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3/7/10-14)

잠언24:10
네가 만일 환난 날에 낙담하면 힘이 미약함을 보임이니라

본절은 11-12절과 연관 때문에 여러 해석이 제기되지만, 본질적 메시지는 ‘역경 중에 낙심하지 말고 용기를 내라’는 의미입니다. 시련은 믿음과 인격을 시험하는 리트머스 용지로서, 이를 통과해야 믿음과 인격, 지혜의 진정성 여부를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의 모든 사람이 ‘역경’이란 시험을 치뤘고, 이를 근거로 그의 삶을 평가한 성경 기자의 기록은 흥미롭습니다. 실패한 대표적인 사람은 북이스라엘 왕국을 연 여로보암입니다. 주님은 선지자 아히야를 통해 ‘ 만일 내 종 다윗 같이 내 율례와 명령을 지키면 이스라엘을 네게 주리라’는 약속하셨지만, 왕이 되어 보니 백성들이 예배하러  남유대 왕국에 있는 예루살렘의 성전으로 가는 것을 보고 두려움이 앞서 황금송아지 종교를 창안합니다. 그 반면, 유다 왕 히스기야는 앗시리아 왕 산헤립이 라기스 성을 함락하고 랍사게를 보내는 등 큰 위협에도, 낙심하지 않고 이사야와 함께 주님의 도우심을 기도하자, 그 밤에 앗시리아의 군대 18만 5천 명이 주의 천사에 의해 죽임을 당합니다(왕하19:35). 이렇게 역경을 믿음으로 이긴 히스기야도, 바벨론에서 사신이 오자, 왕궁의 모든 것을 내보이며 부와 힘을 자랑하고 주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자, 이사야는 유다의 멸망을 예언합니다. ‘역경’ 보다 ‘교만’이 더 무서운 시험 같습니다. 한편, 신약에는 ‘환난’이 오면 오히려 기뻐하라고 가르칩니다. 역경이 주는 유익성 때문입니다. 따라서 역경은 ‘시험’과 ‘유익’ 양면이 있음을 숙지하고, 역경을 이길 지혜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1:5).

잠언24:11,12
너는 사망으로 끌려가는 자를 건져 주며 살륙을 당하게 자를 구원하지 아니하려고 하지 말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하였노라 할지라도 마음을 저울질 하시는 이가 어찌 통찰하지 못하시겠으며  영혼을 지키시는 이가 어찌 알지 못하시겠느냐 그가 사람의 행위대로 보응하시리라

본 잠언은 제자들에게 위급한 상황에 처한 사람을 보면 적극적으로 행동하여 건져줄 책임을 강조합니다. 11절은 ‘건져 주라’와 ‘인색하지 말아라’는 긍정과 부정 명령문을 함께 사용하여 구명의무를 강조하며, 12절은 재판장이신 주님을 상기시킴으로 제자들이 망설임 없이 책임을 다하도록 동기유인을 제공합니다. 에스더서에 좋은 예가 있습니다. 에스더를 황후로 세운 모르드개는 대궐 문에서 업무를 보는 직책에 임명됩니다. 그때 함무다다의 아들 하만이 높은 지위에 올랐고, 모르드개는 유대인으로서 대궐을 출입하는 하만의 행차에 절하지도 무릎을 꿇지도 않았습니다. 모르드개의 행태가 하만에게 보고되자, 분노한 하만은 모르드개 뿐만 아니라 유대민족 전체를 죽이고 하였습니다. 다급해진 모르드개는 황후 에스더에게 도움을 요청하나 에스더는 왕의 규정을 내세우며 머뭇거립니다. 그때, 모르드개는 “네가 왕궁에 있다고 모른 채 하면 유대민족은 다른 방법으로 구원 받겠지만, 너와 네 아비집은 멸망당할 것이다”라고 한뒤,“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 그러자  에스더는  금식한 뒤 목숨 걸고 유대인들과 모르드개를 구명하는 일에 착수하고, 주님은 모르드개의 숨겨진 선행을 발판으로 하만의 음모를 뒤집어 엎습니다. 내일은 ‘백인이유아이사’ 라는 고사와 함께 본잠언을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약4:17)

잠언24:11,12
너는 사망으로 끌려가는 자를 건져 주며 ……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하였노라 할지라도 마음을 저울질 하시는 이가 어찌 통찰하지 못하시겠으며….그가 사람의 행위대로 보응하시리라

