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3/7/31-8/4)

잠언24:28
너는 까닭 없이  이웃을 쳐서 증인이 되지 말며 입술로 속이지 말지니라

28절은 위증과 거짓말에 대해 경계하는데 재판정이 그 배경입니다. ‘까닭없이’의 원어 ‘힌남’은 ‘무고히, 정당성 없이’란 의미로 아무 근거없이 무죄한 자를 해치는 그릇된 태도를 말합니다. 따라서, 거짓된 증언, 정당성 없는 증언을 금지하는 말로써, 26절(적당한 말로 대답하라)이 공정한 재판을 위해 긍정문으로 권면하였다면, 본절은 부정문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위증과 관련하여 모세율법은 분명히 규정합니다: 정직한 증언 의무는 레위기5:1절, 위증 금지는 출애굽기20:16(십계명 중 9번째 계명)에서 규정하고,  신명기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거짓으로 모함’할 경우 모해목적을 따라  처벌하도록 규 정합니다 (신19:18,19). 본 잠언은 단순 위증이 아니라 상대방을 해할 목적으로 사적인 이해 관계나 원한 때문에 재판석상에서 거짓 증언을 하는 것을 말하기에 신명기의 규정이 적용되어야 할 것입니다 (모해위증죄). 대한민국의 형법 역시 위증죄를 단순위증죄, 모해위증죄, 허위감정·통역·번역죄 등 범죄로 규정 하여 처벌합니다(형법152-154조). 다만, 형법상 위증죄는  법률에 의하여 선서한 증인에 한하여 성립하는 일종의 신분범이므로, 수사단계에서 선서하지 않은 증인이나 참고인은 이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한편, “네 입술로 속이지 말라”는 후단의 규정은 비단 우리가 공적인 증언뿐 아니라 일상 생활에서도 이웃에 대한 무고한 험담이나 풍설을 퍼뜨리지 말고(출23:1) 사랑 가운데 참된 것들만 말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쳐야 한다는 것을 교훈합니다. “(사랑은)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고전13:5).

잠언24:29
너는 그가 내게 행함 같이 나도 그에게 행하여 그가 행한 대로 사람에게 갚겠다 말하지 말지니라

이솝 우화의 하나입니다. 학에게 초대받은 여우는 자신의 음식이 길다란 유리병에 담겨 있어 먹지 못하고 그만 굶고 돌아왔습니다.그러자 여우는 학을 초대하고, 맛 있는 음식을 접시에 담아 학에게 주었습니다. 학은 먹지 못하고 여우가 먹는 것을 지켜만 보아야 하였습니다. 손해나 모욕을 당한 경우 되갚아주려는 인간의 욕망을 잘 묘사하는 우화입니다. 본 잠언은 이 같은  분노 본능을 참고 상대방에게 선을 행하라는 권면입니다. 그 뿌리는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입니다. 평생 법원을 출입하며 수많은 소송 사건을 지켜 본 변호사는 “인간의 내부에는 뿌리깊은 증오심이 숨어  있어 우리들 대부분은 누군가로부터 피해나 상처를 입을 경우 거의 무의식적으로 분노와 함께 복수의 마음을 품게 마련이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분노와 복수의 심리는 자기가 당한 몇 배를 갚아주어야 마음이 풀리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따라서, 모세율법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레24:20)라는 재판상 동해보복법을 규정하여 국가 형벌권을 제한하면서,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하라”(레19:18)고 규정하였습니다.  “원수를 갚지 말고 원수 갚는 것을 주님께 맡기라” (롬12:19;신32:35) “네 원수가 주리면 먹이라”는 가르침은 여기에 근원이 있습니다. 그러나 쉽지 않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먼저, 우주의 통치자요 재판장이신 주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명령을 지키면금생과 내생에 천부께로부터 상을 받는다는 사실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내일은 본 잠언의 성경적 예를 보겠습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21)

