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큐티(2023/11/20-24)

(에서와 같은 유형의 사람)
에서는 열심히 일하고 살아갔지만, 조상의 믿음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사람들과 관계도 좋은 편으로, 귀향하는 야곱과 싸우려고 400명과 함께 갔다는 것은 그의 위치를 짐작하게 합니다. 그 반면 절룩거리는 야곱을 보고 불쌍히 여겨, 야곱을 죽이려는 마음을 과감하게 떨친 통 큰 남자였습니다. 그러나 에서는 믿음의 눈이 없어 자신의 가문에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의 중요성을 몰랐습니다. 그 결과 (1) 창세기3:15절에 예언된 여인의 씨가 자신의 혈통을 타고 오신다는 약속을 무시하고 팥죽 한 그릇에 자신의 장자권을 팔아넘겼습니다. (2) 또한 부모의 뜻은 고려하지 않고 아무 거리낌 없이 가나안 땅 헷족속의 두 여인과 결혼하였습니다. (3)셋째로, 약속의 땅 가나안 땅이 가지는 영적 의미를 알지 못하여, 그는 소떼, 양떼 등으로 큰 부를 형성하자,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서슴없이 떠나 안전하고 비옥한 세일 산 지역으로 이주 정착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후손은 대대로 세일 부근에 살면서 에돔이라는 나라를 형성하고, 다른 이방 민족과 같이 풍요의 신을 섬겼다고 추정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야곱의 하나님이시지 에서의 하나님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간직하지 않은 에서와 그 후손들에게는 ‘하나님과의 교제’란 없었고, 따라서 그들에게는 영생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교제가 영생의 본질이고, 그분의 뜻을 행하는 것이 영원한 생명의 삶의 중심을 형성하기 때문입니다(엡1:4-5).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만민을 위한 구원의 복음을 성취하시고, 그 복음이 전파될 때까지 이들은 언약 밖의 사람이었습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3:28)

(솔로몬의 지혜와 믿음의 문제)
솔로몬 왕은 하나님께 기도하여 지혜를 구하기 전에도 매우 지혜로운 왕이어서, 형 아도니아 세력을 단 번에 제거하고 나라를 굳건하게 세웠습니다. 문제는 성전이 준공된 이후 솔로몬이 하나님께 기도하였다는 구절이 없습니다. 그의 지혜는 백과사전적이었습니다. 지혜,풍요, 권력을 가진 솔로몬 왕국은 평화로웠고, 문제가 발생하면 자신의 지혜로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에 기도의 필요성은 없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께 간구할 상황이 닥쳐오지 않자 솔로몬은 하나님을 경외할 필요를 망각하게 되었고, 자신의 지혜의 원천이 하나님이란 사실조차 느끼지 못하였습니다. “지혜의 시작은 주님을 두려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는 이를 근거한 지혜와 훈계를 무시한다”(잠1:7,새번역)고 가르친 바로 그 사람이 주님 경외하기를 그치니, 그의 모든 지혜는 방향을 잃고 세상적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마음이 교만하여 하나님을 떠났고, 하나님도 그를 여인의 손에 버려두셨습니다. 자연히 후궁들의 유혹으로 우상숭배의 길로 들어서게 된 비극이 발생하였습니다. 예루살렘 내에 성전을 세우고도, 그 앞 감람산에 모압의 그모스, 암몬의 밀곰, 몰렉, 시돈의 아스다롯의 신전을 또 세워 그것들에게 절하며 함께 분향하였습니다. 여기에 지혜로 살아가는 삶의 한계가 있습니다. 지혜가 그 방향을 잃으면 무서운 해악을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들에 끼치고 맙니다. 지혜는 도구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목적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솔로몬은 자신만이 중요하였고, 하나님은 장식이 되었으며, 백성들의 고통은 뒷전이었습니다. 솔로몬 왕이란 최고의 지혜자가 일반 이스라엘 백성보다 더 우둔하게 되었습니다. “또 사람에게 말씀하셨도다 보라 주를 경외함이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니라”(욥28:28)

잠언27:11절
“내 아들아 지혜를 얻고 내 마음을 기쁘게 하라 그리하면 나를 비방하는 자에게 내가 대답할 수 있으리라”


