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3/5/15-19)

잠언22:21
네가 진리의 확실한 말씀을 깨닫게 하며 너를 보내는 자에게 진리의 말씀으로 회답하게 하려 함이 아니냐

73년의 인생을 살며 3000명의 제자를 둔 공자의 입학금은 “한 다발의 건육”이었고, 교과목은 ‘육례(六禮)’라는 현실교육이었습니다: 예절, 음악, 활쏘기, 말 타기, 글쓰기, 셈하기 등 6가지 전문 과목으로, 평민들도 배워 관직에 나아갈 수 있게 하여 인기가 있었습니다. 또한,  공자와 그 제자들의 대화를 기록한 논어는 동양의 리더들을 키워냈습니다. 물론 <논어>에는 신에 대한 개념을 전제하지 않아, 성경과는 그 출발부터 확연히 다르지만, 같은 세상을 다루고 있습니다.  어떤 근원에서 어떤 가르침을 가지고 살아가는지는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가름하게 될 것입니다. 22절부터 나올 ‘서른 가지 교훈’은 두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 둘째는 고결한 인격입니다. 부에 대한 갈망, 부자의 호의를 받으려는 자세, 술취함, 부모에 대한 불순종, 성적인 부도덕, 기타 이 같은 행동들은 확실히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고, 인간성을 파괴하기 때문에, 서른 가지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양식입니다. 추가적으로, 본절은 그들을 보낸 자들( 부모나 후견인)에게 스승의 가르침에 부합된 삶을 보여줄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포로로 잡힌 다니엘과 세 친구는 다른 많은 젊은이들과 함께 갈대아의 학문과 언어를 배우고 왕을 섬기도록 훈련받았습니다(단1:3-4).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할 줄 아는 사람은 모세율법을 아는 오직 이 네 사람뿐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자녀들이 주님을 경외하도록 기도하며 성경을 가르쳐야 합니다. “선지자의 글에 그들이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요6:45).

잠언22:22
약한 자를 그가 약하다고 탈취하지 말며 곤고한 자를 성문에서 압제하지 말라

22절과 23절은 한 쌍의 교훈으로, 22절은 가난하고 약한 자들에 대한 압제를 금지하고, 23절은  그릇 행동한 자는 재판장이신 주님께 목숨을 빼앗길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먼저 22절을 보겠습니다. ‘약한 자를’에 해당하는 원어는 ‘딸’이며,  물질적인 부와 사회적인 힘이 결여되어 있는 자들을 지칭합니다. 하반절의 ‘곤고한 자’란 히브리어 ‘아니’의 번역으로, 누군가에 의해 부당하게 압제와 고통 당함을 뜻합니다. ‘성문’은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주된 출입구로서, 사람의 왕래가 많았기 때문에 시장이 형성되었고 재판이 이루어졌습니다. 따라서, 현자는 경제적 측면이나 사법적 측면 등 생활 전반에 걸쳐 약한 자들을 고통스럽게 하지 말고, 도리어 보호하고 변호해야 함을 가르친 것입니다. 당연하나, 대한민국에서도 이런 경제적 불의가 판을 치고 있기 때문에 공정거래법을 제정하여 거래과정에서의 불공정성을 막으려고 노력하며, 재판과정에서의  불의를 막기 위해 헌법에서조차 약자 보호규정을 두고 있지만, 현실은 힘있는 자에게 휘둘리고 있습니다. 혹시 기준이 되는 법률 자체가 문제라고 말할 수도 있으나,  하나님의 율법을 가진 이스라엘에서도 예외가 아니었음을 고려할 때, 인간 본성에 내재한 악의 문제까지도 처리해야만 합니다. 따라서, 인간은 법률과 제도만으로는 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담겨야만 비로서 온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간직한 존재들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이들은  아들을 세상에 보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자들입니다.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약1:18).

잠언22:23
주님께서 그들의 송사를 맡아 주시고, 그들을 노략하는 사람의 목숨을 빼앗으시기 때문이다.”(새번역)

23절은 약자를 탈취하고, 압제하는 자를 처단하시는 우주의 재판장을 밝힙니다. 그분은 바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훼입니다. 고대 근동에서 이 지식은 오직 이스라엘 자손들만 가지고 있었으나, 그들을 통해 이방민족들도 간접적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선교가 중요합니다. 주님의 심판 집행은 섭리 가운데 숨겨져 있기 때문에, 오직 믿음의 눈을 가진 자들만이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지혜자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섭리라는 도구 전에, 국가라는 질서를 세우시고 범죄를 인간이 다루도록 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 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다”(롬13:1)고 명령하였던 것입니다.  한편, 권력집단의 범죄는 매우 심각하나 국가 자체에서 다루기 쉽지 않아서, 심판의 섭리가 작동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은 섭리적 심판을 통해 이들을 몰락시키시고, 심지어 생명까지 빼앗는다는 것이 본잠언의 경고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경외하여야 합니다. 성경의 예입니다.  북이스라엘 왕국 통치자 아합 왕이 범죄하자, 주님은 선지자 엘리사를 통해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고, 범죄한 아합의 집안을 멸망시켰습니다 (왕하9장,10장). 한편, 하나님의 정의는 최후의 심판에서 완전하게 성취될 것이며, 이를 위해  하나님은 주님을 재판장으로 정하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시켜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습니다(행18:31). 성도에게 믿음과 인내가 요구되는 이유입니다. “여러분도 참으십시오. 마음을 굳게 하십시오. 주님께서 오실 때가 가깝습니다.” (약5:8,새번역).

