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22:6절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클립보드의 역설적 해설입니다: “아이들을 그들이 원하는 대로 양육하라, 그러면 결코 탕자의 길을 떠나지 못할 것이다.” 세상에는 잘못된 길이 많기 때문에 잠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유일한 길을 가르치며, 이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길로 구체화됩니다. 우리는 이 지혜의 길을 걷도록 자녀를 양육하여야만 합니다. 한편, 본문 후단의 내용이 약속이냐, 아니면 일반적 진술이냐에 관한 다툼이 있지만, 아이 때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양육된다면, 성품으로 화하여 일생 바른 길로 갈 것입니다. 그러나, 가르침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자녀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께서 역사를 해야 비로서 그리스도를 깨닫고 그분의 형상을 따라 성경과 계명을 해석하며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잠언은 기도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으나, 그 중요성은 시편 전체에 걸쳐서 나타납니다. 따라서, 가르침과 기도, 기도와 가르침은 두 손과 같이 늘 함께 가야만 하고, 세상 사람들에게 없는 훌륭한 도구들입니다. 어떤 어머니가 17살된 아들의 잘못된 행동과 무례한 언어 사용,나쁜 친구들, 심지어는 마약 등에 대하여 걱정이 되어 시카고 데일리 신문 맵레이에게 조언을 요청하였더니, 그는 “17개월로 돌이켜서 훈육을 다시하라”고 .이해하기 어려운 조언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만유의 주님이 계십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그분의 손에 맡기고 바르게 가르치시기 바랍니다(빌4:6,7). 야곱의 10아들은 형제를 종으로 팔 정도로 문제가 많았지만, 주님의 손에 의해 결국 올바르게 변화되었습니다.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혀 있으나, 훈계의 매가 그것을 멀리 쫓아낸다.” (잠언22:15,새번역)
잠언22:7절
“가난하면 부자의 지배를 받고, 빚지면 빚쟁이의 종이 된다.”(새번역)
“부자아빠 가난한 아빠”의 책에서 저자는 부자가 가난한 자를 휘두르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묘사합니다. 본 잠언도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의 권력관계를 한 문장으로 표현합니다. 모세율법은 고대 근동의 관습을 따라 채무로 인한 종의 규정을 두고 있어서, 잠언 당시 이스라엘에서 채무를 변제하지 못하면 채권자의 종이 되어 빚을 갚아야 하였습니다. 성경의 예입니다. BC 800년경 선지자 엘리사의 한 제자가 빚을 지고 죽자 채권자가 미망인에게 그의 두 아들을 종으로 삼겠다고 알렸습니다. 그것은 정당한 권리행사였기에, 선지자도 방법이 없었습니다. 다만, 하나님은 자비를 베푸셔서 기름 한 병에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그녀는 기적으로 생산된 그 기름을 팔아 빚을 갚고 남은 것으로 생활하였습니다(왕하4:1-7). 신실한 믿음의 축복으로, 우리가 사방에 기댈 곳이 없어도, 두려워 하지 마십시오. 주님이 계십니다(빌4:6,7). 잠언은 전체적으로 부자를 경고하고 책망 하지만, 본 잠언은 빚지는 것보다는 채권자가 되는 것이 훨씬 낫다는 함의가 담겨 있습니다. 신명기에도 이스라엘 민족이 채권자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고 채무자가 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버린 벌로 규정합니다 (신28:44). 구약의 율법은 순종과 불순종을 물질적인 효과로 규정하여, 아직 하나님의 아들을 알지 못한 그들로 순종을 배우게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만유의 주로 임명을 받으셨습니다(엡1:22). 세상 것을 염려하지 말고 그분의 뜻을 염려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마6:31).
잠언22:8절
“악을 뿌리는 사람은 재앙을 거둘 것이며 그의 분노의 기세도 꺾일 것이다.”(현대인의성경)
이 잠언은 인과응보, 혹은 사필귀정의 교훈을 가르칩니다: “콩심은 데서 콩나고, 팥심은 데서 팥난다.” 따라서 악의 씨를 뿌리는 사람들은 궁극적으로 자신의 행위의 쓰디쓴 열매를 거둘 것이며, 불의에 수반되는 폭력을 지칭하는 ‘ 분노의 기세’도 결국 헛될 것입니다. 문제는 이것이 이 세상을 넘어 영원한 심판과 연관이 되어 있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갈6:7,8)고 경고한 뒤, 기회를 갖는대로 모든 사람 특히 믿음의 가정들에게 선을 행하기 힘쓰라고 권고합니다(갈6:9-10). 야곱의 아들들 가운데 둘째와 셋째는 시므온과 레위이고 딸은 디나였습니다. 야곱이 세겜에 있을 때 디나가 세겜에게 욕보임을 당합니다. 그러자 이들은 세겜과 그 동네 사람들을 모두 죽이고 처자들은 종으로 삼았으며, 그 나이 불과 17,8세였습니다. 약 40년 후 야곱은 임종 시 이들을 저주하여 이스라엘 가운데 흩었습니다. 역사를 보면 시므온의 자손은 번성하지도 못하고, 유명한 인물도 없었고, 유다 지파에 흡수되어 사라졌습니다. 레위 지파 역시 전 이스라엘 가운데로 흩어졌으나, 광야의 황금 송아지 사건 때 우상숭배를 한 3천명을 죽이고 하나님 편에 섰기 때문에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도록 은혜를 받았습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바랍니다. 그러면 화도 복으로 변합니다. “사람의 행실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면, 그의 원수라도 그와 화목하게 하여 주신다.” (잠언16:7,새번역).
