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3/12/4-8)

(부케팔로스 사건과 성경의 필요성)
기원전 344년 어느 날 마케도냐의 왕 필립2세에게 한 상인이 끌고 온 명마(부케팔로스)를 아무도 길들이지 못하였으나, 어린 알렉산더(12살)가 나서서 쉽게 제어하였습니다. 그는 말이 자신의 그림자에 놀라서 사납게 뛴다는 사실을 깨닫고, 말을 태양 쪽으로 돌려세운 뒤 올라타서 성공적으로 제어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나운 명마 보다 훨씬 위험한 세상을 살아갑니다. 도대체 우리 인생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도 없고, 엄청나게 크고 무거운 지구가 끈도 엔진도 없이 허공에서 정해진 궤도를 계속 도는 등 수 많은 신비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성경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창세기는 세상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고 기록하나, 요한복음은 더 자세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만유를 지으셨음을 선포합니다(요1:1-4). 이를 믿는 순간 보이지 않는 세상에 대한 눈이 열리게 됩니다. 그리고 인간은 보이지 않는 영적 존재가 올라타서 길을 제시하는 순간 그의 말이 되어 달리는 존재임을 깨닫습니다. 만약 마귀가 공산주의 이념을 갖고 올라타면 공산주의자가 되어 자본가와 지주를 죽이는 것을 선행이라고 치하하고, 마귀가 탐욕을 갖고 올라타면, 마귀가 원하는 돈의 노예로 전락하고, 만약 성령께서 올라타시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분의 뜻을 행하게 됩니다. 당연히 인간은 마귀의 지배를 거부하고 성령께 순종해야만 하나 중생하지 않으면 그분의 말씀(=성경)을 간직하여 의의 열매를 맺을 능력이 없습니다. 마르틴 루터의 책 “노예 의지”는 이 문제를 잘 논하고 있습니다. 실로 그리스도인들은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 ‘십자가의 말씀’을 갖고 자신의 삶을 통제하며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8:14)

(행복과 계명)
인간들은 어떻게 해야 행복해 질 수 있을까요? 동물은 음식과 안전만 제공받는다면 행복한 것 같습니다만, 인간은 다릅니다. 관계, 존경, 자아 실현 등까지 충족되어야만 행복을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욕구에도 단계가 있다는 심리학자 매슬로의 ‘욕구 5단계설’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욕구충족 행동은 여러 한계가 있으며, 하나님의 계명은 가장 중요합니다. 인간이 넘을 수 없는 계명의 존재가 인간의 피조성과 유한성을 웅변는 이유는, 이 세상에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원리가 빌트인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절도죄나 강도죄를 저지를 수는 없습니다. 안전에 대한 욕구 좋습니다만, 다른 사람을 방패로 내세우면 안 됩니다. 관계의 욕구 좋습니다만, 가정을 둔 남자가 다른 여자와 사귀면 안 됩니다. 존경의 욕구 좋습니다만, 표절하여 논문을 작성하면 안 됩니다.  자아실현욕구 좋습니다만 시인이 가정을 돌보지 않고 시의 세계에 몰두해서는 안 됩니다. 이 같이 계명은 인간이 가야만 하는 길이요, 행복의 첩경입니다. 청록파 시인이자 기독교인 박목월(1916-1978)은 제자인 여대생과 사랑에 빠져 가정과 교수직을 버리고 제주도에서 동거하기 시작하였습니다(1954). 그러나 4개월 후 부인 유익순 집사님이 찾아와 추운 겨울 잘 보내라며 두 사람의 겨울옷과 돈봉투를 건네주고 서울로 돌아가자, 둘은 감격하여 관계를 끝냈습니다. 박목월은 “기러기 울어 예는 하늘 구만리….”라는 이별의 시를 보내 그 아픔을 표현하였습니다. 그는 ‘아내를 사랑하라’ (엡5:33)는 말씀을 넘어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주의 의로운 규례들을 지키기로 맹세하고 굳게 정하였나이다”(시편119:105,106).

