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3/6/12-16)

잠언23:17
“네 마음으로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라”

부모는 자녀가 친구들이나 어른들의 나쁜 롤 모델로 인하여 잘못될까 걱정합니다. 3천년 전 현자 역시 같은 상황을 직시하고 유혹하는 현실을 넘어서서 주님을 경외하는 신실한 믿음을 가지라는 권면을 합니다(17). ‘부러워하지’에 해당되는 히브리어(예칸네)는 ‘질투하다’ ‘열심을 내다’의 뜻으로, 무자한 라헬이 4명의 아들을 낳은 레아를 향해 품은 감정과 같은 매우 격렬한 감정을 묘사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창30:1). 이는 다른 이와 비교하여 갖지 못한 어떤 것을  동경하고 나아가 시기함을 의미합니다. 본문에서, 그 부러움의 대상은 ‘죄인의 형통’입니다.  ‘형통’이란 단어는 번역자가 삽입한 것으로, 원문의 직역은 ‘죄인들을 부러워하지 말라’는 내용입니다. 실로, 악인들의 불법적 이익은 부러워할 대상은 결코 아닙니다. 그 대신 우리들에게는 항상 주님을 경외한다는 큰 기쁨이 있습니다. 이것이 참된 신앙의 표지입니다. 1885년 옥스포드 대학 모들린 칼리지의 학장 허버트 워렌(32세)이 졸업생들에게 행한 ‘모들린 사람의 사명’에 관한 연설입니다: “저명 인사가 되고, 큰 일을 이루고, 남 앞에 서는 지도자가 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그런 사람이 될 순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꼭 필요한 사람은 될 수 있습니다. 정의의 편에 서는 꼭 필요한 사람, 이것으로 족한 것입니다” 그리고  ‘모들린 사람’임을 잊지 말라고 격려하였습니다. 우리 역시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잠언은 18절에서 주님을 경외하는 자가 받는 축복을 언급하며 동기유인을 제공합니다. 내일 자세히 보겠습니다.“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잠언23:18)    

잠언23:18절
“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17절은 악인의 형통을 시샘하지 말고 주님을 경외할 것을 명령하고, 18절은 그 이유를 제시합니다.  경건한 자의 복은 많지만, 본절은 미래의 측면에서 보고 있습니다. 본절의 전단과 후단은 동일한 내용이며,  전단은 긍정문으로과 후단은 부정문으로  표현하여 그 의미를 강조합니다. 특히 후단의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는 표현은 부정어 ‘로’와 미완료 동사를 결합하여 신자의 소망이 결코 끊어지지 않고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강조합니다. 또한 ‘장래’와 ‘소망’이란 단어는 이 세상에서 주님의 돌보심은 물론, 최후의 심판 때 주님으로부터 올 칭찬까지 포함합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건강하고 축복받은 삶을 사는 것처럼 보여도, 부활하여 마지막 심판을 받을 때 숨은 선행도, 신실하게 살아간 모습도 없어서 주님의 칭찬을 받지 못한다면, 그가 산 일생은 헛되다 하겠습니다(전1:2,3). “최후에 웃는 자가 가장 잘 웃는 자이다” 속담처럼, 진정한 승리자는 마지막에 웃는 자입니다. 이 땅에서는 주님을 경외하며 신실하게 살아가는 자들 보다 인간적인 술수를 쓰는 이기적인 사람들이 더 형통할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장래도 소망도 없습니다. 인간이 살아 있을 때는 가장 신경을 많이 쓰나, 죽음에 임박하여 가장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은 자신이 하던 비즈니스이며, 가장 걱정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운명이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삶의 외양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만, 아삽도 미끄러질 뻔하였다고 고백할 정도로 어렵습니다(시편73). 내일 이문제를 생각해 보겠습니다.“이 세상도 사라지고, 이 세상의 욕망도 사라지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요일2:17,새번역)

시편73:13
내가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손을 씻어 무죄하다 것이 실로 헛되도다

