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25:13절
“믿음직한 심부름꾼은 그를 보낸 주인에게는 무더운 추수 때의 시원한 냉수와 같아서,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준다”(새번역)
‘무더운 추수 때’란 팔레스틴 지역에서 보리 추수가 시작되는 4월 중순부터 밀 추수가 시작되는 6월 초 이후의 기간을 가리키며 매우 더운 계절입니다. ‘시원한 냉수’란 북쪽 헐몬산으로부터 흘러 내려오는 눈이 녹은 물을 가르킵니다. 무더운 계절에 그것도 곡식을 추수하기 위해 힘든 노동을 한 후에 숨이 차고 목이 마른 그 때, 눈이 녹은 차가운 물을 마신다면 정말 속이 다 시원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충성된 사자가 어려운 일을 마치고 돌아와 ‘모든 일이 잘 해결되었습니다’라는 보고를 들은 왕이나 주인의 기쁨은 어떻하겠습니까? 본절은 그것을 ‘무더운 추수 때의 시원한 냉수’에 비유하고 있는데, 저자인 솔로몬이 왕으로서 수 많은 사자들을 파견해 본 자신의 생생한 경험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좋은 예는 아브라함의 종 엘리에셀입니다. 그는 이삭의 신부감을 찾아오라고 500킬로미터나 떨어진 하란으로 보냄을 받았을 때 기도하는 자세로 임하여 리브가라는 훌륭한 신부감을 데리고 돌아왔습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은 이렇게 시원하였을 것입니다. 한편, 성부의 보내심을 받아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속죄의 과업을 이루시고 부활승천하여 보좌 우편에 앉으신 주님 역시 성부께 그런 기쁨을 드렸습니다. 우리도 보내심을 받은 자리에서 ‘믿음직한 심부름꾼’의 역할을 다하여, 주님께 ‘얼음 냉수’를 드려 속을 시원하게 해 드린다면, 주님은 기쁜 마음으로 우리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주실 것입니다(약1:12).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골1:10)
잠언25:14절
“선물한다고 거짓 자랑하는 자는 비 없는 구름과 바람 같으니라”
13절은 ‘충성스러운 사자’를 묘사하고, 14절은 ‘책임감 없는 사람’을 언급함으로 신실하게 살아가라는 교훈을 극대화 합니다. 강우량이 부족한 팔레스타인 지역은 구름과 바람이 일면 사람들은 비가 내릴 것으로 기대하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구름 가운데 간혹 비를 머금지 않는 구름도 있어서, 비를 내리지 않고 지나가 버리는 경우도 종종 있었습니다. 이런 현상은 사람들의 실망감을 야기하였을 것입니다. 지금 솔로몬은 지킬 수 없는 약속을 남발하는 자를 ‘비 없는 구름과 바람’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의할 것은 ‘선물’이란 대목입니다. ‘선물’은 누구에게나 갖고 싶은 물건 등으로 사람을 속이기 위해서는 ‘선물한다’고 큰 소리로 자랑하는 모습이 필수적입니다. 그러나 사기꾼은 선물을 주는 대신 오히려 귀한 재물이나 생명을 빼앗기에 분별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이런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만, 그리스도인들인 우리는 특히 주의해야 합니다. 이는 세상 사람들은 은연 중이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자처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주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더구나 우리가 세상에 전하는 복음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관한 것으로, 우리의 구체적인 실천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입으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전하면서, 복음에 합당하게 살지 못하면 ‘비 없는 구름과 바람’이라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사랑 가운데 참된 것을 행할 수 있게 하시는 성령님의 능력을 받도록 기도하는 것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7:7).
