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스토트 목사님의 책 “온전한 그리스도인” 중 ‘그리스도인의 좀 더 넓은 사랑’(11-113)에 관한 묵상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차별적이고 보편적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마5:45). 하나님의 이 사랑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그리스도 밖의 사람들도 사랑은 있습니다. 한 소년이 한 소녀를, 한 소녀가 한 소년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자녀가 부모를, 또 남편이 아내를, 아내가 남편을 사랑할 수 있으며, 친구들이 서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방식, 즉 상호적 사랑입니다. 상대방이 나에게 잘해 주면, 나도 상대방에게 잘해 준다. 상대방이 내게 친절을 베풀면, 나도 상대방에게 친절을 베푼다. 이 상호적 사랑을 근거한 세상의 최고의 가르침은 “네가 싫은 것은 남에게도 하지 말라”는 은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지배법칙은 황금률입니다. “네가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너도 남을 대접하라”(마7:12). 하나님은 당신을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된 우리를 사랑하사 당신의 아들을 보내심으로 우리와 화목할 수 있는 길을 여셨습니다. 산상수훈에서 우리의 사랑을 ‘원수와 핍박하는 자’(마5:44)까지 넗히라고 하신 주님의 요구는 바로 여기에 근거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본받아 우리를 미워하는 자는 물론, 우리의 원수까지도 사랑할 책임이 있습니다. 다만, 우리의 사랑은 품위와 분별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개나 돼지 같이 거룩한 것과 귀한 것을 알아보지 못하는 자들(마7:6), 우리의 종교심을 이용하여 자신의 배를 채우려는 거짓된 자들(마7:15-20)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눅6:36).
잠언26:20절
“나무가 다하면 불이 꺼지고 말쟁이가 없어지면 다툼이 쉬느니라”
본절에서 ‘말쟁이’란 ‘뒤에서 흠 잡고 원망, 불평한다’는 뜻의 ‘라간’의 파생어로, 나쁜 말을 옮기고 다니며 원망과 불평을 조장하는 자를 말합니다. 그는 다툼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불을 끄기 위해 더 이상 나무를 공급하지 않듯이, 말쟁이를 제거해야 다툼이 그칩니다. 손자병법 (용간用間)편은 첩자를 통해 정보를 얻고, 내부를 이간시켜 분열하도록 전략을 펴라고 합니다. 이의 대가는 마귀입니다. ‘마귀’의 헬라어는 ‘디아볼로- 참소하는 자’로서, ‘사이’를 뜻하는 ‘디아’와 ‘던지다’를 뜻하는 ‘발로’의 합성어입니다. 즉 마귀는 사람과 사람,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생각과 말을 던져 이간시키는 영적존재입니다. 좋은 예가 에덴 동산의 타락 사건이며, 마귀는 하나님을 참소하여 하와를 넘어뜨렸습니다. 성도들의 부르심 중 하나는 이 영적 존재들과의 전쟁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영적 존재가 있음조차 알지 못하여, 마귀의 공격은 성도들과 교회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고전적 방법이 교회 내 ‘말쟁이’를 통해 오해, 시비, 원망, 불평을 조장시키는 것입니다. 만약 지혜롭게 처리하지 못한다면, 교회에 다툼은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게을러지고 ‘말쟁이’가 될 우려가 있는 60이 안된 과부를 교회의 과부 명부에 올리지 말고, 오히려 결혼하도록 하여 아이를 낳으며 집을 다스리게 하라고 명령한 것입니다(딤전5:11-15). 우리는 사랑 가운데 참된 것을 말하여, 사탄에게 틈을 주지 말고 모든 일에 머리되신 그리스도께 이르도록 자라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골3:15)
잠언26:21절
“숯불 위에 숯을 더하는 것과 타는 불에 나무를 더하는 것 같이 다툼을 좋아하는 자는 시비를 일으키느니라”
본절은 20절과 같은 교훈을 다른 측면에 말합니다. 20절은 타는 불도 태울 나무가 없으면 꺼지듯이 험담하는 사람(말쟁이)이 없어지면 다툼은 사라진다는 뜻입니다. 21절은 이미 타고 있는 불에 숯이나 나무를 더하면 더욱 타오르는 것 같이, 분쟁이 시작되었을 때 다툼을 좋아하는 자가 끼어들면 걷잡을 수 없게 될 우려가 있음을 주의하라는 교훈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 중에는 잠언이 ‘다툼을 좋아하는 자’라고 부르는 자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 모임과 공동체의 평화를 위해서는 그런 사람들이 추방되어야 합니다. ‘다툼을 좋아하는 자’의 범죄적 모습을 묘사한 작품이 아가다 크리스티의 추리소설 ‘커어튼’입니다. 