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21:25절
“게으른 자의 욕망이 자기를 죽이나니 이는 자기의 손으로 일하기를 싫어함이니라.”
솔로몬은 게으른 자의 밭을 지나가다가 가시덤불이 퍼졌고 거친 풀로 덮힌 것을 보고 생각이 깊었습니다. 그 게으른 자의 ‘열망’ 속에 일은 포함되어 있지 않고, 일하지 않는 그가 소득과 식량이 있을리 만무이기 때문입니다. 그 밭의 소유자는 가난할 수밖에 없습니다(24:30-34). 그러므로 일하기 싫어하는 욕망이 게으른 자를 죽인다는 잠언의 교훈은 타당합니다. 여기서의 죽음은 신체적 죽음은 물론, 영원한 심판까지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는 게으름이란 잠언은 물론 성경 전체를 통해 큰 죄악으로 평가되기 때문입니다. 실로 게으름은 많은 죄의 원천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게으른 자도 음식과 거처에 대한 필요와 욕망은 크지만, 소득이 없어 이웃의 소유를 탐내게 되고, 그에 따른 범죄의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또한, 게으름 때문에 자녀 교육 시기를 놓치게 되면, 그 결과는 매우 심각하게 됩니다. “자녀에게 기술을 가르치지 않는 부모는 도둑질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라고 한 어느 유대 랍비의 말처럼, 교육과 기술 없이 자란 자녀의 장래는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이런 이유로, ‘게으름(나태)’이 고대의 7가지 치명적인 죄들의 목록에 들어 있고, 이를 경계하는 잠언도 20-30 구절이나 됩니다. 문제는, 게으른 자는 많은 핑계를 가지고 있으며(22:13), 지혜롭게 판단하여 부지런히 살아가는 자들보다 자신을 더 똑똑하다고 생각한다는 점입니다(26:16). 심히 어리석은 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게으름은 이 같이 큰 죄악이라, 게으른 자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부지런한 사람의 손은 남을 다스리지만, 게으른 사람은 남의 부림을 받는다.” (잠언12:24새번역).
잠언21:26절
“어떤 자는 종일토록 탐하기만 하나 의인은 아끼지 아니하고 베푸느니라.”
본 잠언에 나오는 ‘어떤 자’는 후단의 의인에 비추어 악인이고, 25절과 연관하여 보면 그 악인은 ‘게으른 자’의 원초적 모습니다. 솔로몬은 게으른 자의 악한 모습을 강조하기 위해 히브리어 원문을 ‘종일토록’이란 단어로 시작하고, ‘욕망하다’는 동사 ‘아바’에 이어 ‘욕망’이란 명사를 또 써서 그 악인의 탐욕을 강조합니다. 이로써, 악인은 게으름에서 더 나아가 탐욕이라 본성을, ‘의인’은 부지런함은 물론 아낌 없이 베푸는 본성도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어떻게 이런 차이가 날까요? 주님을 경외하느냐 여부입니다. 사실, 사람마다 좀 더 나은 집, 음식, 명예, 건강, 지식 등을 추구하려는 욕구가 있습니다. 그러나 의인은 주님을 경외하기 때문에, 그분의 계명을 따라 그 욕구를 재조정시켜, 자신과 이웃의 이익을 동시에 고려할 줄 아는 덕목을 갖추었습니다. 또한, 의인은 지혜자입니다. 그는 빈부가 섞여 살도록 만드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알기 때문에(잠언22:2), 주저하지 않고 합당한 자에게 베풀어 주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이와 달리, 탐하는 자는 어리석어, 주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 배를 채우는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모두 다 의인이라고 주장하지만, 사건이 일어나 밝힙니다. 고아와 과부처럼 힘 없는 자의 법적 권리가 문제가 될 때입니다(29:7). 악인은 그들의 권리를 수탈하여 불법적 이익을 도모하지만, 의인은 자신의 사적 이익에 반하더라도, 그들의 정당한 권리를 지켜줌으로써, 가정, 교회, 사회에서 의의 열매를 맺게 합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의 특징입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약3:18).
