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3/2/20-24)

잠언21:19절
“다투며 성내는 여인과 함께 사는 것보다 광야에서 사는 것이 나으니라”

9절과 19절은 동일한 내용이나, 표현상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두 구절은 모두 ‘보다 낫다’란 구문, 남편과 다투는 아내의 행동, 그리고 단락 분할의 기능은 같습니다. 그러나 19절의 여인은 성까지 내며, 남편을 위해 ‘움막’이 아니라 황량한 ‘광야’가 등장합니다. 이는 본 구절의 남편의 처지가 9절에 묘사된 남편보다 더 나쁜 상황에 처해 있음을 말합니다. 광야는 황량하며 고독하며 위험하고, 삶의 수단이 거의 없는 곳입니다. 욥은 학대받는 가난한 자를 거친 광야의 들나귀에 비유합니다(욥24:5). 그 가난한 자는 ‘소나기에 젖고 가릴 것이 없어 바위를 안고’ 살아가는 처량한 신세입니다(욥24:8). 따라서, 솔로몬은 잔소리하는 아내를 둔 남편의 처지를 그 학대받는 가난한 자와 유사하다고 평가하는 것입니다. ‘다투며 성내는 여인’은 남편을 학대하는 것과 다름없기에, 그 여인은 가정의 화목을 위하여 남편의 마음을 편하게 해 줄 지혜를 모색해야 합니다.  ‘우르사’의 광고 모델로 잘 알려진 백일섭(1944년생) 씨는 아내와 오랫동안 대화가 단절되었고, 아들에 따르면 심히 다투었다고 합니다. 그는 배우 아버지로서 집안에서 대우를 받고 싶고, 위로도 받고 싶었지만 잘 안되었던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2017년에 졸혼을 선언하고 오피스텔을 얻어 별거하였습니다. 그는 혼자 사는 것이 쉽지 않지만 생활이 자유롭고 마음이 편하다고 토로합니다. 에베소서는 그리스도인들의 결혼을 주님과 교회 간의 비유임을 밝히며, 좋은 부부관계를 위한 지침을 제시하기에 유념해서 간직해야 합니다(엡5:22-33).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 같이 하고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엡5:33).

잠언21:20절
“지혜 있는 자의 집에는 귀한 보배와 기름이 있으나 미련한 자는 이것을 다 삼켜 버리느니라”

21:20-29절의 주제는 ‘의인의 보존과 악인의 멸망’이며, 20-23절과 24-29절의 둘로 나누어집니다. 20-23절은 지혜자(의인)의 성공, 승리, 그리고 안전을 다루며, 그 중 오늘 본문(20)은 경제적인 측면에서 지혜자와 미련한 자를 비교합니다. 전단에서 ‘귀한’의 원어는 ‘네흐마드’로서 ‘기뻐하다, 열망하다’의 뜻입니다. 따라서, ‘귀한 보배’는 많은 사람들이 열망하는 보물을 뜻합니다. ‘기름’이란 손님의 머리나 의복에 부어 환대를 표시하는 매우 값비싼 물건이며, 흔히 부의 상징으로 여겨졌습니다. 슬기로운 경제 활동을 하여야 이런 ‘귀한 보배와 기름’을 가질수 있습니다. 그 반면, 미련한 자는 규모 없이 살고 당장의 쾌락과 허영에 몰두하기에, 본래 소유한 재산마저도 탕진합니다. 본문의 ‘삼켜 버린다’는 말이 잘 표현해 주듯이, 미련한 자는 마치 음식을 한 입에 털어넣듯이, 순식간에 재산을 없애버립니다.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탕자의 모습입니다. 유대인들은 13살이 되면 성인식을 올리며, 통상 5만달러를 친척들로부터 받습니다. 따라서 13살부터 돈을 다루는 기술을 터득하기에, 유대인들 가운데 부자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모든 것이 그렇듯이, 부는 목적이 아니라 수단입니다. 부자는 부라는 수단을 통해 주님을 경외하는 법을 터득할 수 있어야 합니다(딤전6:17-19). 그러므로 운동,여행, 일과 같이 경제활동 역시 일찍 시키면서, 주님 경외하는 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너의 재산과 땅에서 얻은 모든 첫 열매로 주님을 공경하여라. 그러면 너의 창고가 가득 차고, 너의 포도주 통에 햇포도주가 넘칠 것이다.”(잠언3:9,10, 새번역)

잠언21:21절
“정의와 신의를 좇아서 살면, 생명과 번영과 영예를 얻는다.”(새번역)

