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3/3/20-24)

잠언21:31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거니와 이김은 여호와께 있느니라

31절은 30절의 구체적인 예입니다. ‘마병’은 고대 전쟁에서 승리를 위한 절대병기였습니다. 창이 뚫을 수 없는 철갑을 두른 마병은 하루에 100km를 주파하였습니다. 따라서,  왕들은 철병거와 마병을 준비하지 않을 수 없었고(31a), 이를 잘 아는 솔로몬 왕은 이집트의 말을 힛타이트와 아람민족에게 중개하여 많은 이익을 얻었습니다(왕상10:29). 그러나 솔로몬은 전쟁의 승리는 인간의 준비에 있지 않고 주님께 달려있다고 선언합니다.  물론 싸울 날을 위한 인간의 준비와 전략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결정권자는 주님이시기에 늘 겸손해야 합니다. 사사 에훗 이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악을 행하자, 하나님은 그들을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넘겨 20년 간 심한 학대를 당하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부르짖자 하나님은 여선지 드보라를 통해 바락에게 명령하여 납달리와 스불론 자손 일만 명을 다볼 산에 집결시켰고, 야빈의 군대장관 시스라는 철병거 900대와 보병을 이끌고 기손 강에 집결하였습니다. 드보라는 바락에게 내려가서 공격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바락은 평야전투가 불리함을 잘 알았지만 순종하였으며, 하나님은 그와 동시에 기손 강 상류에 폭우를 내리셨습니다. 그 비가 모여 홍수로 변하였고, 시스라의 철병거는 물에 떠내려가거나 진흙에 바퀴기 빠져 무기력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바락의 1만군대가 도착하여 전쟁을 대승으로 이끌었습니다. 홍수는 경험칙 상 생각할 수 없었지만,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였습니다. 이런 능력의 하나님을 신뢰하고 살아가는 삶이 믿음의 삶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약1:5)    

잠언22:1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이요 은이나 금보다 은총을 더욱 택할 것이니라

22:1-16절은 ‘부와 도덕’을 주제로 한 교훈입니다. 이미 21:30-31절에서 국가를 포함한 모든 인간에 대한 주님의 주권을 다룬 솔로몬 왕은, 주님은 재물에도 주권을 갖고 계심을 가르칩니다. 통상 금은보화 혹은 좋은 집과 차 등으로 상징되는 재물은 정말 좋은 것입니다만, 그 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은 훌륭한 명성(좋은 이름)입니다. 후단은 이 명예를 갖게 되는 이유를 ‘은총=은혜로움’으로써 구체화합니다. 여기서 ‘은총’의 히브리어 ‘헨’은 궁핍한 자를 보고 긍휼히 여겨 필요한 것을 주는 은혜로운 사람의 모습을 말합니다. 타인에게 은혜를 베푸는 사람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좋은 평판을 갖게 마련입니다. 실상 좋은 이름은 지혜자의 특징 중 하나입니다. 이는 재물은 미덕과 상관없이 획득될 수 있지만, 명예는 미덕과 분리될 수 없으며, 지혜는 재물과 명예 모두를 가져다 주기 때문입니다. 잠언은  ‘그(지혜) 이익이 정금보다 낫다’고 선언합니다(3:14). 얼마 전 서울 남산 도서관을 가 본적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여전히 김구 선생과 이시영 선생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백사 이항복의 10대 손인, 이시영 선생의 6형제는 조선이 망하자 수 백억원에 달하는 전 재산을 급히 팔아 만주에 신흥무관학교(1911년)를 세우는 등 독립투쟁에 크게 이바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시영 선생을 제외하고 다른 5형제는 광복이전에, 고문사, 병사(病死), 객사(客死), 아사(餓死)했습니다. 후에 이승만 대통령은 일부 재산의 환급을 제안했으나 선생은 재산을 찾겠다고 독립운동한게 아니라며 거절하였습니다. “명예가 값비싼 향유보다 더 낫고, 죽는 날이 태어나는 날보다 더 중요하다.” (전7:1,새번역)

잠언22:2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이 함께 얽혀서 살지만, 이들 모두를 지으신 분은 주님이시다.”(새번역)

