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3/7/24-29)

잠언24:19,20
너는 행악자들로 말미암아 분을 품지 말며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라 대저 행악자는 장래가 없겠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리라

 현자는 서른 가지 가르침 가운데 ‘악인을 부러워 하지 말라’고 벌 써 두 번이나 교훈하였고(23:17-18;24:1-2), 본 구절은 세 번째입니다. 그 이유는 경건치 못한 악인들의 번영을 목격할 때 심한 갈등을 지혜자/의인에게 주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불공평 하다’는 감정으로 가득찹니다. 더구나, 의롭게 살며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자부심 하나로 버티던 자신은 병들고 여러 고난을 받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욥이며, 욥기는 의인의 고난의 문제를  잘 논합니다. 한편, 잠언 23:17-18절에서는 “주님을 경외하는 너에게 장래가 있다”, 24:1-2에서는 악인의 악한 성품을 생각할 때 그의 번영은 악취가 나는 쓰레기와 같다는 취지를, 본 구절에서는 ‘악인은 장래가 없다’고 선언하여 잠언의 제자로 하여금 질투와 불평을 버리고 신실하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길로 가도록 격려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장래’의 뜻은 무엇이겠습니까? 잠언22:4절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상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다”와 디모데전서4:8절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다”를 함께 생각할 때,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 주어지는 축복된 미래입니다. 그 반면 악인의 등불은 꺼질 것입니다. 등불이란 ‘생명’ ‘복된 삶’ ‘번영’을 뜻하는데, 등불이 꺼진다는 말은 생명이 다하거나 몰락한다는 의미입니다. 현명한 인생투자자인 그리스도인들은 미래가 없는 길로 가지 않습니다.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약5:13).

잠언24:21,22
아들아 여호와와 왕을 경외하고 반역자와 더불어 사귀지 말라 대저 그들의 재앙은 속히 임하리니 둘의 멸망을 누가 알랴

우주와 사회에 형성된 권력 구조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올바르게 파악해야 성공적인 삶을 가질 수 있습니다. ‘주님(여호와)’과 ‘왕’은 이의 전형적인 권력입니다. 인간의 모든 권력은 다 하나님이 정하신 바입니다(롬13:1). 그러므로 잠언의 제자들은 인간의 통치 권력들을 존경해야 하며, 특히 그 권력들이 인사권이나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을 때 더욱 그러해야 합니다. 물론, 잠언이 전제하는 왕은 하나님의 주권과 왕권이 반영된 경건한 왕을 말합니다만, 악한 통치자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열왕기가 이 주제를 다루며 그들의 운명을 알려줍니다. 아합 왕은 나봇의 좋은 포도원을 탐내는 중, 왕비 이세벨은 그 성읍 장로들에게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는 거짓 증언을 근거로 처형하라고 명합니다. 나봇이 죽자 아합은 그 포도원을 접수하였습니다. 이들은 악한 통치자들입니다. 우주의 최고 권력자이신 주님은 당신의 종 엘리야를 보내사 아합과 이세벨의 멸망을 선언하셨습니다. 두려움에 아합 왕은 풀이 죽어 다녔으며, 주님은 그의 겸비함을 보시고 그가 죽은 다음에 재앙을 내리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윽고 주님은 아합을 전쟁터로 이끌어내사 죽이시고, 선지자 엘리사를 통해 군대장관 예후에게 기름을부어 왕으로 세우고 아합 가문을 멸망시켰습니다 (아합의 손자 때). 성경의 탁월한 점은 인간 세상 배후에 일어나는 하나님의 일을 분명하게 기술한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상을 보는 눈을 하나 더 준다 하겠습니다. “왕의 마음은 흐르는 물줄기 같아서 주님의 손 안에 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왕을 이끄신다” (잠언21:1,새번역)

잠언24:23-25
“23이것도 지혜로운 자들의 말씀이라 재판할 때에 낯을 보아 주는 것이 옳지 못하니라24악인에게 네가 옳다 하는 자는 백성에게 저주를 받을 것이요 국민에게 미움을 받으려니와 25오직 그를 견책하는 자는 기쁨을 얻을 것이요 좋은 복을 받으리라