잠언24:29
너는 그가 내게 행함 같이 나도 그에게 행하여 그가 행한 대로 사람에게 갚겠다 말하지 말지니라

통상 사람들은 노력이나 지혜에 초점을 맞추어 삶을 영위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은총을 믿고 계명을 지키며 살아갑니다. 아브라함이 주님의 명령을 따라 하란을 떠나 가나안 땅에 도착하여 남방 땅으로 내려갔을 때, 큰 기근이 닥쳐왔고, 이에 아브라함은 애굽으로 내려가게 됩니다. 그 후 100년이 지나 이삭의 때에 또 다시 대 기근이 덮쳤습니다. 이삭은 필사적으로 물과 목초지를 찾아 그랄을 통해 애굽으로 내려가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냥 가나안 땅에 거하면 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따라 그랄에 거주하자 이삭은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었고, 원주민 블레셋 사람들은 시기하였습니다. 블레셋인들은  아브라함 때 판 모든 우물을 막고, 이삭에게 떠날 것을 통고하였습니다. 이삭은 다투지 않고 그들을 떠나 그랄 골짜기에 거주하면서 우물을 파서 얻었습니다. 건조하여 물이 귀한 그 지역에서 우물은 매우 귀하였기 때문에 그랄 목자들은  우물의 소유권을 다투었습니다. 문제는 우물을 팔 때마다 다투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삭은 다투지 않고 그랄을 떠나 브엘세바로 올라가 우물을 팠고 또 다시 물을 얻습니다. 주님은 이삭에게 다시 나타나 복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순종하는 이삭의 삶을 본 것은 주님만이 아닙니다. 블레셋 족속 역시 이 모든 과정을 지켜 본 뒤,  왕 아비멜렉은 이삭을 찾아와 평화 조약을 맺자고 먼저 제의합니다. 블레셋 족속은 이삭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은총을 목격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는 은총의 방식입니다. “겸손한 사람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받을 보상은 재산과 영예와 장수이다.”(잠언22:4 새번역)

잠언24:30-34
게으른 사람의 밭과 지각이 없는 사람의 포도원을 내가 지나가면서 보았더니, 거기에는 가시덤불이 널려 있고, 엉겅퀴가 지면을 덮었으며, 돌담이 무너져 있었다. 나는 이것을 보고 마음 깊이 생각하고, 교훈을 얻었다.”조금만 자야지, 조금만 눈을 붙여야지, 조금만 팔을 베고 누워 있어야지하면, 가난이 강도처럼 들이닥치고, 빈곤이 방패로 무장한 용사처럼 달려들 것이다.”(새번역)

이 구절은 게으론 자에 대한 풍자로서, 6:10-11절의 반복입니다. 가장 어리석은 자 중 하나가 게으른 사람입니다. 밭 일은 고되기에, 게으른 자는 일하지 않으려고  ‘거리에 사자가 있다’는 등 많은 핑계거리를 댑니다. 그러나  게으름을 방치하면 개인과 공동체는 모두 가난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본 잠언이 상징하는 게으른 자는 농부입니다. 현자가 지나가다 보니 그 농부는 게을러 밭을 돌보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의 밭과 포도원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로 뒤덮혀  농작물은 자라나지 못하였고, 둘러싼 돌담 역시 무너졌습니다. 교훈은 단순하고 분명합니다. 자신의 일에 게으른 사람은 수확할 것이 없어 가난해질 것입니다.현자는 이를 예기치 않게  쳐들어 오는 강도나 군대에 수탈당한 것에 비유하여 효과를 극대화합니다. 한편, 본잠언의 농부는 나태로 인해 열매맺지 못한 모든 사람의 본보기입니다.  우리 역시 역시 물려 받은 유산이나 선택한 직업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등 일하지 않을 여러 핑계가 생겨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경외하여 감사와 겸손의 태도를 갖추고  자기 일과 위치에 충실하면 이삭처럼 주님의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잠언25:1,2
이것도 솔로몬의 잠언이요 유다  히스기야의 신하들이 편집한 것이니라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

25:1절은 잠언의 5번째 표제(1:1;10:1;22:17-21;24:23)로서, 이하 29:27절까지  솔로몬의 잠언을 유다 왕 히스기야(BC 715-687) 시대에 편집하였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솔로몬과 히스기야는 약 250년의 차이가 있고, 히스기야는 경건한 왕으로서 후손들을 위해 편집한 것 같습니다. 2절에 따르면, 하나님은 왕과 숨바꼭질 놀이를 합니다. 하나님은 무엇인가를 숨겨 놓으시고(섭리), 왕들은 그것을 찾아내려고 애를 쓰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헤아리기 힘든  신비스러운 방식으로 당신의 뜻을 성취해 가시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감옥에 있을 때 하나님은 바로에게 꿈을 통해 수수께끼를 내주시고, 바로와 그 신하들은 이를 풀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합니다. 마침내 답을 찾았는데 그것은 감옥에 있는 요셉이었습니다. 만약  요셉이란 수수께끼의 답을 얻지 못하였다면 애굽은 기근으로 멸망당하였을 것입니다. 이렇게  왕(지도자)은 하나님의 섭리를 연구해서 알아내야만 할 책무가 있습니다. 성경학자 클립포드의 말입니다: “하나님의 세상은 평범한 사람들의 능력을 넘는 수수께끼와 퍼즐로 가득차 있지만, 왕은 그것들을 풀고 백성을 이끌어 하나님을 섬기게 하여야 한다.” 왕이 그 섭리를 깨닫게 되면- 오늘날로 말하면 바른 정책을 수립하면 –  백성들이 잘 살고 하나님과 왕(지도자)은 높이 존경받게 됩니다. 이는 우리로 지도자들 위해 기도하도록 합니다. “왕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하십시오. 그것은 우리가 경건하고 품위 있게, 조용하고 평화로운 생활을 하기 위함입니다” (딤전2:2,새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