이미 5건의 살인을 부추킨 스티븐 노튼은 토비 러트렐 저택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는 남편 토비가 부인 데이지의 잔소리와 히스테리에 늘상 시달리고 있음을 깨닫고는 부인에 대한 토비의 열등감을 자극하였습니다. 아내에게 화가 난 토비는 술김에 토끼를 노리는 척 하면서 들판에 잠깐 나타났던 데이지를 라이플로 쏘나, 다행히 빗나가 부상만 입힙니다. 토비는 바로 후회하고 두 부부는 손을 잡고 울며 화해합니다. 결국 작가인 크리스티는 탐정 포와르를 통해 살인 교사자 스티븐 노튼을 죽이고 맙니다. 스티븐 노튼과 같은 존재가 마귀입니다. 이 적에게 틈을 주지 않도록 화를 내도 죄를 짓지 말고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엡5:26,27).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5:19-21)
잠언26:22절
“남의 말 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
험담(gossips)을 경계하는 본절은 18:8절과 동일합니다만, 18:8절은 어리석은 자를 다루는 문맥에 놓여 있고, 본절은 다툼에 관한 교훈(26:20-22절)의 결론입니다. 좋지 않은 소문을 퍼뜨리는 험담은 마치 들불과 같아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완전히 파괴시킵니다. 그것은 바보가 오만한 말을 함으로 자신과 타인을 모두 해하는 것과는 다르지만, 아무런 배려도 없이 험담을 퍼뜨리는 사람은 공동체의 평화를 위해 추방되어야 할 악인입니다. 따라서 잠언은 종종 험담과 풍문을 전하는 사람들을 정죄합니다(11:13;17:4). 풍문(rumor)은 특정한 사람에 대하여 확실한 근거도 없이 세상에 알려진 부정적인 소문을 말하는데, 그 목적은 해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험담(gossip)은 궁극적으로 사실로 판명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말하는 사람을 무죄방면시켜 주지는 않습니다. 만약 사실이라 할지라도, 그런 대화는 적절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험담과 풍문이 그토록 해롭지만, 너무나도 매력적이서 아담의 후예들은 거부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인간은 이렇게까지 타락하였습니다. 본절은 험담을 마치 구하기 힘든 ‘별식 – 맛있는 음식’에 비유하고, 마음의 깊은 곳까지 미침을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간다”고 생생하게 표현합니다. 험담이나 풍문이 이런 마력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아예 처음부터 피하여야 합니다. 만약 그것에 귀 기울인다면, 그의 인격은 타락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 대신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뜻을 음미함으로써 기쁨을 찾아야 합니다.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골3:13)
잠언26:23절
“온유한 입술에 악한 마음은 낮은 은을 입힌 토기니라”
26:17-28까지 언급되는 4 종류의 악하고 반사회적인 사람들 중, 23-28절은 그 절정인 ‘악한 원수’를 다룹니다. 그 중 23-25절은 ‘악한 원수’의 속임을, 26-28절은 그들의 파멸을 말합니다. 남을 속이는 거짓된 말은 결국 이웃에게 해를 입힌다는 의미에서 앞 단락(속임, 험담, 다툼)과 내용이 연결되나, 본절의 초점은 위선자입니다. 솔로몬은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말을 저급한 은으로 도금한 토기에 비유합니다. 이 토기는 마치 표면은 은빛 그릇 같은 착각을 갖게 하지만 실제로는 모조품(짝뚱)으로 이를 모르고 사면 큰 손실을 보게 될 것입니다. 악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하는 매끄러운 말의 경우도 이와 같습니다. 특히 도덕적 혹은 종교적으로 경건을 가장하면서 속에는 악한 마음을 품는 위선자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말과 행동을 비교하면, 악한 의도를 알게 됩니다. 한편, “온유한”에 해당하는 ‘똘레킴’은 ‘불타다’ ‘열렬하다’의 뜻입니다. 따라서 ‘온유한 입술’은 ‘불타는 입술’이라는 문자적 의미를 갖습니다. 이의 해석적 다툼이 있으나, 실제로는 악한 마음이 가득 차 있지만 사랑이 넘치는 양 온유한 입술로 그 의도를 꾸민다고 읽는 것이 옳습니다. 성경의 좋은 예는 가룟 유다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잡으러 많은 무리와 함께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나아가 친구인양 붙잡고 “랍비여 안녕하십니까?”라는 말과 함께 입맞춤으로 주님을 성전 경찰들에게 넘겨주었습니다. 본 잠언은 악인들의 모습의 일면을 보여주기 때문에, 우리가 이 교훈을 마음에 간직하면 분별력을 갖출 수 았습니다.“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마7: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