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23:6절
“악한 눈이 있는 자의 음식을 먹지 말며 그의 맛있는 음식을 탐하지 말지어다”
6-8절과 1-3절은 소재와 표현과 유사하지만, 1-3절은 조심성 있게 관원과의 식사자리에 나가라는 권면이나, 6-8절은 식사자리가 상징하는 마음의 교제 자체를 하지 말라는 충고입니다. ‘악한 눈’이란 인색하고 이기적이며 불량하고 악한 마음으로, 양식을 가난한 자에게 베푸는 ‘선한 눈’과 대조됩니다(22:9). 그는 손님의 행복과 즐거움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을 관철하고자 합니다. ‘음식을 먹지 말며’란 단순한 식사가 아닌 마음을 함께 나누는 식탁의 교제를 말합니다. 고대 근동에서의 식탁 교제는 같은 계층의 가까운 사람들과만 나누었기에, ‘음식을 먹지 말라’는 말은 교제를 중단하라는 경고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주님께서 주신 것에 만족하고, 악인에게 속한 것은 음식은 물론 그 어떤 것에든지 마음을 두지 말아야 합니다. 본잠언에 대한 좋은 예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단까지 쫓아가 그돌라오멜을 비롯한 4명의 왕을 격파하고, 조카 롯을 비롯한 모든 사람과 재물을 되찾아 왔습니다. 왕곡에 이르자 소돔 왕이 나오면서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가지라’ 하였지만, 아브라함은 사람은 물론 의당 자신이 가져야 할 전리품조차도 악한 소돔 왕의 소유물은 모두 돌려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악인의 재물로 치부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이후, 소돔과 고모라가 불과 유황으로 멸망 받았을 때, 아브라함은 아무 해도 받지 않았지만, 계속 소돔 땅에 머물면서 악한 자와 교제를 한 롯은 모든 것을 다 잃었습니다. “내 마음이 악한 일에 기울어 죄악을 행하는 자들과 함께 악을 행하지 말게 하시며 그들의 진수성찬을 먹지 말게 하소서”(시141:4).
잠언23:7절
“무릇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의 사람됨도 그러하니, 그가 말로는 ‘먹고 마셔라’ 하여도, 그 속마음은 너를 떠나 있다.”(새번역)
7절은 식사자리에 초청한 주인의 위선을 벗김으로써, 6절이 말하는 권면의 실체를 알게 해줍니다.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이란 주인의 속마음을 묘사하는데, 그는 손님을 초청해 놓고 비용을 계산하는 중입니다. 겉으로야 ‘먹고 마셔라’ ‘마음껏 즐겨라’는 하지만, 그의 마음은 돈을 아까워 하고 있습니다. ‘ 사람됨’이란, 인격을 말하며, 사람의 인격은 외양보다도 속마음을 알아야 분별할 수 있습니다. 후단이 연회를 상정하여, 악인의 겉모양과 속마음의 괴리를 묘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인색한 주인이 음식을 차려놓고 호의와 친절을 베푸는 외양을 갖춘 것은 이기적인 의도를 성취하기 위해서지, 우정을 나누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 속마음은 너를 떠나 있다’는 냉혹한 현실을 자각하지 못하면, 후에 큰 낭패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청년 A는, 외롭게 지내는 중 마음 따뜻한 형을 만나 함께 밥도 먹고 잠도 자며 자신의 속마음도 털어 놓고 지냈습니다. 어느 날 그 형은 칼을 하나 주면서 자신을 따라 오라 하여, 간 곳은 K라는 룸살롬이었습니다. 아비규환이 일어났고, 그 범죄자는 사라졌으며, A만 모든 범죄를 뒤집어 썼습니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람을 늘 의심하고 살 수도 없습니다. 여기에 지혜가 있습니다. 평소에 조금씩 그 속마음을 테스트 해보시기 바랍니다. 그 작은 일에 마음이 드러나면, 그는 큰 일에도 그렇게 행동할 것입니다(눅16:10). 우리의 목적은 행복한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섬기는 행복을 추구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마10:16)
잠언23:8절
“네가 조금 먹은 것도 토하겠고 네 아름다운 말도 헛된 데로 돌아가리라”
본절은 악한 자와 교제를 나누지 말라는 메시지를 위해 문학적 기교들이 사용되었습니다. 먼저, 어순입니다. 동사가 문두에 오는 통상의 히브리어 구문과 달리, 8절은 ‘핏테카- 조각, 작은 부스러기’라는 명사로 시작됩니다. 강조하기 위해서이며,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악인의 호의를 받아 진수성찬을 먹을지라도 조금의 유익도 없다. 둘째, 식사는 우정을 나누는 대표적인 모습으로, 현자는 이를 재료 삼아 악인과 교제 결과를 보여줍니다. 손님을 초대한 주인은 성심성의로 대접하기 위해 먹기에도, 보기에도, 그리고 몸에도 좋은 음식을 골라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내놓으며, 초대받은 손님은 그 정성과 환대, 진귀한 요리에 또 감사하며, 아름다운 식탁의 교제가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악인은 의도를 갖고 초대한 것입니다, 그 이기적인 의도를 알게 된 손님은 구토를 하고, 주고받은 덕담도 소용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본절의 식탁의 교제의 결과는 악인과 함께 하는 모든 것이 그런 결과를 가져오는 대표적인 예일뿐입니다. 따라서, 인색한 자들과는 진심으로 교제할 수 없고, 그들과 친분을 쌓으려는 시도는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셋째, 본절은 교차대구의 기교를 사용하여 메시지를 강조합니다. (조금 먹은 것도) – (네가 토하겠고)- (헛된 데로 돌아가리라) – (아름다운 네 말도). 악인과 교제 시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나 입에서 나오는 모든 것이 조금의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주님의 도우심을 신뢰하고 주님과 동행하는 삶에서 행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마12:35).