동진 원제 사마예 때의 승상은 왕도였습니다. 그런데 왕도의 사촌형인 진동대 장군 왕돈이 군사를 일으켜 궁궐을 향해 진격해 오자, 황제는 왕도를 의심하였습니다. 왕도는 크게 놀라 친족과 함께 적과 통정한 바 없음을 읍소합니다. 당시 상서 벼슬이었던 주백인은 왕도의 구명요청을 무시하고 그냥 입궐하나, 입궐 후 황제에게 왕도의 무죄함을 진언하였습니다. 퇴궐 시 왕도는 백인을 불렀지만, 그는 오히려 무지막지한 말을 내뱉고는 떠납니다. 그러나 집에 가서 또 상소문을 올려 왕도를 구하나, 왕도는 이런 사정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한편, 황제는 왕돈과 화해를 하고 왕돈은 자신의 적들을 죽인 다음 철수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왕돈은 백인을 처리하기 위해 왕도에게 묻습니다: “그는 우리의 친구인가, 적인가?”  왕도가 답변을 머뭇거리자 왕돈은 그를 죽였습니다. 그 후 왕도는 우연히 백인의 상소문을 읽고, 모든 것을 알게 됩니다. 왕도는 통곡하며: “ 비록 내가 직접 백인을 죽인 것은 아니지만 그는 나 때문에 죽었도다” (백인유아이사(伯仁由我而死)). 왕도의 인간성을 보게 됩니다. 실학자 홍대용은  “왕도는 자신이 백인을 죽이지 않았다고 하는데, 왕돈의 물음에 답하지 않은 것은 간사한 사람처럼 남의 손을 빌려 죽이는 방법이다”는 평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심판을 생각할 때  우리의 행위가 중요하지 삶과 죽음 자체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일은 선교사 하퍼의 마지막 순간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 (전도서12:14)

잠언24:11,12절
“너는 사망으로 끌려가는 자를 건져 주며 ……그가 각 사람의 행위대로 보응하시리라”

본절의 ‘사망으로 끌려가는 자’ 속에는 세상적 측면은 물론, 하나님과의 관계를 뜻하는 영적인 측면도 포함되어야 합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이름 아니면 구원받을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스코틀랜드의 전도자 하퍼는 시카고에 있는 무디 교회에 설교 청빙을 받고 대서양을 항해하던 중, 그가 탄 배가 빙산에 부딪쳐 가라앉기 시작하였습니다. 승객 중 얼마는 구명정에 옮겨 탈 수 있었지만 하퍼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차가운 대서양의 바다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이 물 위에 떠 있으려고 필사적으로 몸부림치고 있는 동안 하퍼는 주위를 헤엄쳐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아느냐고 묻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하퍼는 부서진 나무 조각 하나에 매달려 있는 한 남자에게 다가가 예수님을 영접하라고 간절히 전도하였습니다. 이윽고 하퍼 역시 얼음처럼 차가운 물 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했고, 그 바로 직전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으며, “주 예수를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구원을 얻으리라”는 최후의 말을 남기고 물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4년이 지나 그 여객선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모임에서 한 남자는 자기가 그 날 밤 두 번의 구원을 받았다고 간증 하였습니다. 첫 번째는 하퍼의 전도로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이고, 두 번째는 혹한의 바다에서 구조된 것이었습니다. 바다에 빠져 모두 죽어가는 그 순간에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메시지입니다. 하퍼는 그것을 알고 전도하여 영혼을 구하였는 바, 마치 십자가에 달린 한 강도를 구원하시는 우리 주님의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23:43).

 잠언24:13절
“내 아들아 꿀을 먹으라 이것이 좋으니라 송이꿀을 먹으라 이것이 네 입에 다니라”

 
 ‘꿀’과 ‘지혜’는 유사한 면이 있습니다. ‘꿀’을  먹으면 몸에 양분이 되지만, 지혜를 얻어 ‘깨닫게 되면’ 영혼과 마음에 큰 양분이 됩니다. 또한, ‘꿀’이 육체의 활력을 돕는 것 같이, ‘지혜’는 쇠약한 마음과 육체를 살아나도록 하는 명약으로 단 맛이 그만입니다. 그래서, 현자는 특히 ‘꿀’이 갖는 ‘단 맛’의 특질을 강조합니다. 한편, 맛을 아는 중심은 ‘미각’으로, 꿀이 갖는 단 맛도 미각이 없으면 알 수 없습니다. 이는 생명력의 근원인 ‘네페쉬—생명, 영혼’의 기능을  이해하도록 도움을 줍니다. 지혜는 그 ‘네페쉬’로 알 수 있는 것이지, 미각으로 아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흡수된 꿀과 지혜는 즐거움과 함께 삶을 역동시킵니다. 그러나 “지혜는 꿀이 갖는 달콤한 맛뿐만 아니라, ‘영원한 즐거움’이란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빔의 언급 같이,  ‘지혜’는 ‘꿀’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큰 가치가 있습니다. 따라서,  현자는 13절에 먼저 ‘꿀’이 몸에 유익함을 적어놓고, 이어 ‘꿀’ 보다 훨씬 유익한 ‘지혜’를 얻으라고 가르칩니다(14).  잠언의 제자는 반드시 이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그 지혜는 주님을 경외하는데서 시작됩니다. 아무리 왕이라도 바다를 벌 주고 때려서 순종하게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우리는 “있는 힘껏 노력하고 지혜를 끌어 모아도” 안되는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모든 것을 주님 손에 맡기게 되고, 마음의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벧전5:7). 다음 주에 14절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지혜가 네 영혼에게 이와 같은 줄을 알라 이것을 얻으면 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잠언24: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