잠언27:19절
“물에 비치면 얼굴이 서로 같은 것 같이 사람의 마음도 서로 비치느니라”

히브리어 원문은 “캄마임 합파님 랍파님 켄 레브 하아담 라아담”으로 읽혀지며, 히브리시의 대표적 운율인 3+3을 유지하려고 압축된 문장이어서 작은 소리로 읍조리는 묵상에 적합합니다. 직역하면, “그 물에서 그 얼굴이 그 얼굴인 것처럼, 그 사람의 마음 도 그 사람에게 그러하다”입니다. 두 가지 해석이 나옵니다. 하나는, 자기 자신의 마음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알 수 있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새번역이 취합니다 : “사람의 얼굴이 물에 비치듯이, 사람의 마음도 사람을 드러내 보인다.” 또 하나는, 수면 위에 내 모습이 투영되듯이 다른 사람에게 내 마음이 투영된다는 의미입니다. 공동번역이 취합니다: “내 얼굴은 남의 얼굴에 물에 비치듯 비치고, 내 마음도 남의 마음에 물에 비치듯 비친다.” 본절이 인간 사이의 영향력을 다루는 17-19절 단락의 일부라는 점에서 후자가 좀 더 적합합니다(개정개역). 그렇다면, 본절은 자신을 더욱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투영해 줄 수 있는 타인이 필요하며, 또 사람은 누구나 타인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을 교훈한다 하겠습니다. 황금률과 은률이 모두 여기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인간이라면 근본적으로 동일한 본성과 심성, 나아가 약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수천 년 전 성경의 사건들을 통해서 오늘을 사는 교훈을 받는 것이며(고전10:1-11), 잠언의 필요성 또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마음을 헤아림으로써 개인적으로 풍성한 영적 열매를 맺고 교회적으로도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어야 하겠습니다.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고전10:11).

잠언27: 20절
“스올과 아바돈은 만족함이 없고 사람의 눈도 만족함이 없느니라”

본잠언은 문맥상 ‘사람(=아담)’이란 주제어로 19절과 연결되어 있고, 내용은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음을 가르칩니다. ‘스올과 아바돈’은 동의어이며, 죽은 자들이 가는 세계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무덤’과 ‘죽음’이 원래 목적한 의미입니다. 우가릭 문헌은 ‘못’(죽음)이란 탐욕의 괴물은 크게 벌린 목구멍으로 끊임없이 희생자(죽은 자)를 집어삼킨다’고 합니다. 전단은 모두 잘 아는 ‘죽음’이라는 사건을 제시하고, 후단은 이를 비유로 하여 ‘사람의 눈’이란 어구를 동원 탐욕이란 인간 본능을 밝힙니다. 인간이 탐욕을 쫓는한 결코 참된 행복은 없고, 오직 허망과 파멸만이 남게 됩니다. 영국의 부유한 귀족의 집에 한 하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이 하녀는 일을 하다가 한숨을 쉬며, “5파운드만 있었으면 소원이 없을텐데”라고 중얼거리자, 마침 그 곁을 지나던 귀족이 그 말을 듣고 5파운드를 주면서 힘 내라고 격려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하녀는 “이럴 줄 알았더면 10파운드라고 할 것을…”이라며 한탄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많은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자신의 탐욕을 쫓아 기도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려움과 궁핍에 처할 때는, 긍훌이 풍성하신 주님께서 기복적 기도에 자주 응답을 주시곤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맛들인 신자들은 이제 좀 살 만 하다 싶어도 기복신앙의 습관이 여전히 남아 있어 응답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망각합니다. 그 결과 하나님 나라와 의가 아니라 더 많은 물질, 성공, 영광을 추구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자족’이란 덕목은 성숙한 신앙의 중심으로 기복신앙의 해독제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딤전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