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3/7/17-21)

잠언24:14
지혜가  영혼에게 이와 같은 줄을 알라 이것을 얻으면 정녕히 장래가 있겠고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13-14절은 ‘꿀’의 단 맛과 유익에 비유하여 그 보다 훨씬 더 유익한 지혜를 얻으라는 교훈입니다. 현자가 생각하는 지혜의 유익은 ‘확실한 장래’와 ‘끊어지지 않는 소망’입니다. 옳습니다. 먼저, 부모는 확실한 장래를 위해  자녀들을 공부시키려고 합니다. ‘맹모삼천지교’라는 고사도 있지만, 조선 명종 때의 명필 한석봉의 어머니도 그에 못지 않았습니다.  외아들 석봉의 장래를 위해 홀로 떡장수를 하며 10년 동안 공부시켰고,  명필의 반열에 오르게 합니다. 그러나, 지혜의 또 하나의 유익은 사망에서 지켜준다는 점입니다(전7:12). 그러므로 지혜는 소망이 끊어지지 않게 합니다. 이 가르침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그 완전한 성취를 보게 됩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지혜’이시며(고전1:30),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골2:3) 있기 때문입니다. 실로, 복음은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 가는 지혜가 되고, 내세에서는 심판을 면하고 영생을 갖게 합니다. 참된 지혜를 얻은 자는  두 가지 특성을 갖습니다. 하나는 주님을 경외하여 악에서 떠나고, 둘째는  자신의 무지를 깨달아 겸손한 태도를 갖는 것입니다. 우리 세상은 정말 복잡하여,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 인간이 알 수 있는 최고의 지혜라 할 수 있습니다(소크라테스). 그렇다고, 사람이 노력할 수 있는 세계에 운명을 끌어들이면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세상은 대체로 실력대로 가고 있어서,   우리의 삶을 운명의 탓으로 돌릴 수 있을 때는 최선을 다해 본 뒤의 일입니다. ”선한 말은 꿀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되느니라”(잠언16:24).

잠언24:15,16절
“악한 자여 의인의 집을 엿보지 말며 그가 쉬는 처소를 헐지 말지니라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

15절은 의인에게 쓸 데 없는 짓 하지 말라는 악인에 대한 경고이지만, 듣는 자는 실제로 현자의 제자입니다. 따라서 본 잠언은 악인의 공격이 있을지라도 용기를 가지라는 격려로도, 혹은 악인처럼 행하지 말라는 경고로도 이해될 수 있습니다(쉬운성경). 16절은 15절의 근거로써, 경건한 자의 믿음과 확신을 선언합니다. ‘대저-for’는 15절의 ‘훈계’와 16절의 ‘확증’ 사이의 관련을 말하는데, ‘의인’과 ‘악인’이라는 단어가 이런 관계의 존재를 뚜렷하게 합니다. 한편, 15절에 나오는 이중의 금지 – ‘엿보지 말며, 헐지 말라’ -는  들판에서 이루어지는 목축업이 그 배경이며, 16절의 – ‘넘어진다, 일어난다’-는 여행 중에 발생하는 사건으로 악인의 실패와 의인의 승리를 생동감 있게 전달하고 있고, ‘일곱 번’이란 완전함을 뜻하는 상징으로, 본 잠언에서 선포하는 승리의 메시지를 강조합니다. 결론적으로, 15-16절은 악한 자가 의인을 멸망시키고 약탈하려 할지라도, 결국 성공하지 못하며, 의인은 실패를 딛고 종국적으로 승리한다는 메시지입니다. 최후의 승리야말로 의인의 ‘끊어지지 않는 소망’(14절)의 근거이며,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이의 참됨을 증언하는 바입니다(히11장). 그들의 승리의 비결은 이 세상의 도덕적 질서 배후에 계시는 주님을 신뢰하고, 용기 있게 살아간 것이며, 우리의 귀감입니다. 내일은 성서의 예를 보겠습니다. “여섯 가지 환난에서 너를 구원하시며 일곱 가지 환난이라도 그 재앙이 네게 미치지 않게 하시며” (욥5:19).

