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21:10절
“악인은 마음에 악한 것만을 바라니, 가까운 이웃에게도 은혜를 베풀지 못한다.”(새번역)
본 잠언의 악인은 습관적으로 나쁜 일을 하는 자들입니다. ‘마음’의 원어는 “네페쉬’이며, 생물이나 사람과 같이 “살아 있는 존재’를 의미합니다. 잠언은 이 단어를 사용하여 악인은 오직 악한 것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생물과 같다는 색조를 전달합니다. 만약 이를 ‘욕망’이나 ‘의도’라고 표현하더라도, 악행에 몰두하는 악인의 모습을 그려주는 강도는 현저히 떨어질 것입니다. 따라서 개정개역은 ‘영혼’으로 번역하였습니다. 한편, ‘가까운 이웃’은 그들의 악함을 확실히 보여주는 예입니다. 이웃 사랑의 결여는 악인의 가장 큰 특징입니다. 사랑이 없기에, 악인은 가족이나 친척, 친한 친구라고 할지라도 자신의 악한 목적달성에 방해가 된다면 무자비하게 대합니다. 사랑이 결여된 이유 중 하나는, 하나님이 차별 없이 베푸시는 자비(햇빛, 공기, 비 등)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비를 배우지 못하니, 타인은 다만 이익추구의 수단으로 전락합니다. 만약, 그 타인이 자신의 가장 가까운 가족일 경우, 큰 비극이 발생합니다. 그 전형이 가인입니다. 가인은 동생 아벨을 쳐서 죽였습니다.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만 받으셨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반성하여 자신의 행동을 고치는 대신, 아벨만 없으면 된다는 지극히 이기적인 길로 행하였습니다. 그 반대가 의인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여 그들의 유익을 도모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더 나아가 그 유익을 은밀하게 행합니다. 그들이 바라는 가장 큰 ‘상’은 오직 우리 주님으로부터 받는 인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의인의 길은 주님께서 인정하시지만, 악인의 길은 망할 것이다.” (시편1:6, 새번역).
잠언21:11절
“오만한 사람이 벌을 받으면 어수룩한 사람이 깨닫고, 지혜로운 사람이 책망을 받으면 지식을 더 얻는다.”(새번역)
본 잠언은 오만한 자의 벌과 지혜자의 번영을 전제하면서, 이런 결과는 쉽게 흔들리는 어수룩한 사람의 교훈에 효과적임을 밝힙니다. 두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먼저, 11절의 취지는 어수룩한 사람과 지혜로운 사람의 특성을 대조한다는 관점입니다. 이에 따르면, 어리숙한 사람은 교훈만으로는 깨닫지 못하고, 체험(예- 벌을 받는 오만한 자를 목격함)을 해야 비로서 배우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가르침을 통해서 바로 지식을 얻는 자라고 생각합니다(잠언19:25). 다른 견해는, “어수룩한 사람은 오만한 자가 받는 벌을 보고 깨달아 지혜자가 되고, 그 후에는 책망만으로도 변화될 수 있다.”고 읽습니다. 이에 따르면, 어수룩한 사람은 이중의 교육과정을 거칩니다: 첫째, 오만한 자가 받는 벌을 보고, 범죄와 형벌 사이의 인과관계를 배웁니다. 둘째, 그 배움은 분별력으로 이어지고, 미덕과 보상의 관계를 배우는 데까지 갑니다. 그땐 지혜자가 되어 있습니다. 한편, 잠언의 목표는 “주님을 경외하는 지혜자”를 만드는 것이며(1:8), 이는 복음 안에서 성취되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지혜의 정수는 그리스도입니다 (고전1:24). 복음을 깨달으면,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고, 죄인은 의인으로 변화됩니다. 그는 은혜에 감격하고, 소망 가운데 인내하며 사랑의 수고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잠언의 이상인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자’의 탄생입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할 수 없는 것은, “이 복음은….모든 믿는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롬1:16)이기 때문입니다.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네가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도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 (잠언3:15).