시편 기자들 역시 죄인의 번영과 경건한 자의 고난이라는 현실에 당황하며, 기도로 호소하는 장면이 시편에 많이 등장합니다. 본시의 저자인 아삽도 그랬습니다.  자신은 아침마다 징벌을  당하지만, 악인들은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불어났습니다. 고통스러운 질문이 떠오릅니다 : 경건이란 시간 낭비아닌가(13)? 악인들은 즐겁게 살 때 우리는 온 종일 재앙을 당하니 이 어찌된 일인가(14)? 그렇다면 이런 삶을 포기하고 그 행복한 넓은 길에 합류하는 것이 어떨까(10)?  아삽은 풀기 너무 어려웠습니다(16). 그러나 성소에 들어갔을 때 그는 마침내 악인의 종말을 깨닫습니다(17). 그들은 창졸 간에 멸망하고 자취도 없이 사라질 존재였습니다. 아삽의 가슴은 찔린 듯이 아팠습니다. 그는 ‘주님 앞에 있는 한 마리 짐승’이었습니다’(22). 그러나 자비롭게도 주님은 자신을 붙뜰어 주셨습니다. 그는 주님을 ‘피난처’로 삼아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복’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고 고백합니다(27,28). 주님이 함께 하시는 아삽은 부유한 사람입니다(23). 성벽처럼, 주님은 신자를 지키시기에 우리는 안전합니다(23). 그리고 세상을 떠날 때 주님은 고난 속에서도 경건하게 살려고 애를  쓴 우리를 영광으로 영접해 주실 것입니다(24-26). 이는 멸망의 길로 가는 사람들이 이용할 수 없는 피난처요, 알 수 없는 그 선하심입니다(27-28). 하늘나라는 고난 속에 보화와 지혜를 감추어 놓았으므로, 믿음, 소망, 사랑의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네 마음으로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라 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잠언23:17,18)

잠언23:19절
“내 아들아 너는 듣고 지혜를 얻어 네 마음을 바른 길로 인도할지니라”

17,18절은 주를 경외하는 자는 장래와 소망이 있기에,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교훈하였습니다. 이어지는 19-21절은 계명을 듣고 깨달아 지혜를 얻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바른 길로 살아가라고 교훈한 뒤(19), 방탕한 자들의 몰락을 동기유인으로 제시합니다 (20,21). 먼저, 19절을 보면, 명령형으로 된 세 개의 동사가 사용되었습니다 : ‘들으라, 지혜로우라, 인도하라’.  이 3가지 표현은 사실상 동일한 의미의 반복으로, 주님의 말씀을 배우고, 깨닫고, 순종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돼라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후단에서’길’이란 행동 양식, 삶에 대한 태도, 특히 하나님의 인도를 따르며 지혜를 추구하는 삶을 함축합니다. 그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신실한 제자로서 주님의 길을 따라 걸어갑니다. 그 이유는 만유의 주님을 경외하기 때문이며, 그 목적은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주를 기쁘시게 하려는 것이며(골1:10), 그 결과 늘 교훈을 따라 바른 길로 걸어가게 됩니다. 실로, 주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은 경건한 삶의 가장 큰 특징이며 하나님 사랑의 핵심입니다. 사람이 주님을 두려워하면 비로소 악에서 떠나게 되고, 보이는 길은 주님의 계명의 길뿐입니다. 악에서 떠난 그는 모든 연륜, 학식, 재주, 힘을 가진 자를 뛰어넘어, 원수 보다 지혜롭고, 모든 스승 보다 명철하고, 노인 보다 분별력이 있게 됩니다(시편119:97-101). 세상이 지어진 가장 목적은누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인가?’를 보시려는데 있으며, 그들만 남아 영생에 들어갈 것입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편119:105).  

잠언23:20절
“술을 즐겨 하는 자들과 고기를 탐하는 자들과도 더불어 사귀지 말라”

‘바른 길로 인도하라’는19절의 권면 후에, 20절은 바른 길이 아닌 대표적 사례를 보여줍니다. 그들이 걷지 말아야 하는 길은 ‘술을 즐겨하는 자들과 고기를 탐하는 자들’과 사귀는 삶입니다. ‘술을 즐겨하는 자들’이란 술꾼을, ‘고기를 탐하는 자들’이란 식탐에 빠진 자들입니다. 이들은 술과 고기를 먹고 즐기기 위해 너무 많은 돈과 시간을 쏟아붓는 자들로서, 한 마디로 ‘방탕한 자들’입니다. 신명기21:18-21은 그들을 돌로 쳐서 죽이라고 규정합니다. 즉 모세는 사람에게 아들이 있어 고집부리고 불순종하면, 그 부모가 그를 끌고 성읍 장로들에게 나아가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 말을 듣지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 하면” 그를 돌로쳐서 죽여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하라고 명령한 바 있습니다. 신명기의 명령은 부모공경에 대한 계명과도 관련있기 때문에, 그 벌이 특히 중하게 내려졌지만, 본절이 말하는 자들 역시 공동체에 의하여 죽임을 당할 정도의 악인임은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주님을 경외함이 없고, 오직 술과 음식에 대한 탐욕만이 가득차 있습니다. 탐욕은 곧 우상숭배로서 탐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엡5:5). 따라서, 현자는 이들과 ‘더불어 사귀지 말라’고 훈계하나, 원문은 더욱 강렬합니다: ‘그들과 더불어 한 자리에 있지도 말아라.’ 따라서, 바른 길로 행하는 삶은 악을 행하지 않는 것은 물론, 죄인들의 삶의 자리 자체를 멀리해야 합니다(시1:1). 더욱이 허랑방탕한 자의 결국은 가난으로 귀결됩니다. 21절은 이를 지적하여 잘못된 길을 버리도록 동기유인을 줍니다.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엡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