잠언23:9절
“미련한 자의 귀에 말하지 말지니 이는 그가 네 지혜로운 말을 업신여길 것임이니라”
가장 지혜로운 충고도, 바보의 귀에 닿으면 튕겨나갈 것입니다. 그러나 더욱 안 좋은 것은 그런 지혜가 오히려 그들의 적의를 불러 일으킨다는 사실입니다. 바보들은 지혜로운 말이 자신들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면, 지혜자를 대척하기 때문에 매우 조심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못해 많은 사람들이 화를 당하였고, 예수께서도 제자들에게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마7:6). 선지자들이 대부분 고난과 핍박을 받은 이유는, 들을 귀가 없는 미련한 백성과 통치자들에게 가장 지혜로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기 때문입니다. 중국 역사도 이를 증언합니다. 춘추시대 오나라의 왕 부차는 초에서 도망 온 명장 오자서와 함께 월나라를 정복시켰습니다. 월왕 구천을 죽이자는 오자서의 건의를 오왕 부차는 무시하고 대신 소변과 똥을 먹이는 치욕을 준 후, 살려보냈습니다. 그러나 오자서는 계속 월나라를 경계하라고 여러 차례 진언을 올리다가 마침내 오왕 부차의 노여움을 사서 사형을 당하였습니다. 이때 월나라의 명신 범려는 월왕 구천을 도와 기회를 엿보다가, 오자서 없는 오나라를 공격하여 부차를 사로잡았습니다. 그러나 월왕 구천은 범려의 충언을 듣고 부차를 죽여 후환을 없앴습니다. 어느 날, 범려가 구천과 말하다가 권력을 독점하려는 왕의 모습을 보자마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월나라를 떠나 화를 면하였습니다.그러므로 마땅히 상대방을 가려 말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약3:2).
잠언23:10,11절
“옛 지계석을 옮기지 말며 고아들의 밭을 침범하지 말지어다”
10절과 11절은 열한 번째의 교훈으로, 10절은 잠언의 제자들로 하여금 고아들의 재산권을 보호하라는 명령이며, 11절은 그 이유로 하나님이 그들의 보호자임을 말합니다. 먼저, 10절을 보겠습니다. “네 선조가 세운 옛 지계석을 옮기지 말지니라”(22:28)고 이미 교훈한 것처럼, 지계석은 토지의 경계와 그 소유주를 알려주는 경계선 돌입니다. 고대 근동은 토지가 기반이된 농업 사회로서 지계석은 중요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신 뒤, 그들이 언약을 지키는 한에 있어서, 그 거룩한 땅에서 살아갈 권리를 확보하도록 각 지파에게 밭을 제비 뽑아 분배하여 영원히 빼앗기지 않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고아로 대변되는 힘 없는 약자들부터 율법에 규정된 그들의 권한이 침범당하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고대 근동에서 이런 약자들을 보호하는 것은 왕과 그 신하들의 책임이었습니다만, 강한 이들부터 그들의 땅을 침범하였습니다. “ 옮기지 말며…침범하지 말지어다”라는 말은 지계석을 한 번 옮긴 후 확보하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밭’의 원어는 ‘사데’로서 풀밭, 넗은 들, 그리고 땅을 의미합니다. 본절에서 주목하는 부분은, 이스라엘에서 밭으로 상징하는 토지의 소유자는 주님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자신의 권리를 지키시기 위해 행동하셔야만 하고, 11절에서 그것은 ‘고아들’의 ‘고엘- 구속자’로서 표현됩니다. 우리가 사는 현재도 같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약할 때는 기도하시고, 강할 때는 두려워 해야만 합니다.다음 주에 11절을 상론하겠습니다. “대저 그들의 구속자는 강하시니 그가 너를 대적하여 그들의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잠언2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