잠언 21:12절
“의로우신 자는 악인의 집을 감찰하시고 악인을 환난에 던지시느니라”
12절은 오만한 자는 물론, 모든 악인을 다루시는 주님께 눈을 돌립니다. ‘의로우신 자’는 하나님을 지칭하는데, 이는 그분이 온 우주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당신이 다스리는 세상에서 경건한 자를 압제하는 악인을 뽑아 내시려고 최선을 다 하실 것입니다. 세속 역사는 그 배후에서 일하시는 주님의 활동을 포착하지 못합니다만, 성경기자들은 그것을 보고 기록하여 우리로 교훈을 얻게 합니다(고전10:1-12). 창세기에 노아 시대의 홍수가 나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땅에 폭력이 충만하고 어릴 때부터 악한 자들로 가득차자, 하나님은 홍수를 보내어 모두 죽이셨습니다. 오직 의를 행하는 노아와 그 여덟식구만이 살아남았습니다. 이어 아브라함 시대의 죄인들 소돔과 고모라 성읍 위에 불과 유황을 비오듯이 퍼부어 멸망시켰습니다. 오직 의로운 롯과 그 가족만 구원하셨습니다. 이 진리는 빌립보 간수에 대한 사도 바울의 전도와 연결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러면 너와 네 가족이 구원을 받으리라)(16:31). 한편, 출애굽기는 이스라엘 백성을 압제하는 애굽 왕 바로와 그 백성들을 심판하시고, 재앙에 던지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증거합니다. 사사기부터는 애굽에서 구원하시고 가나안 땅을 주어 살게 하신 이스라엘 백성의 삶을 감찰하시고, 그들이 반역의 길을 걸어 갈 때마다 이방민족을 통해 징계하시지만, 회개하면 구원자를 보내 구원하시는 사이클이 반복됩니다. 사무엘서나 열왕기서도 다 그런 이스라엘 왕조의 역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유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삶이 지혜의 길입니다. “악한 사람은 얼굴이 뻔뻔스러우나, 정직한 사람은 자기의 행실을 잘 살핀다.”(잠언21:29,새번역)
시편 124: 1절
“이스라엘아, 대답해 보아라. 주님께서 우리 편이 아니셨다면, 우리가 어떠하였겠느냐?”(새번역)
다윗의 구원의 위대함을 4가지 큰 위험에 빗대어 노래합니다. 먼저, 지진입니다. 지진은 너무나도 무섭습니다. 거기에 빠지면 살아날 수 없습니다(3). 둘째는, 홍수입니다. 홍수는 모든 것을 휩쓸어 가기에 생존할 가망이 없습니다(4).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렇게 강한 원수로부터 구원받았습니다. 셋째, 사나운 맹수를 만나면 산 채로 잡혀 죽습니다(6). 넷째, ‘새 사냥꾼’의 올무에 걸린 새도 같은 운명입니다(7). 그러나 이스라엘은 전혀 다치지 않고 원수의 그물에서 벗어났으며, 위협 그 자체도 파괴되었습니다(7). “주님은 어떤 위험으로부터도 구원하실 수 있다!” 이는 다윗의 고백이자 우리의 믿음입니다. 사무엘하5장은 좋은 예를 제공합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을 통일하고 왕으로 등극하자, 분노한 모든 블레셋인들이 베들레헴 근처 르바임 골짜기에 모여 두 번 공격하였습니다. 그 위협을 본 다윗의 기도에, 하나님은 처음에는 승리의 확신만을, 다음에는 구체적인 전략을 주심으로 모두 승리합니다(삼하5:17-25). 그 다윗도, 이스라엘 백성들도 죽었습니다. 그래서 신약에 이르면 다윗이 드린 이 땅에서의 구원의 노래는 영원한 구원의 주제로 발전합니다. 베드로는 소아시아 성도들에게 쓴 편지에서, 하나님이 우리 주님을 통해 사망을 이기시고 영원한 부활의 소망, 하늘에 간직한 영원한 유업, 그리고 보호하심을 찬양합니다(벧전1:3-9). 구약과 신약의 구원이란 메시지는 동일하나 그 내용은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 소망, 사랑의 삶을 살아가야만 합니다. “천지를 지으신 주님이 우리를 도우신다.” (시편124:8,새번역).
시편 125: 1절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시온 산과 같아서, 흔들리는 일이 없이 영원히 서 있다.”(새번역)
본 시는 주님을 신뢰하는 가운데, 안전을 찾는 신앙 공동체 이스라엘의 고백입니다(1,2). 시인이 속한 이스라엘 공동체는 선과 악이 섞여 분열되었고, 악인들의 득세는 큰 위협이 되었습니다(3). 시인은 주님이 악한 통치를 종식시키실 때를 소망하면서(4), 평화를 기원합니다(5).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왔으나 여전히 페르샤 지배 하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생각하면 잘 이해됩니다. 시의 구조입니다.
A 안전의 근거 (1)
B 주님의 도우심을 신뢰(2)
C 악에 대한 승리의 신뢰(3)
B′ 주님의 도우심을 기도(4–5a)
A′ 평화의 기원 ( 5b)
세 가지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시온 산은 움직일 수 없는 주님의 임재의 상징입니다. 주님을 신뢰하면 어떤 인생의 폭풍에도 안전하게 됩니다. 둘째, 신뢰는 섭리로 통치하시는 주님에 대한 믿음을 포함합니다. 따라서, 악한 자가 득세할 때 신자는 주님의 심판을 믿고 악의 통치가 끝날 때까지 인내합니다. 셋째, 신뢰가 환경에 의해 도전받을 때는 기도의 때입니다. 다만, 그 기도는 악인이 아니라 주님의 백성들을 향합니다. 즉 악인은 주님 손(섭리)에 맡기고 주님의 백성들이 악한 통치에 대항하다가 악에 빠지지 않도록, 그리고 그들의 마음과 환경에 평화가 깃들도록 기도합니다. 요약하면, 시인은 “두려움에 솔직하여라. 그러나 주님을 신뢰하고 두려움 없이 살아가라”고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주님, 선한 사람과 그 마음이 정직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시편125:4,새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