잠언22:24
성급한 사람과 사귀지 말고, 성을 내는 사람과 함께 다니지 말아라.”(새번역)

좋은 보금자리를 놓고 싸우다 진 바닷가재에게 세로토닌이란 호르몬을 주입하면, 다시 힘을 내어 승자에게 무모한 도전을 한다고 합니다.  더 큰 부상을 입을 수 있지만, 바닷가재는 호르몬의 작용을 통제할 수 없습니다. 화를 잘 내는 사람도 그런 행태가 습관화 인격화 되어 큰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에 현자는 제자들에게 이를 경계합니다. 현자가 보기에, ‘성급한 사람’과의 교제는 자신을 파괴하는 행동이라, 강도짓(22,23)을 하여 파멸당하는 것과 별다른 차이가 없습니다. 주님은 약자를 압제하는 자를 심판하여 생명까지 몰수하시는 반면, 성을 잘내는 사람의 길에는 자기파괴의 함정을 설치해 놓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로, 성급하고, 성을 잘 내는 사람은 주님을 무시하고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려는 교만하며 경박한 사람입니다. 사람이 화를 내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합니다(약1:20). 따라서, 겸손한 사람은 좀처럼 화를 내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분냄’이란 바울이 열거한 육체의 일 중 하나로, 이런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으며(갈5:21), 이웃에게도 회피 대상이고, 경멸을 받습니다. 문제는, 화를 잘 내는 성격은 고치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그는  큰 화를 당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장래의 심판이 뻔히 보이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사람과 어떻게 인생을 동행할 수 있겠습니까? 친구나 배우자 등을 선택할 때 신앙의 요소만큼이나 인격의 요소도 이처럼 중요합니다. 24절의 교훈은 당연하나, 25절은 좀 더 큰 이유를 알려줍니다.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이 곧은 사람은 갑자기 패망을 당하고 피하지 못하리라” (잠언29:1)

잠언22:25
네가  행위를 본받아서 올무에 걸려 들까 염려된다.”(새번역)

‘성을 잘내는 사람’이란 ‘히브리어에서 ‘분노의 사람’이란 뜻으로, 현자는 제자들이 그런 사람과 어울리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제자들 역시 쉽게 화를 내는 사람과 동행하면 그와 유사한 성격으로 발전해 나갈 우려와 자신을 지킨다고 하여도 타인이 만들어 놓은  상황에 연류되어, 뜻하지 않는 올무에 걸리게 될 것입니다. 동양에서도,  ‘좋지 못한 사람과 가까이하면 악(惡)에 물들게 된다(근묵자흑)’는 교훈이나, 공자가 말한 ‘지란지교’도 같은 내용입니다: “착한 사람과 함께 있으면 마치 향기 그윽한 난초가 있는 방에 들어간 것과 같아서, 그와 함께 오래 지내면 비록 그 향기는 맡을 수 없게 되지만, 자연히 그에게 동화되어 착한 사람이 된다. 그러나 악한 사람과 같이 있으면 마치 악취가 풍기는 절인 어물을 파는 가게에 들어간 것과도 같아서, 그와 함께 오래 지내면 비록 그 악취는 맡지 못하게 될지라도, 그에게 동화되어 악한 사람이 된다.” 성경의 사례입니다. 여호사밧은 경건한 유다 왕이지만 북왕국의 악한 왕 아합 과 연혼하여 큰 위기들을 겪습니다.먼저, 아합 왕의 요청으로 연합군을 형성하여 아람 왕과 전쟁을 할 때  병사로 위장한 아합 왕은 화살에 맞아 죽었으나, 왕복을 입은 여호사밧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죽을 위기를 넘겼습니다. 이후 유다로 돌아온 여호사밧은 선지자의 경책을 받았습니다. 더 문제는 아합과 이세벨의 딸 아달랴를  맏며느리로 받아들여, 그 아들 여호람은 아주 악한 왕이 되었으며, 악한 여자 아달랴의 구데타에 의해 유다 왕국은 멸망 일보 직전까지 간 적도 있었습니다. “못된 사람은 입술을 잘못 놀려 올가미에 걸리지만 착한 사람은 곤경에서 벗어난다.”(잠언12:13,공동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