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21:22절
“지혜로운 사람은 용사들이 지키는 성에 올라가서, 그들이 든든히 믿는 요새도 무너뜨린다.”(새번역)
지혜는 힘보다 낫습니다. 용사들과 요새를 소유한 성주는 매우 안전하다고 생각할 것이나,역사는 그렇지 않은 실례들도 많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갈공명이나 사마중달과 같은 지략가의 탁월한 전략 앞에서는 험준한 요새도 소용없습니다. 성경의 대표적 사례가, 바벨론의 함락입니다. 수 많은 용사들이 지키고, 유부라데스 강이 해자를 두르고, 길이 27.2Km, 높이 12미터의 이중의 벽으로 둘러싸인 바벨론은 난공불락의 성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바벨론 왕 벨사살은 포위하고 있는 페르샤 군대를 무시하고, 술잔치를 베풀며 우상들을 찬양하였습니다. 그때 갑자기 벽에 손가락이 나타나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란 글자를 새겼습니다. 직역하면, “세었다 세었다 무게를 달았다 그리고 나누었다”이며, 의미는 “네 시대가 끝났고 저울에 달려 부족함이 나타났으니 네 나라를 메대와 바사에게 주었다”였습니다. 그 날 밤에 벨사살 왕은 죽임을 당하였습니다(단5장). 헤로도터스와 크세노폰에 따르면, 메대와 바사(페르샤)군대가 강의 흐름을 바꾼 뒤 성을 점령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6세기 이후 대포와 총이 발명되자, 용사니 성이니 하는 것은 전쟁에서 의미가 없게 되었습니다. 지금 미국과 중국은 기술패권 전쟁에 돌입하였습니다. 중국은 인구와 시장을 믿지만, 기술력이 월등한 미국의 승리가 예상됩니다. 그러나 기술과 힘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지혜이며, 지혜의 근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국가가 바른 방향으로 가도록 기도하고 노력할 사명이 교회와 성도에게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 아들아 완전한 지혜와 근신을 지키고 이것들이 네 눈 앞에서 떠나지 말게 하라”(잠언3:21).
잠언21:23절
“입과 혀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역경 속에서도 자기의 목숨을 지킬 수 있다.”(새번역)
만일 누가 “막대기와 돌로는 내 뼈를 꺾을 수 있으나, 말로는 결코 나에게 상처를 입힐 수 없을 것이다”고 장담한다면, 우리는 웃을 수밖에 없습니다. 잘못된 말은 사람을 죽이고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말의 힘을 깨닫고 매우 조심하며, 듣는 자에게 덕을 세우는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이 지혜자입니다. 몇 가지 격언이 있습니다: “당신의 말은 당신이 주인이지만 일단 입 밖으로 나간 말은 당신의 주인이 된다”(스코틀랜드), “아이의 손과 바보의 입은 늘 열려 있다”(스위스), “황소는 뿔로 묶이고 사람은 혀로 묶인다”(불가리아). 야고보서는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3:6)고 경고합니다. 걷는 법을 배웠듯이, 바르게 말하는 법도 배워야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어른답게 말하기”(강원국)라는 책은 도움이 됩니다. 성경은 하나님 앞에 교만하여 정신이상자(바벨론 왕)가 되거나 목숨을 잃은 왕(헤롯 아그립바1세)을 언급합니다. 느부갓네살은 바벨론 왕궁 위에 올라 자신이 이 위대한 도시를 건설하였다고 자랑하자,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정신이상자가 되어 7년을 짐승과 함께 살았습니다. 헤롯 아그립바는 왕복을 입고 연설할 때, ‘신의 소리’라는 백성의 부르짖음을 듣고도 침묵하여 벌레가 창자를 먹어 죽었습니다 (행12:21-23). 사람의 말은 마지막 날 그 자신을 심판하는 근거가 되므로(마12:36,37), 말하기 전에 준비하고 지혜를 위해 기도하여야 합니다. “여호와여 내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시편141:3).