잠언24:16절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

본 잠언의 가장 훌륭한 예 중 하나로 요셉이 있는 바,  그는  7 중 시련을 겪습니다. (시련1- 배신) 요셉은 질투하는 형제들에 의해  미디안 사람들(아브라함의 첩 그두라의 아들)을 거쳐 애굽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노예로 팔립니다. (시련2- 노예) 혹독한 노예 생활 중 요셉은 주인을 신실하게 섬겼고, 가정총무로 승격됩니다. (시련3-유혹) 주인의 아내는 요셉을 계속 유혹하나 경건한 요셉은 냉정하게 거절합니다. (시련4-모함) 결국 요셉은 주인의 아내에 의해 모함받고 죄인으로 감옥에 갇힙니다. (시련5-감옥) 요셉은 신실하게 간수장을 섬겼고, 감옥 사무 전반을 돌보는 권한을 받습니다. (시련6-망각) 이때 파라오의 술 관원장과 떡 관원장이 감옥에 들어와 각각 꿈을 꾸게 됩니다. 그들의 꿈을 요셉은 정확하게 해몽하면서, 술 관원장에게 전직을 회복하면 자신을 기억해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러나 출감한  술 관원장은 요셉을 잊어버립니다. (시련7-절망) 그러나 요셉의 신실한 삶은 여전하였습니다. 2년이 지나자 파라오의 꿈을 해몽하고 일약 총리로 발탁되어 애굽 백성들과 자신을 판 형제들의 삶을 기근에서 보존해 줍니다. 요셉은 7중의 시련을 모두 승리하였으며, 그 비결은 두 가지입니다: 신실함과 주님의 축복. 요셉의 신실함은 주님에 대한 두려움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간직한 것에 기인합니다(시105:17-22). 또한, 요셉의 신실한 믿음을 보신 주님은 형통과 지혜라는 상을 주셨습니다. 요셉의 삶은 정말 우리에게 귀감이 됩니다.“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눅8:15).

잠언24:17-18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 여호와께서 이것을 보시고 기뻐하지 아니하사 그의 진노를 그에게서 옮기실까 두려우니라

16절 후단은 ‘악인은 재앙을 당하면 엎드러진다’고 선언하는데, 17절은 그런 모습을 기뻐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18절은 주님의 거룩한 정서를 이유로 제시합니다. 즉,  현자는 의인이 원수의 벌을 보고 즐거워 하면, 주님을 불쾌하게 만들 것이며, 그 결과 심판은 중지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본 잠언이 원수가 재앙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원수에 대한 심판을 즐거워 하지 말라는 메시지로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그 대신 ‘주님을 경외하라’는 심오한 계명이 그 배후에  있어 이 같이 교훈한 것입니다. 우리는 악인의 불행을 기뻐하지 않는 마음과 악의적인 마음을 동시에 갖지 못하지만, 주님을 두려워하여 원수에 대한 심판을 경건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는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심판에 직면했을 때 보여준 아브라함의 태도는 그 좋은 예입니다. 그는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여 의인 10명을 전제로 심판 보류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소돔과 고모라 전체 지역이 심판받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침묵하였습니다. “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하는 일이니, 내가 갚는다”(신32:25)는 말씀과 같이 복수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심판을 주님 손에 맡겨놓고 그분을 경외하여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이에 반하여 애굽의 군대가 홍해에서 멸망당할 때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심히 기뻐하였습니다. 어떻게 된 것이겠습니까? 내일은 이 부분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음식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게 하라”(잠언25:21).

잠언24:17-18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여호와께서…. 기뻐하지 아니하사 그의 진노를 그에게서 옮기실까 두려우니라

본 잠언은 원수의 멸망을 즐거워하지 말 것을 교훈하며, 심판의 중단 가능성을 그 이유로 들었습니다. 잠언은 또한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음식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게 하라”(잠언25:21)고 가르쳐, 원수의 불행을 틈타 멸망시키지 말고, 그들의 회개를 촉진하도록 행동하라 권유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대적이 넘어질 때 ‘관용과 선의’를 베풀어야 합니다. 이는 가장 높은 경지의 삶으로 그리스도의 희생을 듣지 못한 자들이 갈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다만,  홍해에서 애굽의 군대가 멸망할 때와 같은 경우에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심히 기뻐한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가 확립되고 그분의 뜻이 성취됨을 공동체 차원에서기뻐한 것이지 애굽 병사 개개인의 멸망을 즐거워 한 것은 아닙니다. 실로, 파라오는 어리석어 하나님의 엄청난 능력을 경험하고도 육체의 힘을 믿고 홍해까지 따라온 분별력 없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상황을 감안하지 않고 본 잠언을 적용할 경우 지혜롭지 못한 결과가 초래될 수도 있습니다. 성경의 예가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고 그토록 추적한 사울을 두 번이나 놓아주고, 결국 블레셋의 손이 죽었을 때 애가를 지어 불렀으나(삼하1:17-27), 갈멜의 부자 나발의 모욕을 받자 나발과 그에게 속한 모든 자를 죽이려고 군사를 이끌고 올라갔습니다. 그 차이는 사울은 기름 부음 받은 왕이지만, 나발은 일개 평민으로 차기 왕 다윗 자신을 존중해야 할 의무를 잊었기 때문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