인류의 역사는 부자와 가난한 자가 함께 얽혀 살아온 역사로서, 세상 끝 날까지 가난한 자는 늘 존재할 것입니다(신15:11;막14:7). 가장 부자이신 주님은 일생을 가난한 자와 어울리시면서 가난하게 사심으로 두 계층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좋은 예를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사랑 가운데 서로 배려하려는 사회입니다.  부자는 교만을 버려야 합니다. 부자가 물질적 풍요를 누린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둘 사이에는 차이가 없으며, 모두 피조된 인간으로서 동일한 가치와 고귀함이 있습니다. 가난한 자는 질투를  버려야 합니다(전10:20).  부자라고 더 행복한 것이 아니기에, 잠언은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제육이 집에 가득하고도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17:1)고 밝힙니다. 문제는 부자가 가난한 자를 착취하는 경제, 사회구조의 존재입니다. 이는 인간의 죄 때문이지 창조주 때문은 아닙니다. 따라서 2절 전단은  이들의 공동의 삶에서 발생하는 수 많은 문제점들을 전제하고, 후단은 그 해결 방법으로 주님의 시각에서 바라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면, 자연히 상호존중, 배려의 태도를 갖게 되는데, 이는 모두 주님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창조주를 전제하지 않는 세상 지혜와의 차이입니다. 재물과 면류관이 어찌 대대에 있겠습니까?(27:24) 그러므로 부자나 가난한 자나 모두가, 주님께서 당신의 뜻과 도덕 질서에  따라 부를 재분배하고 계심을 생각하고 그분을 경외하여야 합니다. 자족이라는 경건의 미덕은 여기서 나오는 것으로 주님을 아는 자는 인생 항해의 중심키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자족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경건은 큰 이득을 줍니다.”(딤전6:6,새번역)

시편137:1절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하나님과 축복과 저주의 언약(모세율법)을 체결하고도 아담과 같이 반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벌은 예루살렘의 멸망과 바벨론 포수였습니다(BC 586년). 이 시편을 소재로 자마이카의 레게음악 그룹 멜로디언즈는 “Rivers of Babylon(1967)”라는 히트곡을 만들었고, 한국에서도 유행하였습니다. 4/4박자의 리듬과 가사의 내용이 불의에 저항하도록 힘을 줍니다. 그러나 신학적 전제가 없다면, 본 시편은 이방 땅에서 고향을 그리면서 정복자를 증오하는 힘 없는 약자의 노래입니다. 특히 시의 8-9절은 바벨론을 향한 무자비한 복수심을 보이는데, 30년 후 페르샤가 바벨론을 정복할 때도 시인이 염원한 -‘네 어린 것들을 바위에 메어치는”(9)-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학자들은 선지자들의 언어를 사용하여 바벨론에 대한 복수를 주님 손에 의탁한 것 뿐이라고 말하나, 시인의 증오를 다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경은 후세의 교훈을 위하여 어리석은 자들의 말, 생각, 그리고 행동도 많이 기록해 놓았습니다. 당연히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또한, 범죄한 이들을 흩으셔서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회당을 세우고 “말씀과 기도”의 삶을 이어가라는 뜻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오셔서 죽고 부활 승천하여 복음을 완성하시자, 사도들에게 회당이야말로 복음 전도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최선을 마련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비밀을 볼 믿음의 눈을 가져야 합니다.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눅12:7).

시편138편
“내가 전심으로 주께 감사하며 신들 앞에서 주께 찬송하리이다”

138-145편까지8개의 시들은 모두 다윗이 그 저자입니다. 138편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신실하심에 대한 감사와 신뢰를 노래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인자와 성실하심을 경험하자, 비록 고난 중에 있었지만 믿음의 눈은 활짝 열렸습니다. 그는 주님의 성품(1-3), 세상의 미래(4-6)를 확실히 알게 되었고, 아직도 고난 가운데 있는 자신의 구원과 안전을 위해 기도로 호소합니다(7-8). 사무엘하5:17-25절이 시의 배경으로 언급됩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을 통일하자 모든 블레셋 민족이 모여 르바임 계곡으로 올라왔습니다. 그 위세를 본 다윗은 “블레세인들을 치러 올라갈까요? 주께서 그들을 제 손에 넘겨주실 것입니까?”하고 묻자, 주님은 “올라가라 내가 확실히 네 손에 넘겨주겠다”고 대답하셨습니다. 확답을 받은 다윗은 용감하게 군대를 이끌고 나가서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우상들을 버리고 도망갔고, 전쟁터는 ‘신들’의 쓰레기 더미로 변하였습니다. 기도 응답의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에게 기도의 장소는 새롭게 주님의 계시를 깨닫는 자리이며(2), 갱신의 장소이고(2-3), 세상과 그 왕들을 포용하는 비전의 자리요(4), 하나님을 신뢰하는 바로 그 장소(7-8)가 되었습니다. 우리들도 같습니다. 신실한 주님의 말씀을 경험하게 되면, 주님과 그분의 약속에 대한 확신이 생깁니다. 그 후에는 어려운 상황이 닥쳐와도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과 공급하심을 신뢰하게 되며, 이를 통해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영광과 찬송을 받으심을 힘있게 선포하게 됩니다.“내가 전심으로 주께 감사하며 신들 앞에서 주께 찬송하리이다”(시편13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