잠언21:24절
“교만하고 건방진 사람을 오만한 자라고 하는데, 그런 사람은 우쭐대며 무례하게 행동한다.”(새번역)
21:20-29절의 주제는 ‘의인의 보존과 악인의 멸망’이며, 20-23절과 24-29절의 둘로 나누어집니다. 전자(20-23절)는 지혜자(의인)의 성공과 안전을 다루고, 후자( 24-29절)는 악인의 4 유형-교만한 자, 게으른 자, 거짓말하는 자, 뻔뻔한 자-과 운명을 교훈합니다. 24절은 악인의 첫째 유형인 ‘오만한 자’를 등장시킵니다. ‘오만한 자’의 원어는 ‘레츠’로서 ‘입을 삐죽거리다’ ‘업신여기다’라는 뜻입니다. ‘오만한 자’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사람을 업신여기며 진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본절은 ‘교만하고 건방진 사람’으로 정의합니다. ‘오만한 자’가 우쭐대며 무례하게 행동하는 것은 ‘자신의 중요감’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 지혜자, 계시된 진리를 무시하는데, 하나님 보다 자신이 더 중요하며, 자신의 판단은 지혜자나 진리 보다 낫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의 ‘육신에 속한 사람’의 전형으로, 그의 종말은 ‘사망’입니다(롬8:5-8). 이에 반해 지혜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공의, 인자, 사랑, 겸손, 근면과 같은 덕을 쌓아가고, 이웃과 화목합니다. 이솝이야기 중 하나입니다. 닭장에 있는 두 마리 수탉이 암탉들을 놓고 서로 싸워 한 놈이 승리하였습니다. 승리한 수탉은 기쁨에 젖어 ‘꼬끼오’를 외치며 고개를 쳐들었을 때, 마침 공중에 배회하던 독수리가 내려와 채어갔습니다. 이제 암탉들은 패배한 수탉의 차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고, 겸손한 자들에게 은혜 베푸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벧전5:5). “주님을 경외하라는 것은 지혜가 주는 훈계이다. 겸손하면 영광이 따른다.”(잠언15:33,새번역)
시편131:2절
“오히려, 내 마음은 고요하고 평온합니다. 젖뗀 아이가 어머니 품에 안겨 있듯이, 내 영혼도 젖뗀 아이와 같습니다.”(새번역)
시인 다윗은 평화로운 마음의 상태를 어린아이에 비유하였습니다. 특히 ‘젖뗀 아이’를 두 번 반복하여 그 평온에는 만족이 들어 있음을 강조합니다. 어머니의 젖을 충분히 먹고,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있는 아이는 세상에 더 부러울 것이 없습니다. 주님 안에 있는 시인 역시 같았습니다. 다윗이 이런 만족의 경지에 이른 것은 왕이었기 때문은 결코 아닙니다. 그는 범죄하여 왕국과 가정에는 많은 풍파가 있었습니다. 압살롬에게 쫓겨 그는 울며 맨 발로 걸어 길르앗으로 도망쳤으며, 하나님의 은혜와 전쟁의 지혜, 그리고 용감한 부하들을 통해 반란을 진압한 쓰라린 경험도 있습니다. 인생의 영욕을 모두 다 겪은 다윗은 자족의 비결을 배웠습니다. 1절이 그 비결을 말합니다: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그것은 자신을 높이라는 이기적인 잔소리나, 초조와 두려움이 주는 기만적 속박으로부터 자유이고, 오직 주님만을 의지할 때 나오는 능력입니다(3). 신약에서는 바울이 그런 은혜를 고백합니다. 빌립보서 2:3절은 “이기심이나 자만으로 아무것도 하지 말아라”고 명령하며, 4:11절은 “내가 만족하기를 배웠다”고 말합니다. 이는 자신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빌4:13). 부, 지식, 권력, 지위, 명예, 건강 등을 자랑하는 이 세상은 안개와 같이 사라질 것입니다(약4:14). 따라서 우리는 주신 은혜에 만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아, 이제부터 영원히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여라.” (시편131:3,새번역).
시편132:12절
“네 자손이 내 언약과 그들에게 교훈하는 내 증거를 지킬진대 그들의 후손도 영원히 네 왕위에 앉으리라 하셨도다”
본시는 그 옛날 다윗 왕이 예루살렘 성을 점령하고 기럇여아림에 있던 법궤를 옮겨 안치한 역사적 사건(1-9)과 주님이 다윗에게 한 영원한 왕위의 언약이 배경입니다(10-18). 먼저 100년 이상 아비나답의 집에 있던 법궤를, 시온에 안치한 왕 다윗과 이스라엘은 매우 기뻤습니다;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가매 다윗이 소와 살진 송아지로 제사를 드리고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환호하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오니라”(삼하6:13-15). 다윗 왕은 여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성전 건축을 마음에 두었습니다. 주님은 이를 허락하지 않으시고 선지자 나단을 보내 언약을 맺습니다. 그것이 유명한 다윗의 언약이며(삼하7:11-14), 본시의11,12절에 요약되었습니다. 그리고 시온은 하나님의 영원한 거처이며, 예루살렘의 번영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으로 시를 맺습니다(13-18). 다윗이 죽자, 솔로몬은 성전을 세웠습니다. 불행히도, 이스라엘 자손은 “다윗의 언약”과 “시온 신학”의 참뜻을 깨닫지 못하고, 성전을 우상화하다가 성전과 함께 멸망 당하였습니다. 성전은 메시야를 상징하는 건물일 뿐이며(요2:19-22), ‘다윗 언약’의 요건은 주님의 뜻을 행해야 하며, ‘시온 신학’의 참 뜻은 다윗이 상징하는 참된 왕 메시야를 통한 하나님 나라의 건설입니다(시편110:1-6).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사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갈4:4). 할렐루야!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엡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