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13/9/11-15)

잠언25:26절
“의인이 악인 앞에 굴복하는 것은 우물이 흐려짐과 샘이 더러워짐과 같으니라

아브라함의 종이 이삭의 신부감을 찾아 고된 여행길을 마치고 마침내 나홀성에 도착하여 우물가로 갔는데, 만약 그 우물이 흙탕물로 더러워졌다면 그의 실망감이 어떠하였겠습니까? 우물과 샘은 가나안 지역의 생명줄입니다. 이같이 의인은 그 공동체의 생명샘이며, 그 사회로 하여금 썩지 않게 만드는 소금이요 어두움을 밝히는 빛입니다. 요사이 샌프란시스코는 범죄자로 들끓어 홀푸드를 비롯한 많은 회사들이 속속 그 도시를 떠나고 있다 합니다. 이같이 의인이 없는 도시나 국가는 버림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소중한 의인이 악인의 유혹이나 협박에 의해 굴복한다면 생명샘은 더러워지고 그 사회는 부패하여 온통 어두울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세상이 그런 모습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원받은 목적이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이 담긴 모세율법을 받음으로 제사장 국가로 부름을 받았으나, 이방국가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의 유혹과 압력에 굴복하여 우상숭배가 만연하였고, 결국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 온 세상에 흩어졌습니다. 짠맛을 잃은 소금이 길 가에 버려져 사람들의 발에 밟히는 모습 그 자체입니다(마5:13). 그 반면 바벨론에 잡혀간 이스라엘 청년 4 명은 그 이방 땅에서도 모세율법을 지키고, 목숨이 위험한 순간에도 신앙의 절개를 지키자, 주님은 그들을 지켜주셨습니다. 그들의 이름은 다니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입니다. 두려움 없이 주님의 뜻을 행하시기 바랍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친히 우리를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 (눅12:7).

잠언25:27절
“꿀을 많이 먹는 것이 좋지 못하고 자기의 영예를 구하는 것이 헛되니라

일상의 인간관계의 갈등을 다루는 16-27절은 ‘봉투구조’라는 수사법을 사용합니다. ‘꿀’을 소재로 하여 16절(윗면)은 시작하고, 27절(밑면)은 마감하여 편지(16-27절)를 완성합니다. 권면의 핵심은 절제입니다. 꿀은 완전식품으로 몸에 좋지만, 과식하면 토하기 때문에 절제가 필요합니다(16). 영예도 같습니다. 잠언은 “많은 재물 보다 명예를 택하라”(22:1)고 하여 명예를 갖도록 권면합니다. 교회도 같습니다. 바울은 감독과 집사의 직분을 명예롭게 여겨 이를 얻으려는 모습을 아름답다고 칭찬하는데, 경건과 선한 일을 사모하게끔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딤전3:1이하). 집사의 직분을 잘 감당하면 믿음에 큰 담력을 얻고, 자녀의 본이 되어 아름다운 믿음의 가정이 세워집니다. 우리가 세상의 명예나 부 등에 신경을 쏟으면서 이런 귀한 믿음을 등한히 여기면 마지막 날은 물론, 인생 후반부에 후회하게 됩니다. 마치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인격과 능력에 합당한 영예 이상을 추구하는 것은 오히려 해가 됨은, 꿀을 많이 먹어 토하는 것과 다름 없습니다(16). 모든 것이 마찬가지입니다. 영조 때 수장가 상고당 김광수(1699-1770)는 모든 재산을 기울여 수 많은 서화, 골동품을 모았으나, 말년에 생활이 어려워지자 “평생 눈에 갖다바쳤던 것을 이제는 입에다 갖다바칠 수밖에 없다”고 탄식하며 팔았다고 합니다. 절제는 주님을 두려워할 때 가질 수 있습니다. 본절은 하나님과 왕이라는 우주의 통치질서 내에서(25:2) 지혜롭게 살게 하는 적절한 결론입니다.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잠언25:2)

잠언25:28절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지 아니하는 자는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과 같으니라

