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21:6절
“속여서 모은 재산은, 너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안개처럼 사라진다.”(새번역)
악함이란 교만을 등불로 삼고(4), 폭력과 구부러진 말로 표현하며(7-8), 은혜가 없고 타인의 파멸을 갈망합니다(10). 그들은 거만하며(24), 종교적이나 위선되고(27), 뻔뻔하나 반성하지 않습니다(29). 5절의 ‘성급한 사람’은 6절에서 ‘속여서 재산을 모든 사람’으로 묘사되고. 그들의 ‘가난, 결핍’은 ‘죽음과 안개’로 귀결됩니다. 본 절은, ‘속여서 모은 재산’ 자체가 ‘속여 취한 자’를 속인다는 역설을 교훈합니다. 불의한 재물은 안개와 같이 실체가 없기에, “계획하고 부지런히 일하라”는 5절로 돌아가야 하며, 그 길은 교만을 버리고, 정의과 공평을 사랑하시는 주님을 경외할 때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재판장이시기에, 악인의 형통을 미워하시고(4), 악인에게 합당한 벌을 내리실 것입니다. 구약은, 제비를 뽑아 결정하는 것 같은 섭리(6), 혹은 대리자인 왕(지도자)을 통해 집행하시거나(1), 직접 하늘에서 집행하시는 경우 등을 보여줍니다. 첫째는, 범죄자 아간을 찾아낼 때 여호수아가 사용한 방법이고, 둘째는 페르샤 왕으로 하만을 처단하게 하신 경우이며, 셋째는. 소돔과 고모라에 불을 내려 멸망시킨 경우입니다. 물론, 악인이 회개하면 주님은 긍휼히 여기사 용서하시지만, 대가는 치러야 합니다. 그 반면 주님이 미워하는 자는 잠시 그 형통을 더 누리다가 죽음을 맞게 됩니다. 그리고 끝장입니다 (시편73:18,19). 근심은 탐욕을 일깨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삶에 대한 근심을 주님 손에 던져버려야 합니다. 주님의 공급을 신뢰한 뒤, 삶을 계획하고 부지런히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눅12:29).
잠언21:7 절
“악인의 폭력은 자신을 멸망으로 이끄니, 그가 바르게 살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새번역)
“5절의 성급한 사람”은 ‘속이는 자’(6)와 ‘폭력을 행하는 자’(7)로 구체화되었고, 그들의 멸망 이유를 밝힙니다. 이는 그들이 알지만 바르게 살기를 거부하여, 정의와 공의의 주님과 원수되었기 때문입니다. ‘멸망으로 이끄니’는, 히브리어 동사 ‘가라르’의 번역으로 그물에 걸린 물고기를 끌어올리는 동작을 묘사합니다. 역사를 보면, 주님은 악인이 재물과 권력을 위해 펼쳐놓은 그물에 악인 자신이 걸려들어 멸망당하게 하시는 경우가 종종있습니다. 에스더서에서, 모르드개를 죽이고자 세운 그 장대에 하만 자신이 매달려 처형된 사례나, 또, 페르샤에 있는 모든 유대인들을 죽이도록 정한 그 날에 칙령이 바뀌어, 오히려 유대인의 대적들이 집단 처형된 사건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악인도 회개하여 바르게 살면 생명을 얻습니다. 잠언은 이점을 긍정하지만, 어떻게 회개의 기회를 갖게 되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야합니다. 칼과 몽치를 든 큰 무리가 오자, 베드로는 검을 뽑아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쳤습니다. 주님은 “이것까지 참으라 칼을 가진 모든 자들은 칼로 망한다” 하신 뒤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셨습니다 (마26:52). 기적적 치유와 선함을 경험한 말고는 회개할 기회가 왔습니다. 다만, 선택은 말고의 몫입니다. 주님의 이 모습은 그리스도인들이 격한 갈등의 세상에 남겨진 이유 중 하나입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마5:44,45)
잠언21:8 절
“죄인의 길은 구부러졌지만, 깨끗한 사람의 행실은 올바르다.”(새번역)
8절은 3-7절의 결론으로, 하나님은 거만한 자(4), 성급한 자(5), 속이는 자(6), 폭력을 행하는 자(7)에 대하여 ‘죄인’이라고 평가하십니다. 그들의 길은 이중성 때문에 ‘구부러졌습니다.’ 실로,’올바른 길’ ‘곧은 길’은 그들의 미움의 대상입니다. 따라서, 누가 죄인이며,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자냐 하는 것은 말이 아니라, 걷는 길(삶의 방식)을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 반대의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마음이 ‘깨끗한 사람’으로, 행실은 올바르고, 곧은 길을 걸어갑니다. 솔로몬은, ‘길’이란 은유 대신 ‘행실’이라고 적어 단어의 반복을 피하고 이해하기 쉽게 하는 동시에, 그런 행실은 올바른 길을 걸어간 뒤에야 얻어지는 인격의 결과임을 강조합니다. ‘죄인의 길’로 행한 전형이 아담이고,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길이었고, 그것은 다시 전 인류가 걸어간 길로서, 하나님을 반역하고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삶이었습니다. 그 길은 자기 유익만을 구하고, 상대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삶이기에 당연히 구부러질 수밖에 없고, 죄인이란 심판과 함께 벌을 받았습니다. 아담은 사망의 심판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로잡혀 전 세계로 흩어졌고, 모든 인류를 기다리는 것은 영원한 심판입니다. 이에 반하여, ‘깨끗한 사람’이란, 두 마음을 품지 않는 신실한 양심의 소유자로서 바른 길, 상대방의 유익을 구하는 길, 도덕의 길로 곧장 걸어갑니다. 왜냐하면 은밀한 가운데 주의깊게 보시는 하나님의 칭찬은 그들의 참된 보물이며, 주님의 돌보심에 대한 믿음은 그들의 보험이기 때문입니다. 중생한 그리스도인들의 삶입니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6:21).
