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3/2/6-10)

잠언21:13절
귀를 막고 가난한 자가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면 자기가 부르짖을 때에도 들을 자가 없으리라

13절은 10절에 언급한 악인의 구체적인 모습과 그 결과를 보여줍니다. “귀를 막고”라는 표현은 무자비한 자의 악한 성품을 은유한 것입니다. 솔로몬은 그런 행동을 통해 악한 자란 의로움이 결여되어 있고, 정의와 자비에 무감각한 성품의 소유자임을 생생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한편, 악한 사람에게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라는 동해보복법이 작동하는 것이 상식입니다. 후단은 이 교훈을 위해 ‘부르짖다’와 ‘듣다’의 동사 둘을 사용하면서, 악인이 곤경에 빠졌을 때 이웃과 하나님에게서 모두 무시당하다는 사실을 가르칩니다. 본 잠언의 배경은 법정에서 이루어지는 재판과정이 제일 타당합니다. 성경의 예는 많습니다. 그 중 하나는 마태복음18:23-35에 나오는 용서에 관한 가르침의 비유입니다. 한 임금이 종들과 결산할 때,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왔습니다. 그러나 그 종은 갚을 재산이 없어서, 주인은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절망한 그 종은 엎드려 절하며 다 갚겠으니 참아달라고 간청하니,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풀려난  그 종은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를 만나자 그의 간청에 귀를 막고 옥에 가두었습니다. 주인이 이 사실을 알자, 그를 불러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기야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그 빚을 다 갚도록 옥졸에게 넘겼다는 내용입니다. 주님은 교훈하십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마18:35).

잠언21:14절
은밀하게 주는 선물은 화를 가라앉히고, 품 속에 넣어 주는 뇌물은 격한 분노를 가라앉힌다.”(새번역)

본절은 긍정적으로도 부정적으로도 해석될 수 있습니다. 먼저 긍정적인 해석입니다. ‘은밀하게 주는 선물’은 외부에 과시하지 않고 조용히 건네는 선물입니다. 이런 선물은 상대방의 분노를 가라앉힐 수 있는데, 심지어 뇌물이라 하더라도 동일한 효과가 있기에, 잠언은 지혜로운 인간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는 견해입니다. 성경의 예로, 야곱이 20년만에 돌아올 때  격분한 형 에서의 분노를 가라앉히려고 예물을 보냈고,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습니다. 또한 헤롯 아그립바 1세가 두로와 시돈 사람들에게 격분하자, 신하 블라스도를 매수하여 화목하기를 청하였습니다. 그들의 방법은 성공하여 헤롯과 화해하였으나, 헤롯은 백성 앞에 연설 후 재앙으로 죽었습니다. 이들이 ‘신의 소리’라고 크게 부르짖었을 때 그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은 이유였습니다(행12장; 요세푸스의 유대 고대사). 다음으로, 부정적인 해석입니다. 잠언은 정의를 굽히고, 자신의 이익을 위한 뇌물공여를, ‘품 속에 넣어 준다’는 표현을 써서, 뇌물(선물)을 건네는  은밀한 모습을 부각시키고 있다는 견해입니다. 통상 은밀하고 비밀스럽게 전해지는 선물은 분명, 뇌물로서 정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13절과 함께 생각한다면, 평소 자비를 베풀지 않는 악인이, 위기의 상황을 맞아 뇌물을 써서 권력자의 분노를 잠재우는 모습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두 견해 모두 타당하여, 주고 받는 사람들의 의도, 때와 장소 등을 고려하여 선악을 판단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경외하는 잠언의 제자는 가장 좋은 길이 주어져 있습니다. “사람의 행실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면, 그의 원수라도 그와 화목하게 하여 주신다.” (잠언16:7, 새번역)

잠언21:15절
“정의가 실현될 때에, 의인은 기뻐하고, 악인은 절망한다
.(새번역)