여기서 ‘지혜’란 단지 높은 지능과 능한 임기응변 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올바르게 행동 하는 능력’을 가리킵니다(1:7). 따라서. 본절은 자녀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말씀 안에서 바른 삶을 영위할 때 부모를 가장 기쁘게 하며, 가문을 비웃는 사람들에게조차 아버지는 당당하게 대할 수 있다고 교훈합니다. 솔로몬 왕국 당시는 농경과 목축이 주업이어서 인구의 수는 곧 국방과 노동력의 척도였고, 가정의 경제와 치안 역시 자체적 해결이 중요하여 많은 자녀는 든든한 울타리와 같았습니다(시편127:4,5). 그러나 자녀가 불량하면 오히려 지탄의 대상되고, 그의 부모에게는 큰 불행이었습니다. 이에, 잠언은 올바른 자녀와 미련한 자녀가 부모에게 어떠한 존재인가를 줄곧 교훈하여 왔습니다 (23:15,24). 한편, 본절이 내포한 영적 의미를 되새겨보면, 아들은 신자들을, 아버지는 하나님으로 읽혀질 수 있습니다. 욥은 경건하여 악에서 떠난 하나님의 자녀로서, 늘 하나님의 자랑거리였습니다(욥1:8). 이때 사단은 욥의 신앙의 약점을 지적하며 하나님 앞에 참소하였습니다. 시험을 당한 욥은 인내하였고 결국 훌륭하게 이김으로 하나님의 인정과 갑절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주님은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분”이심을 잘 드러내는 사건이라 하겠습니다(약5:11). 이런 욥의 삶은 우리 주님의 경건한 삶,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 승천을 상징하며, 세상 가운데 고난 받는 그리스도인들이 늘 염두에 두고 시험을 이겨나갈 해답지로서 역할을 합니다. “솔로몬의 잠언이라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를 기쁘게 하거니와 미련한 아들은 어미의 근심이니라”(잠언10:1)

잠언27:12절
“슬기로운 자는 재앙을 보면 숨어 피하여도 어리석은 자들은 나가다가 해를 받느니라”


본절(22:3절과 동일)에서 ‘슬기로운 자’의 원어는 ‘아룸’으로 지혜와 연관이 있고, ‘어리석은 자’의 원어 ‘페티’는 ‘단순한, 순진한’의 뜻으로 ‘미련함’과 관련되었습니다. 성공적인 인생 항해는 지혜가 필수적인데, ‘슬기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의 차이는 제대로 항해할 지혜의 구비 여부입니다. 본 잠언은 분명히 닥칠 역경을 보고 “슬기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 혹은 미성숙한 사람)의 삶을 관찰 후 결론을 내렸습니다: 전자는 재앙과 그 가능성을 보면 숨거나 피하지만, 후자는 고집부리고 나아가다가 화를 당합니다. 잠언은 이미 7장에서 어리석은 젊은이가 문란한 여자를 만나자 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녀를 따라 가는 모습을 보고, “소가 도수장으로 가는 것 같고 미련한 자가 벌을 받으려고 쇠사슬에 매이러 가는 것과 같다”(7:22)고 탄식하였습니다. 결과는 미련한 자의 범죄에 대한 심판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고, 위험의 종류도 다양해서 일일이 전부 열거하기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슬기로운 사람은 그 위험의 징조가 감지된다면 회피하거나, 미리 대비책을 세웁니다. 한편, 본 잠언이 경고하는 가장 큰 위험은 도덕의 위험이고, 교만한 자에게는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관련한 위험입니다. 다윗 왕은 전쟁에서는 늘 이겼으나, 도덕의 문제에서는 넘어짐으로 큰 재앙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악에서 떠날 줄 아는 것이 참된 지혜입니다.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눅12:5)

잠언27:13절
“타인을 위하여 보증 선 자의 옷을 취하라 외인들을 위하여 보증 선 자는 그의 몸을 볼모 잡을지니라

본절은 20:16절과 동일합니다. 신명기는 가난한 자가 겉옷을 담보로 제공하더라도 해질녘까지는 돌려주라고 규정하였기에(신24:10-13), 이스라엘에서는 겉옷을 담보로 취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기 예외규정이 등장합니다. ‘취하라, 잡을지니라’는 명령형은 본 잠언의 메시지를 잘 살리고 있으며, 메시지의 방향은 채권자에게입니다: “어리석은 자에게 자비를 베풀지 말라. 잠언은 아무관계도 없으며 낯선 타인의 빚 보증을 서지 말라고 누차 경고하나, 이를 무시한다면 어리석은 자입니다. 갚을 것이 없으면 누운 침상조차 빼앗기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도,  잘모르는 낯선 ‘타인’은 물론, 심지어 외국인(‘외인’)의 빚보증을 섰다면 철이 없거나 어리석은 바보입니다 (22:26,27). 잠언은 통상 가난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라고 교훈하며, 그런 행위는 주님께 꾸어드리는 의로운 삶임을 밝힙니다(14:31;19:17). 그러나, 타인 혹은 외인의 빚의 보증물로 제공된 자의 의복이나 몸을 취할 경우는 아닙니다. 잘모르는 남이나 외국인을 위해 보증으로 제공된 의복이나 몸을 취하는 채권자는 하나님의 정의를 대신 수행한다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만약 어리석게 보증을 선 사람은 어떻게 해야하겠습니까? 열렬히 그리고 부지런히 채권자에게 가서 자비를 호소하는 길이외에는 없습니다(잠언6:1-2). 물론,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는 채권자, 채무자, 보증인의 관계를 잘 규율하고 있습니다만, 본 잠언의 메시지를 우리 마음에 새겨야만 지혜롭게 비즈니스를 수행할 수 있습니다. “오만한 사람에게는 심판이 준비되어 있고, 미련한 사람의 등에는 매가 준비되어 있다.”(잠언19:29,새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