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심에는 반드시 증거가 있어야 한다.
성경의 회심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며, 그 결과 모든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섬기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방을 치우는 가장 단순한 일들조차 보이지 않는 주님을 보는 것 같이 하여 섬기려는 자세를 갖게 됩니다. 찰스 스펄전(1834-1892) 목사님의 실화입니다. 런던의 어느 커다란 집에서 하녀로 일하던 십대 소녀가 교인이 되겠다고 신청한 후, 면담을 위해 안내를 받아 자리에 앉자 스펄전 목사님은 질문하였습니다: “당신이 정말로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는 것을 무엇으로 증명하겠소?” 잔뜩 긴장해 있던 소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에는 먼지를 장판 밑으로 슬쩍 쓸어 넣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곧바로 “더 이상의 질문은 없습니다. 우리는 이 소녀를 받아들일 것입니다! 모두들 교제의 악수를 나누십시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방문할 때도 주님께서 거기 사시는 것처럼, 편지를 쓸 때도 주님께서 읽으실 것처럼, 환자를 간호할 때도 주님께서 그 병상에 계신 것처럼, 식사를 준비할 때도 주님께서 음식을 드실 것처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고백과 권고를 천진난만하다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지만, 하나님 앞에 그렇게 서 있지 못하면 그분의 믿음은 부인 당하게 됩니다. “마음의 의”(벧전3:15-17)가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교만하고 남을 비웃는 자들은 천국 밖에 있을 것입니다. 다만, 어린아이와 다른 것은 그리스도인의 순결한 삶은 사랑의 지혜가 수반되어 있습니다(고전14:20).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막10:15)
전도서1:15절
“구부러진 것도 곧게 할 수 없고 모자란 것도 셀 수 없도다”
오래 전 영화 “오염된 자식들”이 떠오릅니다. 줄거리는 병구(안성기 역)는 평범한 여자 형자와 사귀다가, 출세를 위해 배신하고 자신이 다니는 회사 사장의 딸(명희- 장애인)과 결혼합니다. 병구는 결혼 후 장애인 명희를 섬기며 매우 고생하나, 어떤 계기로 명희는 수술을 받아 장애인으로부터 벗어납니다. 그러자, 병구는 명희에게 이혼 당하고 비참한 꼴로 몰락한 뒤, 받은 위자료 3억원 모두를 고아원에 기부한다는 내용입니다. 위 영화는 유익서의 소설 『비를 타고 오른 망둥이』를 극화한 것으로 물론 허구이나, 현실의 거울이기 때문에 우리는 감동과 교훈을 받게 됩니다. 이처럼, 자신을 위해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는 구부러지고 모자란 인간의 본성은 고치지 못합니다. 베데스다의 38년된 병자의 모습이 그 전형입니다. 주님은 많은 병자 중 그 한 사람만 선택하여 고쳐주셨으나, 그는 안식일을 위반하였다고 추궁받자 오히려 주님을 고발하였습니다. 그는 은혜를 모르고 배신한 아담과 같습니다. 복음의 역사에서 장애인이 기적의 치유를 받거나, 절박한 사람이 기도의 응답을 받더라도, 그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주님의 뜻을 행하지 못한다면 “명희”나 “38년된 병자”처럼 더 악화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 승천하시어 속죄권을 확보하신 뒤, 우리의 마음을 고치시려고 당신의 영을 보내셨습니다. 성령님의 가장 중요한 사역은 주님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오사, 먼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신 뒤, 그리스도를 본받아 아버지의 계명을 따라 살게하시는 작업입니다.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가 되었느니라 하시고” (막4:8)
잠언27:5절
“드러내 놓고 꾸짖는 것이, 숨은 사랑보다 낫다.”(새번역)
5,6절의 주제어는 사랑인데 사랑의 표현은 역설적일 수 있습니다. 책망이 참된 사랑의 표현일 수 있고, 오히려 입맞춤은 배신을 숨기는 도구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현자는 드러내어 꾸짖기를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아니 실제로 그런 면책을 하려고 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녀, 제자, 혹 친구가 개선될 수 있는가의 여부입니다. 만약 책망이 없다면, 과거의 잘못이 되풀이 될 것이므로 책망은 드러내 놓고 해야됩니다. 표현되지 않는다면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한편, ‘숨은 사랑’은 상대방의 잘못을 알고도 공개적으로 꾸짖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종의 이기적인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책망을 통하여 사랑하는 자가 최선의 유익을 받을 수 있음을 알고도, 비겁하고, 소심하며, 심지어 게을러서, 모험을 감수하기 꺼려하기 때문입니다. 실로 숨은 사랑은 어두운 밤에 청년이 처녀에게 윙크를 보내는 것과 같아 그녀에게도 자신에게도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자녀에 대한 부모의 꾸지람을 생각해 보면 됩니다. 그러나 어른의 경우 하나님은 인생 채찍과 사람 막대기로 징계합니다. 따라서 사랑과 바로잡는 행동(징계)은 함께 갑니다. 구약성경에도 “네 이웃을 반드시 견책하라”(레19:17)에 뒤이어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레19:18)는 명령이 주어짐에 주목해야 합니다. 실로 “책망” 혹은 “징계”가 그 당시에는 즐겁지 않고 괴로움으로 여겨지지만, 이것들을 통해 훈련받은 사람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히12:11). 우리는 올바른 “책망” 특히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꾸지람은 낙심하지 말고 “듣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또 이르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막4:11).
