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3/10/30-11/3)

(내 삶의 주인이신 그리스도, p144-146)

우리의 시선을 그리스도께 두면 힘든 일도 기쁘고, 의와 공평도 베풀 수 있습니다. 이 단순한 원리가 그리스도인의 섬김의 비밀입니다. 더비셔의 클리프 대학 학장을 역임한 사무엘 채드윅은 이 원리를 어려서부터 배웠습니다. 어느 주일에 콜리 목사가 아이들에게 존 뉴턴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만일 뉴턴이 구두닦이였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구두를 닦아 동네 최고의 구두닦이가 되었을 것이라는 요지였습니다. 어린 사무엘은 아버지의 신발을 모두 닦는 것이 집에서 자신이 맡은 일이었던 터라 바짝 다가앉아 귀담아들었습니다. 나중에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구두 닦는 일이 싫었고 아버지의 부츠는 특히 싫었다. 마침 그 기념 주일에 비가 내렸기 때문에 이튿날 아침에 구두를 닦는 일은 최악이었다. 매도 먼저 맞는 것이 낫다는 생각에 부츠부터 먼저 닦아 내려 놓으며 한시름 놓았는데, 부츠를 보는 순간 마치 예수님이 신으실 것처럼 구두를 닦아야 한다던 목사님의 말씀이 내게 도전으로 다가왔다….이 부츠를 예수 그리스도깨서 신으셔도 괜찮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나는 부츠를 들고 다시 닦았다. 단순한 일이었지만 그때 나에게는 그것이 내 평생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가장 단순한 일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그분께 하듯 하는 버릇이 들었다.” 고(故) 김창엽 목사/교수님은 70대 후반에, 사모님이 뇌출혈을 당하셨습니다. 돌보는 것이 너무나도 힘들어 주님께 기도드렸더니 “내게 하듯 하라”는 깨달음을 받아 힘이 났다고 하신 경험과 같은 취지입니다.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마25:40)

잠언27:1절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

27장은 이웃 간의 우정을 다루는 1-22절과 지혜로운 경제적 활동을 촉구하는 23-27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중 1,2절은 자랑, 칭찬을 뜻하는 ‘할랄’이란 단어가 나와 하나님의 주권 앞에서 ‘겸손’히 살아갈 것을 교훈합니다. 사람이란 권력, 재물, 건강, 명예 등을 가졌거나, 형통하면 자랑하려는 본능이 있습니다. 이솝 우화의 한 대목입니다. 자라는 학에게 부탁하여 막대기를 물고 하늘을 나르자 자랑스러웠습니다. 이때 땅에서 여러 동물들이 칭찬하면서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묻자, 자라는 학의 경고도 무시한 채 입을 열고 자랑하려는 순간 땅에 떨어져 죽고 말았습니다. 동일한 속담이 성경에 등장합니다: ‘갑옷 입은 자가 벗은 자처럼 자랑하지 말라’(왕상20:11) – 비시 8세기 중엽 아합으로 추정되는 이스라엘 왕이 이스라엘을 침공할 구실을 찾고 있던 아람 왕 벤하닷에게 대답한 말입니다. 그 말을 듣자 분노한 벤하닷은 막강한 군대를 이끌고 침공하나, 하나님의 기적적인 도움을 받은 이스라엘 군대에게 패배당하고 아람 왕 벤하닷은 포로로 잡혔습니다. 또 누가복음의 어리석은 부자는 그 해에 소출이 풍성하자 심중에 창고를 더 지으려고 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그는 자신에게는 부요하나 하나님께는 그렇지 못한 자임이 드러났습니다(예컨데, 가난한 이웃을 돌보지 않는 부자). 하나님은 그 날 밤 그를 데리고 가셨습니다(12:16-21). 우리는 스스로 든든히 섰다고 생각할 때조차 진실로 허사이므로, 항상 주님을 경외하며 삶을 계획하고 살아가야만 합니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약4:14).