시편141편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며 나의 손 드는 것이 저녁 제사 같이 되게 하소서”(2)
본 시편의 저자는 다윗입니다. 시인은 자신의 내외로부터 오는 심각한 악의 유혹에 직면하여 하나님께 간곡하게 기도합니다. 먼저, 그는 하나님의 신속한 응답을 부르짖습니다(1-2). 그 내용은 악의 유혹들에서, 자신, 즉 자신의 마음, 입 그리고 행동을 지켜달라는 간구이며(3-6), 또한 하나님께 피신하니 악인의 함정으로부터 자신의 보호를 요청하는 것입니다(7-10).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과 끈끈한 관계를 맺고 살게 됩니다. 서로가 돕고 의지하는 관계가 되면 때론 타인의 죄에 연류되거나, 그들과의 관계를 끊지 못해 함께 불법을 저지를 유혹도 받게 됩니다. 4세기의 교부 어거스틴은 청소년기에 친구들과 어울려 여러 비행을 저질렀고, 그 후에는 명예와 결혼과 돈을 추구하면서 살다가 욕망의 힘을 끊어낼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주님께 간구하였고 자유케 하시는 주님의 능력을 경험한 바 있습니다. 그 간증은 고백록에 잘 나와 있습니다. 시인인 다윗은 주님의 많은 사랑을 입었지만, 잠깐 방심하자 치명적인 도덕적 실패에 이르렀습니다. 그 만큼 인간은 연약합니다. 주기도문이 떠오릅니다.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마6:13). 우리는 주님께 신실하겠다고 다짐하지만,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야만 온전해 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는 것은 물론, 성령님과 보조를 맞추어 살아가면서 성령께서 주시는 힘으로 사랑과 진리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갈5:22-23). “나를 지키사 그들이 나를 잡으려고 놓은 올무와 악을 행하는 자들의 함정에서 벗어나게 하옵소서” (시편11:8)
시편142편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어 말하기를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나의 분깃이시라 하였나이다.”(5)
시편 57편과 142편은 모두 다윗이 원수를 피하여 굴에 숨었을 때 지은 시이나 내용은 대조적입니다. 57편은 하루 아침에 도망자 신세가 되었지만,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을 신뢰하는 믿음이 지배합니다. 그 반면 지금(142편) 시인은 두려워 하고 절망과 비탄에 젖어 부르짖습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모두 적뿐이며 피난처는 없고, 오히려 원수의 올무만 설치되어 있기 때문입니다(1-4). 그러나 시인의 믿음은 패배하지 않았습니다. 5절에서 “주는 나의 피난처….나의 분깃”이라는 고백과 함께 시인의 믿음은 날개짓을 시작하였고, 주님께 구원을 요청함과 동시에 그 믿음의 날개를 충만하게 펼칩니다(6). 끝 절에서 그의 믿음이 구원의 소망과 결부되자, 격동하는 마음은 평온을 되찾습니다 (7). 믿음은 소망과 결부되어야 힘을 발휘합니다. 한편 시인은 주님을 ‘나의 분깃’리고 부릅니다. 원래 하나님은 레위 지파에게 땅 대신 당신 자신을 그들의 분깃으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삶의 기반은 땅을 분배 받은 각 지파가 주님께 드리는 제물과 헌물이었습니다. 그러나 땅을 분배받은 지파들 역시 궁극적 삶의 원천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므로, 같은 믿음에 도달하였고, 시편 도처에서 하나님을 부르는 믿음의 언어가 되었습니다 (73:26). 이는 신약에 이어져 그리스도를 통한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상징합니다. 신자에게는 주님이 피난처요 분깃으로, 직업도 주님이 주신 것임을 잊지 말고 늘 그분의 뜻을 행하는데 힘을 쏟아야 합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