본 잠언은 정의의 실현이 의인과 악인에게 각각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교훈합니다: 의인에게는 기쁨이요, 악인에게는 절망입니다. 그렇게 하시는 분은 주님입니다. 주님은 악인에 대한 의인의 승리를 보장하시는 분으로, 재판장과 같이, 정의가 집행되도록 모든 과정을 거치게 하신 뒤 마침내 승자의 기쁨을 의인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 섭리의 과정에는 주로 각 분야의 지도자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의 인식 여하에 불구하고, 그들 자신은 주님이 사용하시는 종(도구)들이며, 이를 위해 주님은 그들의 마음을 당신의 뜻대로 인도하십니다(21:1). “많은 사람이 통치자의 환심을 사려고 하지만, 사람의 일을 판결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다.”(29:26,새번역)는 잠언도 같은 취지입니다. 이 반면, 정의가 많은 우여곡절을 거쳐 집행될 때, 사회적 약자를 압제하고 속여서 재물을 취득한 악인은 두려움으로 가득차 절망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바른 판결을 받으려면, 주님께 그 사건을 의뢰하고 주님이 정하신 길로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실로, ‘주님의 길’은 우리가 머물러야만 하는 강력한 산성이며, 정의를 베푸시는 분은 주님이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누가복음의 “불의한 재판장과 과부”의 비유입니다. “억울한 일을 당한 과부가 늘 와서 호소하자, 이에 괴로워하는 불의한 재판장조차 원한을 풀어주려고 하였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속히 그 원한을 풀어주실 것이다”하셨습니다 (눅18:1-8). 그러므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야훼의 길을 따라 곧게 살면 친히 힘이 되어주시지만 나쁜 짓을 하면 망하게 하신다.” (잠언10:29,공동번역)

시편 126: 1절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 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시인은 과거에 하나님의 역사로 바벨론에서 귀환한 것을 생각하며 감개무량해 합니다(1-3). 그러나 영토는 이전과 같지만 지배자는 페르샤 제국이고, 여러 이민족들의 비방과 공격, 그리고 자연재해와 싸우면서 살아가야 하였습니다(스1-6장).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님의 도우심이 절실히 필요하였습니다. 1,000년 전 출애굽 당시도 그러하였습니다. 엄청난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육지와 같이 건넜고, 큰 기쁨에 차서 주님을 찬양하였습니다. 그러나 곧 광야의 어려움에 직면하였고, 주님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구속받은 우리도 같습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았지만, 이제 내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이루려 하니, 주님의 능력은 여전히 절실합니다. 기쁨은 과거의 사건이고, 눈물이 현재를 점령하면서, 미래가 걱정이 됩니다. 주님께서 과거와 같이 지금 행동하신다면! 그런 열망에 사로잡혀, 시인은 네게브의 와디(건천)에 물이 흐르도록 기도합니다(4). 만약 주님이 비를 내리시면 메마른 시내는 갑자기 많은 물이 흐를 것이고, 그을린 땅은 아름다운 정원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냉엄한 현실에 직면하자, 시인은 하나님의 섭리를 묵상하고, 추수의 비유로 그것을 풀어내립니다. 일전에 큰 능력으로 구원받은 백성들은 씨 뿌리는 힘든 노동과 이 노동을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비로서 곡식을 수확할 수 있으며, 그 때에야 기쁨의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5-6). 이는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의 계획 때문입니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사람은 기쁨으로 단을 가지고 돌아온다.”(시편126:6,새번역)

시편 127: 1절
“주님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집을 세우는 사람의 수고가 헛되며, 주님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된 일이다.”(새번역)

127편은 일의 3 분야, 즉 집, 도시(1), 그리고 가정(3-5)을 들어, 주님 없이는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단언합니다. 전문가들은 여러 문제를 토론하며 해법을 제시하나, 성취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가장 중요한 원칙을 빼놓습니다. 만약 하나님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집, 도시, 그리고 가정에 대한 바른 이해도, 바른 세움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1-2절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겨서, 그분이 일하시도록 하고 너는 가서 휴식 있는 삶을 즐기라”고 제안합니다. 성경에서 휴식의 반대는 일(work)이 아니라, 근심 걱정 등으로 제대로 쉬지 못함을 말합니다. 3-5절이 이런 잘못된 태도를 교정합니다. 주님은 임신과 출산이라는 인간의 활동을 정하셨기에, ‘태를 여는 것과 닫는 것’ 역시 주님이시며 (창29:31;30:2), 인간은 그분의 대행자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자녀들은 우리의 성취물이 아니라 그분의 선물입니다(3). 집(가정)을 세우는 것과 성을 지키는 것도 같습니다(1-2). 모든 삶은 충만히 살아야 합니다. 즉, 삶이 주는 모든 기쁨을 누리며, 성공여부에 대한 걱정을 주님께 맡기고 책임과 의무를 다 하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루시는 분은 주님이시지만. 각 사람에게 그 일을 위임하셨기 때문입니다- 군인(파수하는 일), 건축가(집짓는 일), 주부(살림). 주님을 사랑하는 자의 삶은 즐거움, 고된 일, 그리고 근심없는 휴식으로 특징짓습니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시편12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