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3/10/9-13)

잠언26:14절
“문짝이 돌쩌귀를 따라서 도는 것 같이 게으른 자는 침상에서 도느니라

솔로몬은 게으른 자의 밭을 지나가다가 가시덤불이 퍼졌고 거친 풀로 덮힌 것을 보고 생각이 깊었습니다. 그 게으른 자의 ‘열망’은 오직 ‘게으름’ 뿐이기에, 그 밭의 소유자는 가난할 수밖에 없습니다(24:30-34). 그런 게으른 자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가 있는 곳은 침상입니다! 문짝은 벽이나 기둥에 고정되어 돌쩌귀(경첩)를 따라 계속 회전하지만 절대 움직이지는 못합니다. 게으른 자가 침상에서 일어나지 않고 구르는 모습이 마치 이와 같아 보입니다. 물론 둘 사이에는 뚜렷한 차이가 있습니다. 문짝은 돌쩌귀를 따라서 회전하여 바람과 소리를 막아주는 등 사람에게 많은 유익을 주지만, 게으른 자는 움직일 수 있지만 땀흘리기 싫어하여 아무데도 가지 않으며, 그 결과 그들은 어떤 개선이나 진보도 없습니다. 그들의 밭은 잡풀과 가시덤불로 뒤덮혀 있고, 그들의 포도원의 돌담은 무너져, 동물들의 침입을 막을 수 없고, 그들의 옷은 헤어져 있으나 꿰매지도 않아 너덜거립니다. 곳간에는 전혀 양식이 없어 가족은 굶주리고, 겨울을 보낼 땔감을 준비하지 못하여 추위에 자신과 가족을 보호할 아무런 수단이 없습니다. 그래도 그는 침상에서 일어나지 않고 일하러 나가지 않습니다. 그들은 정말 지혜가 없는 자로서, 이를 보는 이웃은 그들을 게으른 자, 바보들이라 비웃고 그들의 장래는 절망입니다. 실상 이들은 자신만 아는 이기적이고 악한 자들입니다. 마지막 날 주님은 이들을 “게으르고 악한 종”이라는 심판을 내리고,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아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하실 것입니다(마25:30). “게으른 자의 욕망이 자기를 죽이나니 이는 자기의 손으로 일하기를 싫어함이니라”(잠언21:25).

잠언26:15절
“게으른 자는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하느니라

이 구절은 게으른 자에 대한 세 번째 묘사로서, 잠언 19:24절 “게으른 자는 자기의 손을 그릇에 넣고서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하느니라”와 같습니다. 솔로몬은 게으른 자는 어떤 형태의 일도 싫어하며 심지어 음식을 들어 올린다는 생각에도 지쳐서 괴로워 한다고 또 한 번 비웃고 있습니다. 여기서 ‘괴로워한다’는 것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너무나 지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들에게는 음식을 입으로 들어 올려 먹는 것 같은 아주 간단한 일조차 힘들어 하기 때문에, 배고품도 일할 동기가 되지 못합니다. 이는 기회가 있음에도 그들은 게을러서 굶을 수밖에 없음을 뜻합니다. 잠언13:4절, “게으른 사람은 아무리 바라는 것이 있어도 얻지 못하지만, 부지런한 사람의 마음은 바라는 것을 넉넉하게 얻는다”, 역시 본 잠언과 유사한 교훈을 말합니다. 실로, 게으른 자는 게을러서 목적을 이루지 못합니다. 브리지가 한 적용입니다: “희생 없는 믿음, 근면 없는 믿음은 결코 하늘나라로 가는 길을 열어 주지 못할 것이다!” 타당합니다. 게으른 자는 자신에게 맡겨진 일도 제대로 하지 않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갈 수 있겠습니까? 아마 온갖 구실을 대고 이웃을 섬기는 귀찮은 일을 실천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한편, 개미는 어떤 두령도 감독자도 통치자도 없지만 여름 동안에 먹을 것을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아 추운 겨울을 대비합니다. 그러므로 게으른 사람은 개미에게 가서 배우고 그 미물의 지혜를 내면화 해야 합니다(잠6:6-8).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누워 있자 하면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잠언6:10-11)

잠언26:16절
“게으른 자는 사리에 맞게 대답하는 사람 일곱보다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느니라

본 구절은 네 번째 ‘게으른 자의 거울’을 다루고 있으며, 여기에 등장하는 게으른 자는 ‘게으르면서도 자신을 지혜롭게 생각하는 자’입니다. 게으른 자는 자신의 재산을 지키지 못하고, 남에게 의지하여 생존하는 자들이나 그들도 그렇게 사는 이유가 있습니다. 미련한 자를 다룬 12 개 구절(1-12)에서 그 극치는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는 자임과 같이(12), 게으른 자도 자신의 이유를 지혜롭게 여기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자신의 게으름을 지혜의 결정체로 여기기 때문에 게으르고 교만한 자야말로 구제 불가능합니다. 그는 스스로를 속이고 있어 게으른 삶을 반성하지 못하고 개선가능성은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러면 지혜롭게 여기고 있는 그 게으른 자는 어디에 있을까요? 침상입니다! 그는 침상에서 문짝처럼 돌고 있습니다. 그는 사자가 아니라 고양이조차 두려워하므로 문을 열려고도 하지 않습니다(14). 지금까지 살핀 어리석은 자들(26:1-11), 즉 미련한 짓을 거듭하는 미련한 자라 할지라도 매질(26:3)이나 계속된 바른 대답(26:5)을 통해 그 어리석음에서 구원받을 희망이 보이지만,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게으른 자’(16)나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어리석은 자’(12)는 구원의 희망조차 발견할 수 없습니다. 한편, ‘사리에 맞게 대답하는 사람 일곱’이란 가장 현명한 사람들을 말하는데, 신구약 성경에서 ‘일곱’은 완전수를 의미합니다. 본절의 ‘게으르나 교만한 자’의 삶은 파국으로 결말지어질 것이며, 이는 영원한 심판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너는 스스로 지혜롭다 하는 사람을 보았을 것이나, 그런 사람보다는 오히려 미련한 사람에게 더 희망이 있다.”(잠언26:12,새번역)