시편120: 1절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
시편 120-134편의 시는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는 제목을 가졌습니다. 시의 배경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중요한 것은 시의 의미입니다. 15편의 시들은, 세 편씩 다섯 그룹으로 나누어져서 각 그룹마다 다음의 순서로 진행됩니다: 고통의 상황(첫째), 주님의 권능(둘째), 주님 안에서 안전(셋째). 첫 번째 그룹의 시작인 120편은, 고통스러운 상황으로서 시인을 향한 중상모략을 언급합니다. 그는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를 가진 자들로부터 생명의 구원을 위해 주님께 부르짖었고, 응답받았습니다(1,2). 시인은 이 경험을 통해 “환난을 당하면 기도하고 주님의 돌보심 속에 머물러라!”고 교훈합니다. 한편, 4절(장사의 날카로운 화살과 로뎀 나무 숯불)은 악인의 본질이나, 혹은 악인에 대한 확실한 보응을 의미할 수 있지만, ‘보복하지 말고 주님 손에 넘겨라’( 잠언20:22; 롬12:19)는 말씀에 귀착하는 면은 같습니다. 많은 경우에, 잘못, 거짓말, 속임 등으로 피해를 당하였을 경우, 사적인 복수 대신, 그 사안을 주님 손에 맡기고 거기서 떠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평화를 가질 수 없는 이웃들과 함께 살고 있는(5-7) 시인에게서 인내의 모습을 보게됩니다(5). ‘메섹’은 이스라엘 북방 한계 밖에, 게셀은 아라비아 광야 남동부에 있기 때문에, 거치른 세상을 의미하는 은유적 표현입니다. 지금 시인은 평화를 원하나, 세상은 독을 머금고 싸우려 합니다(7).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하신 주님은 만유의 심판자이십니다. 제자들에게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가르치셨습니다.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마5:39)
시편121: 1절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시인은 예루살렘 성전을 향한 순례자의 길에 오르고 있습니다. 만약 요단 동쪽이나 팔레스틴 평야쪽에서 오르고 있다면, 가파른 산 길이 보이면서 큰 산들이 앞에 서 있을 것입니다. 시인의 마음에 질문이 떠오릅니다. 저 산들 속에 강도들이 숨어 있다면 내가 무사히 성전에 도착할 수 있을까? 혹은 인생의 큰 산들이 가로막을 때 나를 지켜주실 분은 누구인가? ‘나의 도움은 어디서 올까?”(1). 이때 시인은 믿음의 눈을 들어 천지를 지으신 주님을 바라봅니다. 시인이 믿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주이십니다. 어떤 것도 그분의 손길을 벗어나 존재할 수 없습니다. 위협이 일어나도, 삶의 여정이 어려워도 그분이 통치하시는 세상의 한 부분입니다(2). 심지어 하늘에 늘 떠 있는 해와 달 역시 그분의 섭리 하에 있기에 안전하게 순례의 여정, 인생의 여정을 마칠 수 있습니다(6). 시인의 마음에는 큰 용기가 생겼고, “주님이 나를 지키신다”는 믿음의 고백을 여섯 번이나 되풀이합니다(3-8).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는 모르나, 안전만은 확실합니다. 지금, 하나님은 창조주에서 시인을 돌보시고 구출하시는 구속주로 역할이 바뀌어서 믿음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는 환난과 영혼을 지키시는 것 뿐만 아니라, 시인의 출입을 영원토록 지켜주실 ‘동반자’이십니다(8). 시인의 고백 속에서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성부), 구속주이시고(성자), 우리와 영원토록 동행하시는 분(성령)임을 듣게 됩니다. 믿음의 길이란 이렇게 안전하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시인은 기쁨과 자유를 얻었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요1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