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과 은총의 삶)
잠언22:1절, “많은 재산보다는 명예를 택하는 것이 낫고, 은이나 금보다는 은총을 택하는 것이 낫다.”(새번역)고 가르칩니다. 그리스도인은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하신 만유의 주님을 알고 있지만, 세상 사람들은 이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주님의 영광이 아니라, 자신이나 기업, 민족, 국가 등의 영광 또는 자아실현을 위해 살아갈 뿐입니다. 자신의 수고에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을 나무랄 수는 없지만,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은총의 삶을 모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목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성취함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또, 삶의 방법은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러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눅:12:31)는 약속을 간직한 믿음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마음은 늘 든든합니다. 왜냐하면 온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그 아들을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분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사랑하기에, 그분의 뜻(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행하는 것이 우리의 자랑입니다. 우리는 게으르게 얻은 양식을 먹지도 않고, 악인의 재물로 치부할 생각도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분수를 알고 있으며, 또 노력한 만큼 살아가지 그 이상을 탐내지도 않습니다. 세상은 지나가는 곳이지 우리의 영원한 삶의 고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 안에는 불멸의 삶, 즉 영생에 대한 믿음과 소망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장래는 알지 못하나 염려나 걱정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돌보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은총의 삶으로 내 이익과 주님의 이익은 일치를 이루고 있습니다. “네 갈 길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만 의지하여라. 주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시편37:5,새번역).
(세상 – 주님과 교제의 장)
하나님의 뜻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갈5:14)는 말씀에 담겨 있고, 이를 고린도교회의 사정에 맞게 해석한 것이 고린도전서 13장(사랑장)입니다. 또한, 이웃 사랑의 실천적 지침은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마7:12)는 황금률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만만하지 않습니다. 선행이 물질의 축복, 명예의 축복 건강의 축복… 각종 축복을 보장하냐 하면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생각은 오히려 빛 바랜 양복 같아, 사탄이 참소할 틈을 갖게 만듭니다. 여기에 욥의 시험의 단초가 있었지만, 욥은 그 시험을 훌륭히 통과하여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 비결은 무엇이겠습니까? 욥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 사랑 때문입니다. 불행히도 아담은 이 사랑이 없어 실패하였습니다. 세상이란 시험하는 장소로서, 사랑의 방향을 분명히 드러냅니다: “세상이냐 하나님이냐?”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의 중요성이 여기에 있습니다. 양자 사이에서 방황하던 사람들이 만유의 상속자와 심판자가 누구인지를 밝히 보게 하고(마28:18), 참된 신자가 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믿음의 삶의 핵심은 주님의 섭리와 도우심을 기대하는 삶입니다 – 승진, 결혼, 사업, 공부, 교우관계도 말입니다. 최근 아는 지인은 증권거래소를 은퇴하였으나 오히려 코스닥상장을 위한 회사들의 고문은 물론 부사장으로까지 영입되었습니다. 그분의 삶에 아픈 가시들이 있지만, 오히려 이런 사건에 감사드리며 주님께 보답하고자 하였습니다. 신자들은 오직 성공과 행복을 위해서 노력하는 불신자와 다르게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사귐은 영생의 본질입니다. “그 행실이 온전하고 주님의 법대로 사는 사람은, 복이 있다.”(시편119:1,새번역)
잠언27:14절
“이른 아침에 큰 소리로 자기 이웃을 축복하면 도리어 저주 같이 여기게 되리라”