잠언26:17절
“길로 지나가다가 자기와 상관 없는 다툼을 간섭하는 자는 개의 귀를 잡는 자와 같으니라

26:17-28까지 12구절은 4 종류의 악하고 반사회적인 사람들에 초점을 맞추나 그 강도는 점점  올라갑니다. 즉, 히스기야는 ‘남의 일에 참견하여 스스로를 해치는 자’(17), ‘이웃을 해하는 자’(18-19), ‘비방하는 자’(20-22)로 단계를 높여가다가 ‘악한 원수’ (23-28)에서 그 절정에 이르도록 편집하였습니다. 단락의 시작인 본절은 상관없는 다툼에 간섭하는 자의 어리석음을 개의 귀를 잡는 것에 비유합니다. ‘길로 지나가다’란 아무 상관도 없음을 강조하는 관용적 표현입니다만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도미한 안창호 선생이 샌프란시스코에서 길을 가다가 인삼장사를 하는 두 동포가 서로 싸우는 모습을 보자 그들을 뜯어 말린 것은 민족의 관점에서 너무나도 자신과 상관이 있는 일입니다. 후단에 나타난 ‘개’는 광야를 떠도는 사나운 들개로 해석됩니다. 팔레스틴에는 사나운 들개가 많아(왕하9:30-37), 들판을 헤매는 하얀 들개 무리는 공포의 대상일 정도입니다. 이 들개들은 제멋대로 자라나서 사납기 짝이 없고 무리를 지어 다니기에 사람의 생명을 위협하기 충분합니다. 그런 개가 옆으로 오는 것만 해도 위험한 일인데, 그 개의 귀를 잡는 행동은 너무나도 무모한 짓입니다. 최근에 하마스의 반인륜적인 공격으로 하마스와 이스라엘 사이에 벌어진 전쟁에 관하여 큰 이해관계가 없는 한국 중국 등은 전쟁은 좋지 않은 것임을 강조하는 선에서 논평하고 말을 아끼고 있습니다. 하물며 잠언의 제자들인 우리는 불필요한 분쟁에 끼어들어 시간을 낭비하고 어려움을 겪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합니다.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는 지혜롭게 대하고 주어진 기회를 잘 살리십시오.”(골4:5,공동번역)

잠언26:18-19절
“횃불을 던지며 화살을 쏘아서 사람을 죽이는 미친 사람이 있나니 자기의 이웃을 속이고 말하기를 내가 희롱하였노라 하는 자도 그러하니라

18-19절은 이웃을 속이고 그것이 농담이었다는 비행을 경계합니다. 18절의 ‘미친 사람’은 ‘횃불을 던지며 화살을 쏘아” 사람을 죽이는 자입니다. ‘횃불’이란 막대기나 화살에 기름먹인 천을 감아 불을 붙인 것으로 적을 공격하기 위해 만든 무기입니다. 미친 자는 적과 친구를 구분할 수 없습니다. 만약 이런 사람을 그대로 놓아 두었다가는 그 사회는 많은 사람들이 죽고, 큰 혼란이 발생할 것입니다. 그런데, 19절을 보면 ‘자기 이웃을 속이고 말하기를 내가 희롱하였다’고 하는 자도 이 미친 자와 같다고 말씀합니다. ‘속이다’는 사소한 거짓말이 아니라 상대를 곤경에 빠뜨리는 중대한 거짓말이며, 외삼촌 라반이 약속된 라헬 대신 레아를 신부를 주어 야곱을 속였을 때 사용된 단어입니다(창29:25). 야곱은 원치 않는 레아를 얻게 되었고 외삼촌의 속임은 야곱 인생의 불행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희롱한다’는 말은 장난삼아 농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악한 자는 농담과 잔인함의 차이를 분별하지 못하므로, 본 잠언이 장난끼 있는 악인을 무기를 갖고 미쳐날뛰는 광인에 비교한 것은 압권입니다. 둘 다 옳고 그름을 구별할 수 없으며 둘 다 사회에 끔찍한 비극을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미친 사람은 제 정신이 나가 악한 음모를 꾸밀 수 없는 반면, 장난스러운 악인은 범죄를 저지를 수 있습니다. 그의 문제점은 이웃의 불행을 쾌락의 근거로 삼는 점이고, 그 본질은 지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웃 사랑을 배워야만 합니다.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엡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