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말씀(2023/08/28-9/1)

잠언25:18절
“자기의 이웃을 쳐서 거짓 증거하는 사람은 방망이요 칼이요 뾰족한 화살이니라”


열왕기하21장은 왕비 이세벨의 지시를 받아 성읍 장로들은 거짓 증언자들을 고용하여 나봇을 처형하고 그 포도원을 빼았는 장면을 기록합니다. 주님은 선지자 엘리야를 보내 아합집안의 멸망을 선포하셨고, 아합이 죽은 뒤 심판을 집행하였습니다. 18-20절은 이웃에 대한 3가지 악의 유형이 등장하고, ‘거짓증거’는 그 첫 번째입니다. 배경은 법정이며, 사건의 증인으로 잠언의 제자가 섰을 때, 만약 그가 위증을 한다면, 피고는 엄청난 재판상 불이익을 얻게 되고 심지어 사형을 당할 수 있음을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비유로 제시된 3 가지 전쟁무기는 용사들의 필수적 무기로서 전쟁터에서 용사의 부하가 휴대하면서 골프장의 캐디와 같이, 전투의 각 단계 마다 적합한 무기를 제공합니다. ‘방망이= 해머’는 가장 근접전을 위해, ‘칼’은 약간 떨어진 근접전을 위해, 그리고 ‘화살’은 먼 거리의 적을 공격할 때 사용됩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오펜하이머’에는 ‘오펜하이머 청문회’(1954)가 나옵니다. 에드워드 텔러(수소폭탄 아버지)가 증인으로 나와 그의 사상적 전력에 대해 의도적으로 좋지 않은 증언을 하여 큰 타격을 줍니다. 후에 텔러는 페르미 상을 받고(1962년), 이어 오펜하이머를 수상자로 추천하면서(1963년) 화해의 제스처를 보냅니다. 만찬석상에서 둘은 화해의 악수를 하나, 그의 부인은 악수를 거절하는데, 마음의 상처가 아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보복을 자제하고 주님 손에 맡기면서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 마지막날 주님의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마5:39)

잠언25:19절
“환난을 당할 때에, 진실하지 못한 사람을 믿는 것은, 마치 썩은 이와 뼈가 부러진 다리를 의지하는 것과 같다.(새번역)

18절은 적극적인 위증자를 다루었다면, 19절은 평소에는 친구이나 위기 시에는 진실하지 못하여 파괴적인 타격을 입히는 사람을 언급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분별력을 가져야 합니다. 사람의 됨됨이는 주님의 계명(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갖고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본절에서 ‘썩은 이’와 ‘부러진 다리’가 진실하지 못한 사람의 생생한 비유로 등장합니다. ‘이’와 ‘다리’는 먹을 때와 걸을 때 꼭 필요하지만, 썩었거나 부러졌다면 도움은커녕 고통만 줄 뿐입니다. 환난이 덮칠 때 진실하지 못한 친구는 바로 그와 같습니다. 그렇다면 만약 우리 자신이 어려움에 처한다면, 우리와 교제하는 친구나 지인들은 어떻게 나올까요? 따질수록 주님을 더욱 신뢰하게 됩니다. 그러나 신약은 분별력을 뛰어넘어, 제자들에 대한 주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제자들 모두 주님이 걸어가고 계신 십자가와 부활의 길을 몰라 결정적인 순간 주님을 떠났지만, 주님은 부활하시자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고 찾아가셔서 사도로 다시 부르시고 파송하셨습니다(요21장). 바울의 마지막은 아시아의 모든 사람으로부터 버림을 받는 것이었고, 그 중 특히 ‘부겔로와 허모게네’가 언급됩니다. 아마 열심으로 바울을 도왔던 사람들 같습니다(딤후1:15). 그러나 바울은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고 주님의 길을 따릅니다 (딤후4:16,17). 잠언의 이상이 여기에 있으며, 주님이 먼저 성취하셨고, 이어 사도들이 갔으며, 지금은 우리들의 몫입니다. 마지막 날 주님은 선악 간에 모든 것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음식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게 하라”(잠25:21).

잠언25:20절
“마음이 상한 사람 앞에서 즐거운 노래를 부르는 것은, 추운 날에 옷을 벗기는 것과 같고, 상처에 초를 붓는 것과 같다.”(새번역)