잠언은 현자의 30개의 교훈에 이어 재판과 경제생활에 관한 실제적 권면을 주는 6개의 추가적 교훈 (24:23-34)을 기록합니다. 23절은 재판의 공정성을 강조하는 일반적 교훈입니다. ‘낯을 보아 주다’의 원어는 ‘학케르’로서 ‘관심을 가지다’의 뜻입니다. 이는 호감의 어감을 전달하며, 재판 시 편파적 태도와 관련되어 이해할 수 있습니다.  24절은 잘못된 판결을 내리는 구체적 장면을 직접 인용의 방식으로 묘사합니다. 모세율법은 재판장에게 “의인은 의롭다하고 악인은 정죄하라”(신25:1)고 요구합니다. 만약 이 규정에 위반한다면, 큰 재판장이신 주님의 미움을 받을 것이고(잠17:15), 사회적으로도 비난받게 될 것입니다(24). 그러나, 인간은 ‘공정하라’는 이 말씀 하나를 지키지 못하는 연약하고 부정직한 존재입니다. 정직을 외치는 자들일수록 더욱 불공정하게 사건을 처리하는 것을 보면 참담합니다. 그러므로, 민주주의는 사람을 믿지 않고 시스템을 만들어 제도적으로 공정이 실현되도록 장치합니다. 삼권분립이 그 좋은 예로서, 효율성과 이상을 강조하는 공산주의와 권위주의 정권이 도저히 갖지 못한 탁월한 제도입니다. 25절은 정의로운 판결은 보편적인 인정을 받으며, 그것은 궁극적으로 자신에게도 유익이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시비를 분별함에 있어 본 잠언을 우리 마음에 꼭 담아두어야 합니다.악인을 의롭다고 하거나, 의인을 악하다고 하는 것은, 주님께서 싫어하신다.” (잠언17:15,새번역)

잠언24:26
적당한 말로 대답함은 입맞춤과 같으니라

본 구절은 잠언에서 통상 가르치는 교훈을 반복합니다: “진리는 옳을 뿐아니라 유익하다”(12:17, 19; 14:25). ‘적당한’의 원어는 ‘곧다, 바르다, 옳다’ 등의 의미를 갖습니다. 따라서, ‘적당한 말로 대답한다’는 것은 친분이나 이해 관계에 치우침 없이 법과 원칙에 따라 정당하게  판결함을 가리킵니다. ‘입맞춤’이란 근동지역에서 신뢰, 애정, 두려움과 복종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정당한 재판을 할 경우 사람들로부터 사랑과 존경 받음을 의미하나, 지혜를 갖고 경우에 합당한 말을 한다면 모두 존경과 사랑을 받을 것이기에 본 잠언을 단순히 재판의 경우에만 국한시킬 수는 없습니다. 다만, 본 절의 ‘적당한 말’은 ‘사랑 가운데 참된 것을 말함’을 전제해야 합니다. 그러나, 연약하고 분별력이 부족한 우리들이 친분과 이해관계에 완전히 벗어나서 참된 것을 말하기는 쉬운 일 아니며, 더구나 복잡하게 얽힌 문제들을 지혜롭게 풀어 낸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이때 사람들은 인간적인 수단이나 거짓된 방법까지 동원하여 문제를 해결하거나 사랑과 존경을 얻으려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혜를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과(약1:5), 재물이나 권세 등 이 세상의 것들 중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27:24), 사랑 가운데 참된 것을 말하고 행할 수 있습니다(엡4:15). 만약 중요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반드시  느헤미야와 같이 먼저 하나님께 묵도하신 후 대답하거나 일을 처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온 이스라엘이 왕이 심리하여 판결함을 듣고 왕을 두려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지혜가 그의 속에 있어 판결함을 봄이더라” (왕상3:28).

잠언24:27
일을 밖에서 다스리며 너를 위하여 밭에서 준비하고 후에 집을 세울지니라

본절은 우리의 ‘상식’을 확인해 주는 교훈으로, 인간의 부패성 때문에 강조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인간은 세상을 지으신 주님을 떠나, 자신의 욕망을 신으로 삼았기에 분별력이 흐려졌습니다. 그러나 ‘상식’속에 내포된 하나님의 뜻을 위반하여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거나 헛된 꿈을 쫓게 되면, 불행한 삶을 갖게 마련입니디. ‘밖에서 다스린다’는 것은 일터나 인간 관계 등 사회 활동을 의미합니다. ‘밭에서 준비한다’는 것은 농사일에 충실하여 경제적인 준비를 갖추어, 소득의 원천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이 교훈은 당시 결혼 풍습에 따라 신랑이 신부의 가족에게 줄 지참금을 준비하기 위해 많은 돈이 필요했음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집을 세운다’는 것은 결혼하여 가정을 일으킨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본절은 경제적, 사회적으로 필요한 모든 여건을 갖춘 후에 결혼하여 가정을 세우라는 교훈입니다. 역으로 말하면, 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결혼을 미루어야 하는데, 준비 없는 결혼은 어렵고 고생스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절의 말씀은 단지 결혼뿐만 아니라 사업이나 정치 등 인생의 모든 중요한 활동을 위해서는, 먼저 충실히 준비한 후에 시작하라는 메시지로 확장되어 읽혀야  합니다. ‘욕속부달(欲速不達)’ 이란 말이 있듯이, 준비 없이 욕심만 내면 결코 일을 성취할 수 없고 오히려 수치의 자리에 이르게 됩니다. 끝으로 와이브레이의 말을 인용합니다. 적절한 준비 없이 성급하게 어떤 일도 시작하지 말아라!” “너희 중의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눅14: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