21절은 20절에 등장하는 ‘지혜로운 자’의 경제적 축복의 원인을 밝힙니다. 전단은 지혜자의 집이 보배와 기름으로 끝없이 채워지는 이유는 그가 정의와 신의를 쫓아서 살기 때문이며, 후단은 그런 자는 단순한 경제적 보상을 넘어 생명, 번영 및 사회적 명예까지 얻게 됨을 가르칩니다. 이는 지혜자(의인)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서, 재물은 그분의 뜻을 행하도록 주어진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잠언22:4절은 “겸손한 사람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받을 보상은 재산과 영예와 장수이다.” (새번역)라고 다시 한번 말씀합니다. 물론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정의’의 원어는 ‘체다카’로서 하나님의 뜻에 따른 바른 삶을 말하며, ‘신의’는 ‘헷세드’의 번역으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변함없이 사랑하시듯이, 인내와 관용으로 이웃을 선대하는 삶을 말합니다. 또한 ‘쫓아서’의 원어는 ‘라다프’로서 ‘뒤따르다, 추적하다’를 뜻합니다. 이 동사는 흔히 전쟁이나 침략의 목적으로 다른 사람이나 집단을 뒤쫓을 때 사용되어, 아주 강력한 결의와 힘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의와 신의를 쫓아서 산다’는 말의 함의는 돈을 벌듯이, 전쟁의 승리를 위하듯이, 그런 덕목을 실천하려고 힘을 다해 몸부림치는 모습으로써, 그리스도 제자들의 삶의 기본원리입니다. 주님은 우리들에게 ‘그분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먼저 구하라’하심으로 하나님 사랑을 앞에 두고, 우리의 이익과  세상 필요는 그 다음으로 두면, 세상 사람들이 그토록 원하는 모든 것들을 더하여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마6:33). 본 잠언에 대한 훌륭한 주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6:24)

시편130:1,4절
“주님, 내가 깊은 물 속에서 주님을 불렀습니다(1)…..용서는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므로, 우리가 주님만을 경외합니다(4).”(새번역)

시편 중 참회시는 7개이며, 본시는 6번째입니다. ‘깊은 물 속’에 빠진 시인은 구원을 부르짖고, 용서와 구원(속량)의 확신을 향해 착실히 나아갑니다. 시인은 자신의 잘못으로 참당한 상황에 처했습니다(1). 이제 남은 소망은 오직 하나, 주님의 도우심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부르짖습니다. 이 시는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에 도달할 때까지 이 시를 부르고 또 불렀습니다. 시인이나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우리 모두는 연약합니다. 누구든지 깊은 고난에 처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 대신 눈에 보이는 다른 피조물(권력자, 부자, 재물 등)을 의지하기 쉬우나, 구원은커녕 그들에게 이용당할 뿐입니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달은 시인은 이를 고백하며 주님의 용서를 구합니다(3,4). 죄악을 지켜보시는 주님 앞에서 누가 감히 결백을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그분의 천 마디에 단 한 마디도 대답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자하신 주님은 용서하시는 분이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주님의 권한입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4). 시인은 구원하실 주님을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 간절하게’ 기다리면서(6), 이스라엘 전체로 시선을 돌려 ‘이스라엘을 모든 죄에서 속량하시는’ 주님을 소망합니다(8). 시인이 고대하는 주님은 어느 날, 대가를 지불하시고 당신의 백성을 속량하실 것입니다. 그의 바람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할렐루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롬3:24).

시편131:1절
“주님, 이제 내가 교만한 마음을 버렸습니다. 오만한 길에서 돌아섰습니다. 너무 큰 것을 가지려고 나서지 않으며, 분에 넘치는 놀라운 일을 이루려고도 하지 않습니다.(새번역)

본시는 다윗의 시로, 모두 3절이며, 오늘은 1절만 묵상하겠습니다. 중년에 접어든 다윗 왕은 흔히 범하기 쉬운 두 가지 죄를 버렸습니다. 하나는 교만이요, 또 하나는 주제넘는 오만입니다. 교만은 타인을 과소평가하지만, 오만은 자신을 과대평가합니다. 둘 다 패망의 길입니다. ‘교만’에 대한 해답은 빌립보서2:5-8절의 주님의 모습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본체시지만,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사 종의 형체(사람)를 가지셨으며,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으심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들 모두 이렇게 타인을 배려하고 겸손합니다. 재물을 의지하고 타인을 내려다보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기실 부자만은 아니지요. 우리 모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따르는 삶은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만 가능합니다(마19:26). 한편, ‘오만’에 대한 대답은 빌립보서 3장의 사도 바울의 고백이 좋은 예입니다. 그는 바리새인적 의, 즉 모세율법을 행함으로 얻는 자신의 의를 버렸습니다. 그 의는 본질적으로 타인과 나를 구별하는 의로서,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습니다. 할례, 안식일, 음식규정이 대표적입니다. 이때문에 유대인은 이방인과 함께 음식을 먹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오직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를 붙잡고, 모든 사람을 포용하였습니다(갈3:28).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쫓아 달려갔습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고전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