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3/6/26-30)

히브리서 11:25절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안중근 의사는, 대한의군 참모중장으로 기습작전을 벌여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지만,  일본은 테러범으로 처형하였습니다. 모세는 민족을 구출하려고 애굽인을 죽였으나, 바로의 입장에서는 반역자입니다. 이렇게 모든 사건은 관점에 따라 차이가 납니다. 성서적 세계관에서 보면 하나님을 무시한 인간의 길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으면 그 또한 믿음의 사람이 아닙니다. 이런 의미에서 느헤미야가 중요합니다. 그는 페르샤 궁중의 술관원이란 고위 직책에  있었을 때, 머나먼 페르샤 변방인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참화를 듣고, 즉각적인 소명을 가졌습니다. 그는 먼저 만유를 주관하시는 주님께 간절한 기도를 드렸는데, 이는 1천년 전 모세의 설교를 모은  신명기의 메시지를 정확히 읽어 냈기 때문입니다. 불순종에 대한 벌은 추방이나,  돌이켜 계명을 지키면 회복해 주신다는 신명기의 약속 대로, 주님은 전 세계로 흩으신 이스라엘 민족을 회복시키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는 이때 예루살렘과 유대민족을 돌보는 일은 하나님의 뜻임을 확신하였습니다. 한편, 유대총독의 직은 많은 반대와 어려움이 예정된 길이었으며, 자신의 출세와도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서적 세계관으로 무장한 느헤미야는 모세와 같이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고난받기를 더 좋아하였습니다.  마음에 모든 계획을 세웠지만 느헤미야는 성급하지 않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면서,  응답의 때가 올 때까지 인내하다가, 때가 왔을 때 주저 없이 행동하였습니다. 우리가 본받아야만 하는 신앙의 자세입니다.  “네가 하는 일을 주님께 맡기면, 계획하는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잠16:3,새번역).

잠언23:29
재난을 맞을 사람이 누구냐? 근심하게 사람이 누구냐? 다투게 사람이 누구냐? 속상해 사람이 누구냐? 애매하게 상처입을 사람이 누구냐? 눈이 충혈된 사람이 누구냐?”(공동번역)

플로리다의 브래든턴에 살던 한 알코올 중독자는 여느 때처럼 술에 취해 운전을 하다 자전거를 탄 소년을 치어 죽이고는 도망쳤습니다. 사고 현장 주변을 수색하던 경찰은 그 차와 주인을 발견하고 집안으로 들어갔을 때, 그 사람은 위스키를 마시고 있었습니다. 더욱 불행한 것은 그가 치어 죽인 소년이 그의 12살된 아들이었습니다. 한편, 물이 귀한 중동지방에서 포도주와 같은 술은 식사와 잔치 때 필수품이었고(요2:1-11), 상처를 치료하는 약품으로도 사용되었기 때문에 (눅10:34;딤전5:23) 술 자체가 금지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일반화된 음주 문화는 자연히 남용되었고, 그로 인한 해악은 너무나 컸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29-35절에서 다채로운 표현으로 아들에게 지나친 음주를 경계합니다.  예를 들어, 29절은 6번이나 불행한 자를 질문하고, 30절은 주인공을 밝힙니다: “술에 잠긴 자’ 혹은 ‘ 혼합한 술을 구하러 다니는 자이다’. 술에 중독된 이들은 신체적 건강을 해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사회적 관계의 파괴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당할 수 있는 모든 문제와 고통에 직면합니다. 그들은 가난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에서도 술과 관련하여 많은 불행이 있었습니다. 이를 목격한 개신교 선교사들은 술과 도박을 아예 금지하였고, 이는 한국교회의 아름다운 전통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실로 술 취함과 믿음 생활은 양립될 수 없습니다. 우리 또한 이 전통을 자녀들에게도 물려주어야만 합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엡5:18)  

잠언24:1
너는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며 그와 함께 있으려고 하지도 말지어다

24:1-2절은 악인의 형통을 선망하고 그들과 교제하려는 태도를 경계합니다.  23:17절에 같은 경고가 등장합니다: 네 마음으로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라.” 다만, 본절과 23:17절의 차이는 동기유인을 제공하는 방법입니다. 본절에서는 악인과 교제조차 나누지 말것을 권고하고,  그 근거로 악인의 못된 마음과 언어를 제시합니다(2). 여기에는 파멸이라는 악인의 운명이 암시되어 있는데, 만약 잠언의 제자가 그들과 교제를 나누다가는 악인처럼 되어 심판 받을 수 있다는 현자의 우려가 깔려 있습니다.  23:17절은 18절과 함께  주님을 경외하면 오히려 네가 형통할 것이므로 악인의 일시적, 외형적 형통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음을 강조합니다. 잠언이 같은 취지의 경고를 이처럼 반복하는 까닭은 세상이 도덕적으로 혼란하기 때문입니다(3:1-12참고). 그러나 만일 악인이 악한 방법으로도 쉽게 부를 쌓지 못한다면, 어떤 사람도 그를 부러워 하거나 그와 교제를 나누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악인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부와 권력에 그토록 집착을 합니다만, 이 세상을 떠나면 그들에게는 아무런 소망도 남지 않습니다. 24:19-20절은 그 점을 지적하여, 악인들의 번영에 안달하지 말고 주님을 기다리라고 교훈합니다. 주님은 지혜와 지식을 주시는 것은 물론(2:6),  생명,부, 재산, 명예, 기타 모든 것을 주시기도 가져가시도 하시는 만유의 주재이십니다. 이를 잊지 않는 것이 잠언의 요체이며, 욥은 고난을 통해 주님의 주권과 자비를 배웠습니다. “겸손한 사람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받을 보상은 재산과 영예와 장수이다.” (잠언22:4,새번역)