잠언의 제자들은 이웃에게 마땅히 예의를 갖추어야 하는데, 본절은 이를 위하여 ‘이른 아침’과 ‘큰 소리’와 같은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교훈합니다. 상황은 ‘이른 아침’이어서, 그의 이웃은 잠자리에서 막 일어났거나,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였다고 생각됩니다. 그때 크고 명랑한 목소리로 인사나 축복을 하면 당황스럽기도 하며, 진의를 몰라 의아해 할 것입니다. 따라서 축복이 오히려 저주 같이 여겨질 수 있습니다. 이웃과의 참된 우정은 행함과 진실 그리고 공통분모인 상식 가운데서 표현되어야 합니다. 이른 아침과 같은 상례를 넘어선 경우에는 축복의 인사를 포함한 경건한 말조차 예의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상식을 잘 아는 본절의 행위자가 왜 이렇게 행동 하겠습니까? ‘진정성이 결여된 아첨의 말’을 하려고 하기 때문이며, 큰 소리로 축복한다는데 그런 해석의 근거가 있습니다. 만약 이른 아침에 특히 전할 축복의 소식이 있다면, 그 이웃에게 가서 조용히 말하면 되지, 모든 이웃이 들으라는 외침에는 다분히 자기 과시의 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본 잠언의 교훈 역시 이웃 사랑의 구체적 표현입니다. 이웃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만약 이웃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내가 축복의 언어나 천사의 아름다운 말을 할지라도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괭과리와 같이 소음에 불과하게 된다” (고전13:1, 의역)는 놀라운 도덕법칙이 작동합니다. 우리 모두는 ‘사랑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으며, 그런 말은 진실할 수밖에 없습니다. 상대방을 배려하면서, 참된 말을 하도록 그리스도 안에서 배워가야만 합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3:18)
잠언27:15,16절
“다투는 여자는 비 오는 날에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이라 그를 제어하기가 바람을 제어하는 것 같고 오른손으로 기름을 움키는 것 같으니라”
본절은 가정에서 아내의 도리와 배우자 선택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다투는 여자”란 매사에 흠을 잡고 잔소리하면서 남편과 기싸움을 하는 아내를 말하며, 본절에서 “비오는 날에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로 비유됩니다. “비오는 날에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이란 내린 비가 지붕에 고여 떨어지는 낙숫물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가옥은 지붕이 평평하므로 비가 내릴 때 물이 샐 가능성이 높습니다. 지붕에서 물이 떨어지면 방안은 엉망이 되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처럼, 다투는 여자를 둔 집안도 그와 같습니다. 16절은 그런 여인을 제어하여 순종하게 하는 노력의 헛됨을 바람과 기름을 동원해 묘사하는 바, 제 주변을 보아도 진실입니다. 가정이 늘 소란하면 그 어떤 일도 잘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란 말이 있는 것이며, ‘다투는 아내’ 역시 이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됩니다만, 도대체 왜 그렇게 되었겠습니까? 성격과 환경을 모두 고려해야 하지만, 대체로 한 고집하고 남편 보다는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자 하는 타락한 인간본성 때문입니다(창3:16). 조선 시대 어느 양반 가문에 결코 지지 않으려는 품성의 딸을, 시댁 어른 앞에서 큰 망신을 당하게 하였습니다. 그 후 그 딸은 정말 겸손하고 예의바르게 남편과 시댁을 섬겨, 정경부인이라는 칭호도 받았으나, 사건의 전말을 알자 다시 옛날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먼저 좋은 믿음의 여인을 아내로 얻고, 아내는 주님의 뜻을 따라 가정을 섬길 줄 알아야 합니다. “집과 재물은 조상에게서 상속하거니와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느니라” (잠언19:14)
잠언27:17절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의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
어린 염소가 어미와 형제들에게 구박받자, 할머니가 키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할머니는 염소는 염소들과 살아야만 한다면서, 다시 염소들 사이로 되돌아 가도록 훈련시키는 장면을 본 적이 있습니다. 우리 인간도 같습니다. 사람 역시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훈련될 때만이 바르게 성장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독처가 선하지 않다 보시고, 하와를 만들어 가정을 형성하게 하셨듯이, 인간은 태초부터 관계적 존재로 지음 받았습니다. 그래서 모펫이라는 성경학자는 “인간은 결코 혼자로는 인간이 되지 못한다. 그의 동료가 와서 언어로나 모범을 통해서 자극을 주고 각성시키면 혼자 살아갈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세련되게 성장한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 경우 ‘경쟁과 협력’ 두 가지가 작용합니다. 어려울 때 도와주는 협력은 우리가 잘 아는 개념이고 또 올바른 행동이지만, 경쟁은 선의의 경쟁을 말합니다. 즉, 선한 목표를 두고 선한 방법으로 서로에게 자극을 주어 효율을 최고로 올리는 경쟁을 지칭합니다. 마라톤 선수 선수들이 여럿이 경쟁하면서 뛸 때 좋은 기록이 달성되는 것은 그 예이며, 심지어 친구의 마음에 열등감의 불을 지펴올려 잠재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함으로 뛰어난 업적을 이루게도 합니다(격장지법). 그러므로, 우리가 만나는 모든 관계 속에서 서로 협력하거나 경쟁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훈련하는 기회로 삼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그 모델의 최상단은 인간이 되시고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부활·승천하신 주님이십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