 의로운 요구를 충족시키셨고, ‘인간의 순종’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시고, 섬김이란 이웃 사랑의 모범을 보여주신 후 따르도록 하셨습니다. 당연히 원수 마귀는 전력을 다해 자신의 포로들을 빼앗기지 않게 동분서주하고 있습니다. 양자의 가치관은 확연히 틀려, 우리 마음에 전쟁이 일어납니다. 누구의 가치관을 따를 것인가? 그리스도인가 아니면 세상인가! 우리는 그리스도께 순종합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증거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천사는 요셉에게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로 표현합니다. 죄로부터의 구원은 용서와 이를 뒤따른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제 곧 성탄절입니다. 우리 모두 아기의 모습으로 주님을 보내신 하나님께 감사드립시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롬1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