잠언27:6절
“친구의 아픈 책망은 충직으로 말미암는 것이나 원수의 잦은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
본절은 5절과 동일한 내용이나 좀더 구체적입니다. 즉 친구의 ‘아픈 책망’은 ‘면책-드러내 놓고 꾸짖는 것’과 ‘잦은 입맞춤’은 ‘숨은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만, 5절은 ‘드러내 놓고 꾸짖는 것’ 자체의 가치를 말하지만, 본절은 친구가 하는 ‘아픈 책망’의 출처가 미움이 아니라 친구의 사랑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 숨은 의도는 친구의 권고를 받아들여 잘못된 행동을 고치라는 요청입니다. ‘아픈 책망’으로 의역된 원어는 ‘피츠에’로서 ‘외적인 상처’를 의미하나, 여기서는 상당히 강한 어투로 꾸짖는 친구의 책망이 주는 아픔을 빗대었습니다.이른바 ‘마상 =마음의 상처”를 입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참된 사랑의 동기에서 나왔고, 또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목적을 갖고 있기에 선한 행동입니다. 그 반면, ‘원수의 잦은 입맞춤’은 가룟 유다와 같이 악한 의도를 숨기고 외적으로는 친근한 척 한다는 의미로써 후단 말미의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란 표현이 잘 말해줍니다. 그 원수는 잠언의 제자가 내심 밉지만 이용하려는 속셈 때문에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위선적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뱀과 같이 지혜로와야 합니다. 따라서, 겉으로 드러난 행동보다 그 사람의 인품과 숨은 의도를 파악하여 지혜롭게 처신해야 합니다. 그 지혜란 우리가 처한 모든 상황에서 주님의 계명(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따라 가는 것입니다. 주님을 경외하여 그분의 명령을 준행하고자 하면, 우리의 분별력은 모든 사람들 보다 뛰어나게 될 것입니다(시편119:98-100). “주의 법도들로 말미암아 내가 명철하게 되었으므로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시편119:104)
잠언27:7절
“배부른 자는 꿀이라도 싫어하고 주린 자에게는 쓴 것이라도 다니라”
인간관계에서 상황과 때가 중요함을 교훈하는 내용입니다. 꿀은 ‘좋은 것’의 상징으로 본절이 위치한 문맥에서는 ‘좋은 충고’를 의미한다고 보여집니다. ‘싫어한다’의 원어는 ‘타부쓰’로 ‘발로 밟다’는 의미인데, 강한 혐오와 멸시를 나타내는 행동입니다. 그러므로 전단은 모든 것이 풍부하여 교만해진 사람은 아무리 좋은 충고라도 멸시한다는 뜻을, 후단은 배고픈 사람에게는 어떤 것을 먹어도 단 것처럼, 어려운 형편에 처해 마음이 가난한 자는 감정을 상하게 하는 충고라도 겸손하게 수용할 수 있음을 의미입니다. 좋은 예가 주님의 면박을 받은 수로보니게 여인입니다. 절박한 그녀의 부르짖음에 주님은 냉담한 모습을 보이셨으나 그녀는 낙심하지 않고 더욱 가까이 나아가 주님의 인정을 받습니다. 본절은 환경과 형편에 따라 마음이 좌우되는 일반적인 사람들을 다루지만, 좀 더 관찰하면 비록 풍요할지라도 거슬리는 충고에 열린 마음을 가지라는 가르침을 발견하게 됩니다. 성경의 예는 다윗 왕입니다. 그는 밧세바와 간통한 뒤, 남편 우리아를 제거하고, 밧세바를 취해들였습니다. 다윗은 아이를 낳기까지 무려 1년이나 외식하고 살았습니다. 회개를 기다리신 주님은 드디어 선지자 나단을 보내어 범죄를 추궁하였고, 이에 다윗은 큰 소리로 회개하며 애통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온 시가 시편51편입니다. 모세율법에 따르면 살인죄와 간음죄는 제사를 통해 용서받지 못하고, 오직 사형만이 존재합니다. 물론, 다윗은 왕이라 집행할 사람이 없지만, 하나님은 집행하실 수 있기 때문에 간절히 용서를 구하고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한 마디 말로 총명한 자에게 충고하는 것이 매 백대로 미련한 자를 때리는 것보다 더욱 깊이 박히느니라”(잠언17: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