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25:22절(1)
“그리 하는 것은 핀 숯을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요 여호와께서 네게 갚아 주시리라”
22절은 21절의 이유나 결과를 나타내는 접속사 “키”로 시작되는데, “그리 하는 것은”이라는 번역은 결과의 뉘앙스를 전달합니다. 즉, 원수 갚는 대신 선행을 하면, 그 결과 ‘핀 숯을 그의 머리에 놓는’것과 같고, 주님의 상을 받는다는 가르침입니다. ‘핀 숯을 그의 머리에 놓는다’는 의미에 대하여는 4가지 해석이 제시됩니다. (1) 하나님의 심판과 관련시켜, 지혜자가 선행을 베풀지만 결국 악인은 공의로운 심판을 받게 된다. (2) 선대를 받고 회개한 악인의 행태를 말한다. 고대 애굽에서는 회개한 자가 숯불을 담은 그릇을 머리에 이고 다니면서 고통을 느끼며 회개하였음을 알렸습니다. (3) 악인의 고통과 관련시켜 관대한 조치를 받을 때 더 크게 느끼는 양심의 가책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다. (4)고대 애굽에서 불씨를 빌려오는 풍습과 관련하여, 불씨가 꺼진 집에 잘 핀 숯불을 빌려주는 것과 같은 대단한 호의임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어떤 견해를 취하든지 ‘선으로 악을 이기는 삶’을 가르치려는 예의 하나로 제시된 것입니다. 한편, 후반절은 원수에 대한 선행은 ‘여호와’께서 주시는 상으로 이어짐을 보여줍니다. 상을 주시는 주체의 이름을 하나님 대신 ‘여호와/야훼’로 표현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맺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또 ‘상을 주시리라’는 ‘갚다’의 미완료형 ‘예솰렘’으로 신실하신 주님께서 지속적으로 상을 주고 계심을 각각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이와 같이 선행의 동기는 원수 사랑과 주님으로부터 받을 상급으로써, 대인관계의 궁극적 초점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내일은 이와 관련한 두 명의 사례를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
잠언25:22절(2)
“그리 하는 것은 핀 숯을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요 여호와께서 네게 갚아 주시리라”
본 잠언과 관련한 성경 이야기 둘이 있습니다. 하나는 요셉입니다. 요셉은 형제들의 질투를 받아 17살에 애굽의 노예로 팔려갔고, 이어 주인의 아내의 모함을 받아 기약 없이 감옥에 갇히나,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여 여전히 신실하였습니다. 총리로 발탁된 후에도, 요셉은 보디발과 그 아내에게 보복하지 않았고, 양식을 위해 애굽으로 내려온 형제67, 들을 미워하지 않고 따뜻하게 감싸줍니다. 요셉이 행한 용서는 예술가가 심혈을 기울여 그린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기 그지 없었고, 형제들은 비로서 무서운 양심의 가책에서 벗어납니다. 또 한 명은 다윗입니다. 엔게디의 한 동굴에 숨어 있을 때 자신을 치러온 사울이 들어왔습니다. 원수를 네 손에 붙이시겠다는 하나님의 신탁과, 부하들의 재촉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사울의 옷자락만 몰래 베고 살려줍니다. 사울은 울면서 “너는 나보다 의롭다”는 고백을 하지만, 여전히 다윗을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후에 사울과 그 군대가 다윗을 치려고 하길라 산에 진치고 깊은 잠이 들었을 때, 다윗은 아비새와 함께 내려와 사울의 창과 물병만 갖고 그냥 돌아갑니다. 잠이 깨자 사울은 다시 다윗에게 복을 빌고 철군하나, 다윗을 죽이려는 마음은 여전하였습니다. 그러나 역사의 결정자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사울을 대신하여 다윗을 이스라엘 왕으로 세웠습니다. 우리는 요셉처럼 신실하고, 다윗처럼 지혜로워야 하지만, 이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보상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런 요셉과 다윗 이야기는 모두 복음의 모형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잠언25:23절
“북풍이 비를 일으킴 같이 참소하는 혀는 사람의 얼굴에 분을 일으키느니라”