잠언21:27절
“악인의 제물이 역겨운 것이라면, 악한 의도로 바치는 것이야 더욱 그렇지 않겠는가?”(새번역)
이 잠언의 ‘악인’은 문맥 상 ‘교만한 자, 게으른 자, 거짓말하는 자, 뻔뻔한 자, 탐하는 자’를 포함하고 있으며, 그들은 자신의 이기적 욕망을 성취하려고 살지, 하나님의 뜻을 행할 생각은 추호도 없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삶을 잘 아시기 때문에 그들의 제물을 역겨워 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악인이기에 제물조차, 남을 속이거나, 약자를 수탈하거나, 음란하고 더러운 방법 등을 통해 얻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제물은 너무나도 싫어하셔서 받지 않으시겠다고 모세를 통해 못박으셨습니다 (신23:18). 하물며, 그 악인이 악한 의도로 바치는 제물은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악한 의도라 함은 공동체를 해치고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악한 계획을 말합니다. 어떻게 이런 제사가 가능하겠습니까? 먼저 이방세계의 신 관념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이방인들에게 ‘신’이란 인간과 같은 욕망을 가진 힘센 존재일 뿐입니다. 신은 인간으로부터 제물을 받고 싶어하니, 제물을 바치고 그 대신 자신의 계획을 이루어 달라는 일종의 거래요 뇌물입니다. 이 같은 이방의 제사 관념은 성경에서 용납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 헌금, 찬송 등은 그 사람의 마음의 표현입니다. 따라서 예배 드리는 자의 삶과 마음의 동기가 하나님 앞에 아름다워야 기도와 제사가 열납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벨과 그의 제물은 열납하시고, 가인과 그의 제물을 거부하신 것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창4:5). “하나님의 집으로 갈 때에, 발걸음을 조심하여라. 어리석은 사람은 악한 일을 하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제물이나 바치면 되는 줄 알지만, 그보다는 말씀을 들으러 갈 일이다” (전5:1,새번역).
시편133: 1절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3행으로 이루어진 본시는 다윗의 작품으로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중 하나입니다 다윗은 형제들이 동거하며 화목한 모습을 보고, 그 아름다움을 제사장 아론의 머리 위에 부어진 기름이 수염과 옷깃에 흘러내리는 모습과, 이스라엘에서 가장 높은 산 헐몬(2814m)에서 생성된 이슬이 바람을 타고, 240km를 날아와 시온 산(754m)에 내리는 모습에 비유합니다(2). ‘거기서’ 다윗은 주님이 주시는 영생의 축복을 발견합니다(3). 본시에 나오는 ‘형제’를 좀 더 범위를 넓힌다면, 이스라엘 12지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광야 40년은 물론 가나안 정복 후에도 이들 사이에 갈등은 언제나 존재하였지만, 다윗 왕에 이르러 질서가 잡히고 화평이 정착되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 사후, 이스라엘 민족은 서로 반목하다가 제국에 의해 멸망 당합니다. 중요한 것은 육신의 이스라엘 민족은 영적 이스라엘인 교회의 상징임을 아는 것입니다. 둘의 차이는 ‘마음의 할례’여부입니다. ‘마음의 할례’란 죄를 회개하고 주님의 뜻을 행하고자 결심하는 자들로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성령님과 보조를 같이 하며 ‘의의 열매’(빌1:11), 혹은 ‘성령의 9가지 열매’(갈5:22-23)를 맺고 살아갑니다. 교회는 이방인과 유대인, 조선인, 헬라인, 중국인, 종, 상전, 남자, 여자 모두가 모여들어 한 주님을 섬기고 사랑 가운데 참된 것을 행합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영원한 부활의 생명을 주고 계십니다(요10: 28;11:25,26). 이것이 본시에서 말한 영생의 이상이 성취된 모습입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17:3).
시편134: 1절
“밤에 주님의 집에 서 있는 주님의 모든 종들아, 주님을 송축하여라.”(새번역)
본시는 120편에서 시작된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의 마지막 편이며, 모두 3행입니다. 순례자들은 마침내 예루살렘 성전에 도착하여, 밤낮으로 주님을 섬기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보게 되었습니다(1). 순례자들은 그들에게 주님을 송축하라고 요청합니다(2). 그러자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천지를 지으신 주님이 주시는 축복을 받으라고 화답합니다(3). 각 절마다 ‘축복을 받으라’는 단어 히브리어 ‘바락’이 등장하며, 개정개역과 새번역은 ‘송축하라’(1,2), ‘복을 내려 주시기를’(3)로 번역하였습니다. 따라서, ‘축복’이란 말은 본시의 주제어입니다. 1,2절에서는 하나님을 향하여 ‘송축하라’고 말하나, 3절에 이르면 인간으로 방향이 바뀝니다. 성경학자 키드너는 ‘하나님을 축복(송축)하는 것은 그분이 어떤 분이심을 인정하고 감사드리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람을 축복하려면, 그를 제대로 된 존재로 만드신 후, 그에게 없는 것을 주셔야만 한다”고 말하여, 유한한 인간과 ‘하늘과 땅을 지으시고, 한량 없이 인간에게 복을 주시는 은혜의 하나님을 잘 대조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길과 판단을 측량할 수 없지만 축복의 발원지는 알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시온입니다. 시온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갈 수 있는 특정 장소 예루살렘으로서, 참된 시온 산인 하나님과 부활하신 주님이 계신 하늘의 새 예루살렘을 상징합니다(히12:22-24). 시온 신학을 깨달아야 합니다. 마치 하나님의 계명이 멀리 있지 않고 우리의 입술에 있듯이 모든 사람에게 그분의 축복은 심히 가깝습니다. 시편133편의 축복이 떠 오릅니다. “주님께서 그곳에서 복을 약속하셨으니, 그 복은 곧 영생이다.” (시편133:3b,새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