잠언25:15절
“오래 참으면 관원도 설득할 수 있나니 부드러운 혀는 뼈를 꺾느니라”
15절은 1-14절의 결론적 구절로서, 궁중 관리에게 ‘온유함’이란 미덕을 교훈합니다. ‘관원’은 재판관이나 왕궁에 있는 고위 관료를 의미합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권력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어, 권력자들은 아랫사람을 무시하는 등 고압적인 자세를 갖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이들로부터 의도한 대로의 선한 결과를 얻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나, 그렇다 하더라도 온유한 모습으로 끝까지 부드러움을 잃지 않으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음을 가르칩니다. 많은 갈등이 내재된 통일 왕국 이스라엘을 이끌었던 솔로몬 왕의 잠언임을 감안 하건데, 본절은 단지 수사학적 표현이 아니라, 그의 실제 경험이 우러나온 이야기로 보입니다. 그러나, 본잠언이 주님과의 관계에서도 적용된 사례가 성경에 나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주님에게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않다’는 차갑고 모욕적인 말을 듣자, 오히려 인내와 겸손, 온유함을 잃지 않아 큰 은혜와 축복을 받았습니다(마15:21-28). 주님은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다’(마5:5)고 하신 뒤, 검을 들고 싸우지 않고 친히 십자가를 지심으로 온 우주를 상속받으셨습니다. 한편, 온유함의 원동력은 사랑입니다. 아들을 주신 하나님의 그 사랑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을 통해 우리에게 부어졌습니다(롬5:5). 당연히 그리스도인들은 온유하신 그리스도를 섬기려 노력하고, 그 결과 온유함은 그리스도인의 품성 중 하나로 자리잡습니다(갈5:21,22). 이같이 그리스도인의 능력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기 위한 온유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잠언15:1)
잠언25:16절
“너는 꿀을 보거든 족하리만큼 먹으라 과식함으로 토할까 두려우니라”
16-27절은 일상의 인간관계의 갈등 소재로 한 단락을 이룹니다 봉투의 윗면과 밑면을 접고 편지를 그 안에 집어 넣는 것 같이, ‘꿀’을 소재로 하여 16절(윗면)은 시작하고, 27절(밑면)은 마감하여 편지(16-27절)를 완성합니다. 그 중 16-17절은 좋은 것이라도 과하면 나쁜 결과가 생긴다는 교훈으로, 16절은 꿀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 17절은 이웃과의 관계에 적용합니다. ‘꿀’은 신이 내린 완전식품이라 할 정도로 몸에 좋지만, 과식하면 토하므로 적당히 먹어야 합니다. 토하는 이유는 꿀의 짙은 단맛과 함께 고도로 농축된 영양성분 때문이라고 합니다. 본절에 등장하는 ‘꿀’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상징합니다. ‘꿀’과 같이 이 세상의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하더라도 지나치면 해가 되기에 절제의 미덕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돈이 그러하고 권력이 그러하며 명예 또한 그러합니다. “만족할 줄 알면 욕을 당하지 않고 멈출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知足不辱 知止不殆)”는 말처럼, 인격만큼 소유하고, 권력과 명예를 갖는 것이 실패를 방지하는 묘책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이 설정해 두신 한계를 넘어 선악과에 손을 댄 아담과 하와의 후손이라, 탐욕이 삶의 본질을 이루고 있고, 우리의 힘으로 이 탐욕을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이 비극의 현주소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에서 그 방법을 제시합니다: “성령님을 따라 행하라!”(갈5:16). 그러면, 성령께서 아홉 가지 열매를 맺게 하시는데, 그 마지막이 절제라는 열매로서 그 안에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사람을 살리는 과즙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
잠언25:17절
“너는 이웃집에 자주 다니지 말라 그가 너를 싫어하며 미워할까 두려우니라”
17절은 이웃과의 관계를 다루나, 교훈의 의도는 16절과 다르지 않습니다. ‘꿀’이 몸에 좋아 적당히 먹는 것은 좋지만, 과식하면 해가 되듯이, 이웃집을 왕래하면서 좋은 관계를 맺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지나치면 나타나는 부정적인 결과를 주의해야 합니다. 본절의 ‘이웃’에 해당하는 원어 ‘레에카’는 ‘친구’ ‘형제’라는 뜻도 들어 있어 가까운 관계에 있는 모든 사람을 포괄합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로서, 다른 사람과 다양한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야만 합니다. 따라서, 그 가운데서 얼마나 지혜롭고 합당하게 처신하느냐는 인생의 승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때, 우정은 그 한 요소로서, 타인의 사생활을 침해하지 않고 적절한 거리를 두는 분별력은 필수적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 우정은 소원해지고 더 나아가 미움의 관계로 변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본잠언은 ‘지나치지 말아라’는 절제를 가르쳐,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우정, 사랑, 우애 등은 지속되고, 갈등과 반목은 제거되는 삶의 지혜를 주고 있습니다. “익숙함은 경멸을 키우고, 사흘이 지나면 썩는 생선같이 손님도 그렇다”는 말이 알려주듯이, 경험을 통해 ‘이웃의 허용 한계’를 배워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경우는 단순히 이웃의 감정만을 살피며 수동적으로 관계를 이어갈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이웃의 아픔을 치유하고 주님께 인도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상황에 맞는 합당한 말과 처신을 하면서, 이웃을 도와 그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게 하는 충성스러운 섬김이 필요합니다.”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니라” (잠언2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