팔레스틴은 지중해로 인해 서풍이 불면 비가 내리고(눅12:54), 북풍은 오히려 하늘을 맑게 합니다. 만약 북풍이 불 때 비가 내린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예기치 못한 현상으로 비가 숨겨져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참소하는 혀(말)’는 피해자에게 숨겨져서 예기치 못한 타격을 입히기에, 피해자가 그것을 들었다면 당연히 분노하여 보복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북풍이 비를 숨겼어도 마침내 쏟아져 내려 모두에게 알려지는 것처럼, 중상모략하는 행위도 만인에게 드러날 것이므로, 자신의 참소의 은밀성을 믿는 자는 바보입니다. 이렇게 나쁜 참소의 영적 아비는 마귀(디아볼로-참소하다)입니다(계20:10). 마귀는 아담과 하와에게 다가와 하나님을 비방하고 범죄하도록 유혹하였습니다(창3:1-7). 이들이 유혹에 넘어가자, 인류 위에는 모든 불행이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아담으로 오신 우리 주님은, 타협하자는 사탄의 유혹을 이기고(마4:1-11), 대신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셔서, 인류와 하나님이 화해할 수 있는 길을 여셨습니다. 그것이 십자가로 인한 구속입니다. 또한 주님의 십자가 사건 때문에 마귀의 권세는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이는 우리의 손으로 작성한 법조문으로 된 빚문서(범죄행위)들을 하나님께서 무효화시키고, 십자가에 못박아 완전히 찢어 제해버리셨기 때문입니다(골2:14-15). 할렐루야! 따라서,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용서와 화해라는 복음의 메시지를 듣고 믿어, 마음에 간직한다면, 우리 마음은 늘 감사와 평화로 채워져 있을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마12:36)
잠언25:24절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
다투는 아내에 관해 교훈하는 본잠언은 21:9절,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사는 것이 나으니라”의 반복입니다. 다만 각 잠언이 놓여진 문맥과 강조점이 다릅니다. 21:3-29절은 악한 마음과 행위가 사회적 관계를 깨뜨리니 경계하라는 교훈을 주며, 21:9절은 그 한 예로 부부 사이를 말합니다. 25: 16-27절은 일상의 인간관계의 갈등 소재로 다루며, 본절은 그 한 예로 예기치 못한 결혼생활의 갈등을 말합니다. 북풍으로 내리는 비나, 교활한 혀에서 나오는 말(25:23) 같이, 적의가 담긴 아내의 언어는 혼인 당시에는 예상치 못한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북풍과 움막은 비유적 연결이 있습니다. ‘움막’으로 번역된 원어 ‘까그’는, ‘지붕’ 혹은 ‘집 꼭대기’란 의미로써, ‘움막에서 산다’는 ‘지붕 모퉁이 위에 산다’를 의역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가옥의 지붕은 평평하였기에 사람이 올라가서 일시 지낼 수는 있으나, 비와 이슬을 가릴 수도, 한낮의 폭염과 밤의 추위를 피할 수도 없어 거처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본잠언은 “아내에게서 보호받지 못한 채 큰 집에서 함께 사는 것보다 비를 피할 수 없는 지붕의 ‘구석에서 사는 것이 낫다’”고 말함으로 슬기로운 아내를 얻으라는 권고를 주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가정을 세우는 아내를 얻은 자야 말로 주님께 은혜를 받은 자입니다(18:22; 19:14). 그러나 그런 가정에는 언제나 남편은 사랑의 섬김을, 아내는 존경을 담은 순종이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덕이 있는 아내는 그 남편에게 영광스런 면류관과 같으나, 부덕한 여인은 남편의 뼈를 썩게 하는 것과 같다.” (잠언12:4,쉬운성경).
잠언25:25절
“먼 땅에서 오는 좋은 기별은 목마른 사람에게 냉수와 같으니라”
“고(구)려는 예전에 당태종도 친히 정벌했어도 항복시키지 못한 나라가 아닌가. 그런 나라의 세자가 제발로 걸어왔으니 이는 하늘의 뜻이구나.”(<고려사절요>). 1259년 고려 고종이 세자를 쿠빌라이(훗날 원 세조·재위 1260~1294)에게 보내 항복의 뜻을 전하자, 먼 고려 땅에서 온 좋은 기별을 들은 쿠빌라이는 몹씨 기뻐하며 한 말입니다. 얼마나 속이 시원하였겠습니까? 당시 쿠빌라이는 아리크 부카와 대칸을 놓고 경쟁 중이었으며, 정통성에서 약간 밀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40년 간 몽골에 저항하던 고려가 쿠빌라이를 택하여 항복했다는 것은 고려는 쿠빌라이 쪽이 이길 것으로 판단한 것입니다. 쿠빌라이는 고려 사절단을 매우 환영하며 대접하는 중에 고종이 죽자 세자를 왕으로 삼아(원종) 고려로 되돌려 보내면서, 고려의 제도와 풍습을 존중하겠다고 약속합니다. 이것이 소위 세조구제(世祖舊制)이며, 고려가 원의 직할통치를 받지 않게 하는 장치로 역할하게 합니다. 그 만큼 고려의 외교력과 판단력은 뛰어났습니다. 그러나, 쿠빌라이에게 전달된 고려 항복 소식은, 죄인들인 우리에게 전달된 사면과 화해의 편지인 복음의 한 모형입니다. 복음이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의 반역과 죄를 용서하시고, 이제 다가올 하나님 나라를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시켜 주시겠다는 기쁜 소식으로 열두 제자 등 복음의 증인들에 의해 전달된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크고 좋은 소식이 어디 있으며, 이 보다 더 우리의 갈증을 해갈시켜주는 기별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복음의 소식은 얼음을 띠운 냉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1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