잠언은 치명적인 거짓말쟁이(18)와 침묵의 배반자(19)로부터 상황판단을 못하고 부적절하게 말하는 자(20)로 대상을 옮겨 교훈합니다. 사무엘상 1장에 나오는 엘가나는 한나와 브닌나라는 두 명의 아내가 있었습니다. 한나는 남편의 사랑을 받았으나 자식이 없었고, 브닌나는 자식들은 가졌으나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브닌나는 질투하였고 드디어 실로의 매년 제사 때 한나를 격동시켰습니다. 이를 보고 엘가나는 “내가 그대에게 열 명의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냐”고 위로하였으나, 한나는 심히 괴로웠습니다. 이런 한나 앞에서 즐거운 노래를 부른다면 더욱 그녀의 마음이 상하지 않았겠습니까? 솔로몬은 두 가지 비유를 언급합니다. 첫째는 “추운 날에 옷을 벗기는 것 같다”는 비유입니다. 비유의 배경에는 과부의 옷을 전당잡지 못하도록 금지하는 율법이 있습니다(신24:17). 의도 여부에 불구하고 그것은 적절하지 못하고 더 나아가 금지된 행위입니다. 두번째 비유는 “상처에 초를 붓는 것과 같다”입니다. 부드러운 기름으로 고통을 완화해 주기는커녕 오히려 초를 부어 더 아프게 하는 모습이야말로 미련의 극치이지만, 위로에는 지혜와 능력이 필요합니다. 한편, 인간에게 불가능한 것이 주님에게는 가능함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경건한 한나는 그 괴로움을 주님 앞에 토하면서 기도하였습니다. 주님은 그 기도를 들으시고 사무엘을 주셨고, 한나는 서원한대로 젖을 떼자 수소 세 마리를 데리고 실로의 엘리 제사장에게 나아와 주님께 드렸습니다. 믿음의 행위란 이렇게 아름답습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12:15).

잠언25:21절(1)
“네 원수가 배고파 하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 하거든 마실 물을 주어라.

21-22절은 16-22절에 언급된 인간관계의 갈등을 풀어주는 잠언의 해법으로,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교훈의 한 적용이라 하겠습니다. 바울은 롬12:7-21에서 본구절을 인용하나, 원수 사랑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과 모범을 통해 이미 교회 내에 확립되어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잠언은 “보복을 버리고 주님 손에 맡기라”(20:22), “원수의 불행을 기뻐하지 말라”(24:17-18), “노하기를 천천히 하고 허물을 용서하라”(19:11) 등, 이 교훈을 가르친 바 있습니다. 21-22절은 여기서 더 나아가 “곤경에 빠진 원수를 동정하여 먹이라”고 명령하여, “네 이웃을 사랑하라” (레19:18)는 계명의 범주에 원수를 포함시켰습니다. 이는 개인 차원의 선행이란 의미를 넘어, 공동체의 평화와 행복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개인이나 공동체에 대한 이익의 침해가 있을 때, 사적인 강제나 보복은 마땅히 공동체에서 정한 법의 테두리 안에서 다스려져야만 합니다. 모세율법이 그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모세율법은 사사시대에서 왕정이 종료될 때까지 무시되어, 사사시대에는 개인의 소견대로, 왕정시대에는 왕의 자의적 통치만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이스라엘 민족의 삶은 하나님의 뜻을 떠나 있었고 모세율법의 언약대로 멸망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편, 바벨론 포수에서 돌아온 이래 모세율법이 중시되었으나, 이번에는 하나님의 자리에 모세율법이 들어섬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는 끔직한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현대 이스라엘 국가는 모세율법에 대한 합의가 이루지지 않아 헌법을 두지 않고 있습니다. 내일은 본절의 구체적 내용을 보겠습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21).

잠언25:21절(2)
“네 원수가 배고파 하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 하거든 마실 물을 주어라.

보복의 본능은 인간에 내재되어 있어, 모세율법에도 친족구속자(고엘)제도를 두었으며 친족구속자의 책무 중 하나가 ‘피의 보복’입니다. 그러나 고대 부족 사회에서는 보복이 극단적으로 확대되는 경향 때문에, 모세율법에는 ‘도피성’(수20장)제도나, ‘눈은 눈으로’라는 동해보복의 원리(출21:23-24)를 규정하여 과도한 보복을 제한시켰습니다. 본잠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원수에게 자비를 베풀라고 명령합니다. 원수가 곤경에 있을 때 해악 대신 그들을 도우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 행동은 실질적으로 보복의 한 형태로 볼 수 있는데,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오히려 도움을 받음으로 화가 잔뜩 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 잠언을 인용한 후,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21)고 박해 받는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명령합니다. D. 제레마이어 목사님의 일화입니다. 햄버거를 사러 갔을 때 뒤에서 기다리는 차를 못보고 껴들게 되었습니다. 뒷차의 운전자는 화가 나서 여러 번 크락션을 울려댔으나, 목사님은 오히려 그녀의 햄버거와 음료수 값을 치루고 나갔습니다. 백밀러에는 그 운전자의 어쩔줄 몰라하는 모습이 비쳐졌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 한 사울 왕을 두 번이나 살려주는 등 사울에게 베풀었던 여러 선행은 베냐민 지파의 충성을 이끌어 내었고 다윗은 피 없이 통일합니다. 이 같이 하나님은 선행을 근거로 섭리를 진행시킵니다. 이것이 우리가 선행을 해야 할 이유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22절에서 잠언은 또 하나의 근거를 제시합니다. 내일 이에 관해 보겠습니다. “다윗에게 이르되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 (삼상26: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