잠언27:2절
“타인이 너를 칭찬하게 하고 네 입으로는 하지 말며 외인이 너를 칭찬하게 하고 네 입술로는 하지 말지니라

본절 역시 부적절한 자랑에 관한 경고이지만, 그 대상이 ‘미래의 확실성’이 아니라 자신의 성품이나 업적입니다. ‘타인’의 원어는 ‘자르’로서 ‘낯선 사람’을 의미하나, 본절의 문맥에서는 ‘사심 없이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실상 이해 관계 없는 타인의 판단은 좀 더 객관적일 수 있습니다. 후단은 전단의 취지를 또 한 번 반복하는데, ‘타인’ 대신 ‘외인-outsider’을, ‘입’ 대신 ‘입술’로 대체함으로 문장의 아름다움을 갖추려 하였습니다. 사회에서도 자화자찬하는 사람은 어리석다고 경멸을 받는데, 주님을 경외하는 그리스도인들이 할 바가 아닙니다. ‘칭찬’이란 냄새와 같아서 자신이 하면 악취가 나고 타인이 하면 향기가 나는 묘한 행위이기 때문입니다(독일속담). 한편, 누군가로부터 ‘칭찬=영광’을 받으려 하는 태도는 인간의 본성이며 양면성이 있습니다. 만약, 그 본성이 교만으로 가면 심판을 받습니다. 헤롯 아그립바 1세가 이스라엘을 다스릴 때입니다. 두로와 시돈 사람들을 앞에 놓고 연설하는 중, 백성들이 큰 소리로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하자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았습니다. 그의 창자는 벌레에게 먹혀 죽었습니다(행12:23). 그 반면, 건강한 자아상을 구축하기 위해 자신 안에 자랑(자부심)이 필요합니다. 이때의 ‘자랑’은 ‘겸손’과 결부된 자랑이어야 하고, 그 방법은 어떤 자랑이라도 하나님을 향해 그 방향을 돌리면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주님 안에서 자랑하라고 명령합니다(고후10:17).“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고후10:18).

잠언27:3절
“돌은 무겁고 모래도 가볍지 아니하거니와 미련한 자의 분노는 이 둘보다 무거우니라

본절에서 ‘돌’이란 나르기 힘든 무거운 바위를, ‘모래’는 해변의 모래를 의미하면서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무거움이 함축되었습니다. 우리는 공사 현장에서 이들의 일부인 모래와 자갈을 지고 힘들게 노동하는 모습을 보게됩니다. 그러나 이런 육체적인 고통은 미련한 자가 야기 하는 ‘분노의 짐’ 보다 가볍다는 것이 잠언의 평가입니다. 잠언은 ‘분노의 짐’을 정확히 말하지 않지만, 미련한 자의 불쾌한 행동이나 미숙한 업무처리 등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미련한 자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행동하는 자들로서, 이들의 행위 대부분은 범죄를 구성합니다. 연예인 박수홍 씨는 친형 부부가 30년 동안 자신의 재산을 100억원 이상 횡령한 사실에 분노하여 소송 중입니다. 심지어 그의 형수 이씨(200억 대 부동산 보유)는 박씨의 돈으로 상가를 취득하고 자신들과 어머니 이름으로 등기하였으며, 박씨는 16년 후에야 자신의 소유가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데일리안, 2023/8/16). 박씨의 변호사는 “피해자가 바라는 건 가해자의 진심어린 반성이나 이들은 재판장에게만 반성하고 있다”고 개탄하였습니다. 횡령으로 상대방을 분노하게 하면 세상에서는 횡령죄이지만 성경에서는 살인죄로서(마5:22), 이의 해결 방법은 단 하나입니다 – 형과 형수가 잘못을 시인하고, 동생의 재산을 되돌려 주는 것입니다 (마5:23,24). 그러나 이것이 어려우며, 그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은 사랑의 대상이지 신뢰의 대상은 아님을 다시 한 번 마음에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차라리 새끼 빼앗긴 암곰을 만날지언정 미련한 일을 행하는 미련한 자를 만나지 말 것이니라” (잠17:12).

잠언27:4절
“분은 잔인하고 노는 창수 같거니와 투기 앞에야 누가 서리요

본절에서 질투(투기)는 ‘분’이나 ‘노’보다 다루기 어려움을 보여줍니다. 솔로몬은, 먼저 분과 노가 초래하는 파괴적인 결과를 적어 놓아 경고합니다. 하마스로 인해 분노한 이스라엘에게 미국은 2001년 9/11 테러 사건의 경험담을 들려주면서 분노에 삼켜서 실수 하지 말라고 충고 하였다고 보도되었습니다. 좋은 조언입니다. 그러나 질투는 분노의 힘을 넘어서서, 질투를 하는 자나 받는 자 모두 뼈가 썩음과 같은 고통 속에 있게 합니다(잠14:30). 또한, 분노는 밖으로 표출되나, 질투는 대부분 숨겨져 있으며, 결과를 볼 때까지 여전히 음흉합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일 때 그 시발점은 질투였습니다. 하나님은 친히 가인에게 이를 경고 하였으나 질투는 그를 삼켜버리고 인류 최초의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사울 왕도 같습니다. 사울 왕이 골리앗과 블레셋의 전투에서 승전해 돌아오자, 마중나온 여인들은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다” 라고 노래하여 사울 왕을 격분시켰습니다. 이후부터 사울 왕은 다윗을 질투하여 평생의 대적이 되었습니다. 비록 다윗은 사울의 사위이자 군대장관이었지만, 사울이 죽기까지 10년을 광야로 도피하였다가 결국 블레셋에 망명하였습니다. 그 와중에도 다윗은 사울에게 선행을 베풀어 사울의 목숨을 두 번이나 살려 주었습니다. 이는 다윗이 하나님을 경외하여, 사을의 왕됨을 존중하였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막지 못하는 질투라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앞에서는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고전13:4,5). 독생자를 우리에게 아낌 없이 주심으로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선포하는 복음의 능력이 여기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