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큐티(2023/1/25-27)

잠언21:9절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사는 것이 나으니라”

이기심은 가장 친밀한 관계인 남편과 아내의 사이도 파괴시킵니다. 집안의 경제적 주도권을 갖고 다투는 모습이 그 예입니다. ‘움막’으로 번역된 원어 ‘까그’는, ‘지붕’ 혹은 ‘집 꼭대기’란 의미로써, ‘움막에서 산다’는 ‘지붕 모퉁이 위에 산다’를 의역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가옥의 지붕은 평평하였기에 사람이 올라가서 일시 지낼 수는 있으나, 비와 이슬을 가릴 수도, 한낮의 폭염과 밤의 추위를 피할 수도 없어 거처하기 어렵습니다. 이와 대비된 ‘큰 집에서 산다’는 문구는 많은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는 큰 저택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전자는 비도 이슬도 피할 수 없는 비참한 삶을, 후자는 윤택하고 여러 사람들과 교제를 나누는 보다 풍성한 삶을 상징합니다. 상식적으로 전자보다 후자가 낫지만, 솔로몬은 ‘다투는 여인’ 때문에 전자가 낫다고 말합니다. 부부가 서로 사랑하여 돕고 살면, 초가삼간도 천국같으나, 늘 분쟁하고 다투면 아무리 유복한 환경이더라도 남편은 오히려 떨어져 혼자 지내고자 할 것입니다. 따라서, 화목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데, 본 잠언은 먼저 아내를 향해 교훈하고자 합니다. 즉, 가정 화목의 비결은 서로 사랑하는 가운데 남편의 권위를 존중해 주면서 가정을 세우는 것이지, 이기적으로 행동하거나 쓸데 없는 자존심을 내세우면 다툼만 일어나니 삼가야 한다! 아름다운 가정을 세우는 아내를 얻은 자야 말로  주님께 은혜를 받은 자입니다(18:22; 19:14). 그러나 그런 가정에는 언제나 남편은 사랑의 섬김을, 아내는 존경을 담은 순종이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덕이 있는 아내는 그 남편에게 영광스런 면류관과 같으나, 부덕한 여인은 남편의 뼈를 썩게 하는 것과 같다.” (잠언12:4,쉬운성경).  

시편 122: 1절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본 시편은 긴 순례의 여정 끝에 마침내 예루살렘 성 내에 들어온 감회를 노래합니다. 시인은 기쁨으로 말합니다. “예루살렘아 우리 발이 네 성문 안에 섰도다”(2). 시인은 메섹과 게달과 같은 ‘먼 나라’(120:5)의 ‘이방민족’들 틈에서 긴장하며 살다가, ‘형제와 친구’들(8)이 사는 ‘집’인 예루살렘에 도착하였다는 감격에 찼습니다. 그는 잘 계획되고 건설된 예루살렘 성의 구조와 각 지파가 몰려들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그리고 다윗 가문을 통한 통치의 모습을(3-5) 보자 저절로 ‘평안과 복’을 위해 기도합니다(6-9). 예루살렘 성의 특징은 한마디로, ‘통일성’입니다. 성의 구조 자체도 그렇고(3), 각기 다른 지파들이 들어오지만 그 모든 사람들이 한 분이신 주님의 백성입니다. 그래서 그들 모두는 주님께 순종하며, 주님을 찬양하고, 주님을 아는 특권을 가진 자들입니다(4). 또한, 그들은 하나님이 임명한 왕을 통해 사건 사건이 바로 잡혀지는 장소에 와 있습니다((5). 그러나, 예루살렘은 이 세상에 속하여 있기에, 시인은 ‘화평과 번영 그리고 복’을 위해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편, ‘예루살렘’은 영적 예루살렘인 교회의 모형입니다. 온 세상에서 아주 다양한 주의 백성이 교회로 몰려들어 한 믿음과 한 소망을 갖고, 한 성령님 안에서 한 주님과 한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그들의 삶의 목표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것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는 것입니다(엡4:1-16). 따라서, ‘기쁨과 일치를 위한 기도’의 부르심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4:15)

시편 123: 1절
“하늘 보좌에서 다스리시는 주님, 내가 눈을 들어 주님을 우러러봅니다.

본 시편은 고난에 처한 시인의 심정과 믿음의 고백을 노래합니다. 121편의 순례자는 태산과 같은 문제를 만났을 때 그 산보다 더 높은 분을 생각하고 이기는 법을 배웠다면, 지금 조롱과 멸시에 둘러싸인 시인 역시 눈을 위로 돌려 같은 승리를 얻습니다. 실로, 시인의 언어와 기도는 암울한 환경을 뚫고 치솟아 올라, 오히려 그런 고난들을 충분히 포함하는 믿음의 넓이를 갖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믿는 하나님은 ‘하늘 보좌에서 다스리시는 주님’으로서, 당신이 기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115:3). 동일한 믿음이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로 이어지기에, 우리의 기도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부터 시작됩니다. 2절에서 시인은 3중의 비유를 사용하면서, 응답을 기다립니다. 그것은 종과 여종이 모든 것을 소유한 주인으로부터 필요한 양식, 휴식, 그리고 도움을 기대하는 간절한 눈길입니다. 신자들은 원망과 불평으로 하나님을 기다리는 괴로움을 완화시키려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교만한 자에게 붙어 ‘조롱과 멸시’(4)를 피하려 하지도 않습니다. 신자의 길은 하나입니다. 주님이 오실 때까지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는’ 믿음의 삶입니다. 끝으로, 시인이 괴로워하는 이유는, 주님의 응답을 기다리는 그를 조롱하고 멸시하는 말 때문입니다: “네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43:3). 욕은 물론 조롱과 멸시의 말은 살인과 다름없어 심판을 받게 됩니다(마5:22). 정반대로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말에는 은혜의 소금을 쳐서 맛을 내야 할 것입니다. “평안하게 사는 자들의 조롱과 오만한 자들의 멸시가 우리의 심령에 차고 넘칩니다” (시편123:4, 새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