잠언24:2
그들의 마음은 폭력을 꾀하고, 그들의 입술은 남을 해칠 말만 하기 때문이다”(새번역)

악인과의 교제조차 금지하는 1절의 이유로, 2절은  악인의 인격과 언어 생활을 지적합니다. 악인은 자신의 이득을 위해 타인의 파멸도 개의치 않으며, 그 마음의 욕망은 언어로 구체화되어 모함,음모,거짓증언 등으로 나타납니다.  이를 알면 모든 사람이 그들을 혐오하여 함께 있기조차 싫어할 것입니다. 더구나 그들의 운명은 확실합니다. 아브라함 링컨의 말입니다:  “모든 사람을 잠시 속일 수는 있.다. 또 일부는 영원히 속일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는 없다.” 악인이 불법을 행하고 속이면서 잠시 형통할 수 있지만 마침내 내려지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의인에게 가장 가혹한 시련은, 자신은 고난을 당하지만,  악인은 형통하는 현실을 목격하는  것입니다. 그때 의인에게는 분노와 시기가 걷잡을 수 없이 몰려오나, 자신의 천박한 명철로는 도저히 주님의 행하심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만약 그가 악인의 멸망과 의인의 궁극적 형통을 깨닫는다면, 시기 질투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시편 73편을 지은 아삽의 경우입니다. 또 하나는 남을 해치려는 악인의 삶  자체를 싫어하기 때문에 그들의 형통도 부러워 하지 않는 것입니다. 본 잠언의 현자입니다. 오래 전 어느 금융회사의 한 팀장(비그리스도인)이 큰 재산을 상속받은 젊은 분을 만나 예금할 것을 권유한 뒤, 돌아와서  “나는 그런 사람 부럽지 않아요”라며 제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하물며 그분이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 하겠습니까? 따라서, 의인은 믿음으로 살아야만 합니다(고후5:7;히11:1). “너의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의뢰하고, 너의 명철을 의지하지 말아라.”(잠언3:5,새번역)

잠언24:3
집은 지혜로 지어지고명철로 튼튼해진다.”(새번역) 24:3-12절은 현자의 30가지 교훈의 네 번째 단락이며, ‘지혜는 역경 중의 힘이다’는 교훈이 주제입니다. 3-4절은 도입구절로서, 부는 약탈(1-2)이 아니라, 지혜로 축적되어야 함을 말합니다. 잠언은 주님께서 세상의 창조 시 ‘지혜, 명철 그리고 지식’을 사용하셨음을 선포한 바 있습니다(3:19,20). 본절에서 같은 ‘지혜,명철 그리고 지식’이 등장하여 집을 세우고 있습니다. 이는 집(가정)과 우주가 유사한 면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물질, 생명체, 그리고 이들을 다스릴 인간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또한, 인간은 우주의 관리자이지만, 인간들 사이에도 아름다운 관계를 세워갈 책임이 주어졌습니다. 부모공경, 결혼, 자녀의 양육 등이 대표적입니다. 그러므로, 본절에서 언급된 ‘집’은 단순히 물질적인 구조만을 뜻하지 않고 우리의 인간관계의 구축도 내포되어 있습니다. 능숙한 건축자가 여러 재료를 사용하여 멋진 집을 건축하듯이, 지혜자는 주어진 상황에서 아름답고 건전한 가족, 친족, 그리고 친구관계를 만들어냅니다. 그의 핵심 기술은 ‘정직’과 ‘사랑’입니다. 따라서, 지혜는 사랑 가운데 바른 것을 말하고 바르게 행하여 공동체를 튼튼히 세워 갈 수 있는 능력이라 할 수 있으며, 그 핵심 능력은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입니다. 한편, 천지창조와 애굽으로부터 구속한 사건이 구약 성도의 경건생활의 근거이지만, 그리스도인들의 경건생활은 천지창조와 당신의 아들을 화목제물로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를 선포한 복음에 근거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