25:28-26:28절은 7가지 유형의 ‘도덕적 바보들’을 보여줍니다: 무절제한 사람(25:28), 어리석은 자(26:1-12), 게으른 자(13-16), 남의 일에 참견하는 자(17), 불선한 자(18-19), 비방하는 자(20-22), 그리고 악한 마음을 가진 자(23-28). 솔로몬은 ‘봉투구조 Inclusio’(시작25:28-무너짐, 결론 26:28-패망)를 사용하여 도덕적으로 타락한 자의 파멸을 강조합니다. 신약에 이르면, 그것은 죽은 뒤 마지막 날 부활하여 영원한 심판에 처함을 의미합니다(요5:29). 오늘 본문은 절제력을 갖지 못한 사람을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에 비유합니다. 고대 성읍의 큰 특징은 도시를 두른 성벽입니다. 만약 성벽이 허물어져 있다면, 그 도시는 무방비 상태로 남게 되고, 적은 물론 짐승의 위협에도 노출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신을 통제하지 못한다면, 정욕, 교만, 그리고 악한 마음이 그를 지배하여, 죄를 짓게 되며, 그 행위의 사회적 유해성이 크면 사회는 벌을 내릴 것입니다. 또한 무절제한 자는 악한 자(마귀)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여 더 큰 악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절제는 주님을 경외는 마음과 그분의 지혜(가르침)를 재료로 하여 성령님에 의해 생산됩니다. 예를 들어, 담배를 노력하여 끊는 방법도 있으나, 기도응답의 결과 담배를 피고 싶은 생각이 없어지게 하시곤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이지 신자의 자연적인 능력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5:22,23)

잠언26:1절
“미련한 자에게는 영예가 적당하지 아니하니 마치 여름에 눈 오는 것과 추수 때에 비 오는 것 같으니라”


본절은 ‘미련한 자’가 지위와 명예를 탐하는 것을 ‘여름의 눈’과 ‘추수 때의 비’에 비견하면서 경계합니다. 팔레스타인의 여름은 덥고 건조하며, 수확기는 비가 내리지 않는 때입니다. 그런데 여름에 눈이 내리거나 추수 때 비가 내린다면 농작물은 큰 피해를 입게 됩니다. 이같이 영예를 가진 미련한 자란 부적절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파괴적인 영향력을 끼칠 우려가 있습니다. 통상 높은 지위나 명예를 얻었다면, 그에 합당한 실력과 인품을 갖추어야 조직과 사회 공동체에 유익합니다. 만약, 합당한 실력과 인품을 갖추지 못한 미련한 자가 지위를 얻는다면, 겉과 속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그로 인하여 닥치는 폐해는 클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잠언과 시편에서 ‘미련한 자’ ‘바보’ 혹은 ‘어리석은 자’라고 번역할 때 그 원어는 ‘케씰’이며, 대개의 문맥에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것은 물론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악을 행하는 자를 지칭합니다(시14:1). 히틀러, 뭇솔리니, 스탈린, 김일성, 모택동 등을 생각하면 본절이 얼마나 예리하게 그 모순과 재앙적 수준을 표현하였는지 깨닫게 됩니다. 히틀러의 등장으로 유럽은 전쟁이란 날벼락을 맞았고, 유대인들은 6백만명이나 처형되었습니다. 모택동은 대약진 운동, 문화대혁명 등 그야말로 어리석기 짝이 없는 정책을 펼쳐서 1억 명 이상을 굶어죽게 만들었습니다. 김일성 때문에 한반도는 전쟁과 남북분단이라는 엄청난 폐해를 당하였습니다. 이런 불행을 당하지 않도록 민족과 국가를 위해 기도해야만 합니다.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딤전2:1-2)

잠언26:2절
“까닭 없는 저주는 참새가 떠도는 것과 제비가 날아가는 것 같이 이루어지지 아니하느니라”

“까닭 없는 저주”란  정당한 근거가 없는 저주를 의미합니다. 히브리인들을 포함한 고대 근동에서 있었던 말의 효력을 믿는 관습과 두려움이 그 배경입니다. 솔로몬은 분명히 말합니다: 근거 없는 저주의 말은 ‘참새가 떠돌고 제비가 날아가는 것 같이’ 저주의 내용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참새나 제비 같은 새는 단지 먹이를 찾아 이리저리 날 뿐 분명한 목표나 지향점이 없습니다. 정당한 근거가 없는 저주 역시 그 대상이 되는 사람에게 어떤 해악도 미치지 못하고 그냥 공중에 흩어질 뿐입니다. 그러나 정당한 근거가 있는 저주(악인에 대한 백성의 저주 등)는 두려워 하도록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리고 성이 무너진 후,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누구든지 일어나 이 성을 재건하면 주님께 저주를 받는다고 맹세시켰습니다(수6:26). 550년 뒤 아합 왕 시대에 벧엘 사람 히엘이 여리고 성의 기초를 놓을 때 장자를, 성문을 세울 때 막내 아들을 각각 잃어 여호수아의 말이 응하였습니다(왕상16:34). 주님의 경고를 무시한 히엘의 행동에 대한 심판은 정당한 근거가 있습니다. 이같이 심판을 실행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므로, 우리가 주님의 뜻대로 살고 있다면 아무의 말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한편,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는 축복을 받고, 저주하는 저주를 받도록 약속되어 있습니다(창12:1-3). 이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 후손들에게 미치므로, 우리를 축복하는 자는 축복을,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습니다. 따라서 제사장된 우리는 오히려 불쌍히 여겨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눅6:28).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요일5: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