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3/1/9-13)

잠언 21:3절
“주님께서는 정의와 공평을 지키며 사는 것을 제사를 드리는 일보다 더 반기신다.”
(새번역)

20:29-21:31의 주제는 ‘공의와 정의를 행하라’는 교훈입니다. 구조는 도입부(20:29-21:2), 본문(21:3-29), 그리고 결론(21:30-31)이며, 21:3절은 본론의 시작입니다.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전지한 능력의 주님(2)은, 사람의 외형적 행위 보다 그 이면을 중시하십니다. 물론, 주님은 온전한 제사(예배)와 마음을 쏟는 찬송과 기도를 기뻐하시지만, 이런 외형적 예배보다 당신의 뜻에 순종하는 ‘정의와 공평’이라는 윤리적 행동을 더 좋아하십니다. 문제는, 인간은 이를 분별하기 어려우나, 주님은 모두 아신다는 사실입니다. 구약 성경은 이 주제를 분명히 다루고 있습니다. 출애굽기는 제사와 의식 규정 보다 십계명을 먼저 명령하셨습니다. 호세아서는 아예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6:6; 인용 마12:7)고 못 박고, “그런데 이 백성은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나를 배반하였다.”(6:7)며 북 이스라엘 백성들을 정죄하셨습니다. 신약에 와서 구약의 제사 및 의식 규정은 폐지되었으나, 도덕규정은 단 하나도 폐지되지 않고 더욱 강화되었습니다(마517-20). 주님은 전 율법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셨습니다(22:37-39). 왜냐하면 아무리 “공평과 정의”를 행한다고 생각하여도, 그 결과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동시에 충족하지 못하면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뜻을 분별할 지혜를 갖고 삶의 목적과 사명을 확실히 해야 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세운 마을은 숨길 수 없다.”(마5:14, 새번역)

잠언21:4절
“눈이 높은 것과 마음이 교만한 것과 악인이 형통한 것은 다 죄니라”

본 절은 ‘공평과 정의’를 행하지 않는 과대망상자들의 삶을 말합니다.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하다’는 어구는 그들의 심인성 요소를 보여줍니다. ‘눈이 높다’는 말은 ‘눈을 치켜 뜨다’는 의미로 타인을 경멸하는 외적 태도를 상징합니다. 하나님과 잠언의 지혜는 이런 눈을 미워합니다. 또한, ‘마음이 교만하다’의 원어는 ‘마음을 넓히다’로서, ‘통제되지 않는, 염치없는 마음’을 가졌음을 나타냅니다. 그들의 생각은 도덕적 경계가 없어 마치 하나님인양 행동합니다. 한편,  ‘형통’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니르’는 ‘경작’과 ‘등불’이라는 두 개의 뜻이 있습니다. 만약 ‘경작’의 의미라면, 악인이 수행하는 일은 무엇이든지 ‘죄’됨을 뜻하며,  만약, ‘등불’이라면, 악인은 교만을 자신을 인도하는 빛으로 삼는다는 말입니다. 그 반면 의인을 인도하는 등불은 주님의 말씀입니다(시편119:105). 무엇을 등불로 삼는지는 갈랫길에 접어들면 드러납니다. “모의가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벼슬을 하다가 본의 아니게 오해를 사다”라는 모의봉격(毛義奉檄)의 고사가 있습니다. 전한 시대의 모의는 가난하였지만 학식과 효성으로 유명하였습니다. 장봉이 흠모하여 찾아와 대화하는 중, 관청에서 갑자기 모의에게 벼슬을 내린다는 격문이 내려오자 모의가 기뻐하는 것을 보고 실망하여 물러갔습니다, 이는 어머니를 기쁘시게 하기 위함이었고,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모의는 사직하였습니다. 장봉 역시 오해를 풀고 널리알려 오늘까지 전해집니다. 효자를 인도하는 등불은 부귀나 효자라는 세간의 명성이 아니라 부모공경의 계명입니다. 겸손히 주님의 계명을 따라 살아가야하겠습니다.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상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 (잠언22:4)

잠언21:5절
“부지런한 사람의 계획은 반드시 이득을 얻지만, 성급한 사람은 가난해질 뿐이다.”(새번역)

5절의 ‘성급한 사람’이란 정직한 노동과 검소함이라는 희생이란 희생 없이 부를 얻으려는 욕망을 가진 자입니다. 그는 ‘교만을 등불로 삼는 악인’(4)의 한 종류로서, 솔로몬은 부지런히 살려고 계획하는 사람과 대비시켜 그것이 어리석은 길임을 교훈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지혜로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지런한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삶의 틀로 삼고 창조적으로 계획하고 그에 따라 적절히 행동합니다. 그 결과는 반드시 이득을 얻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급히 부하게 되려는 자는 주님이 세우신 세상질서에 대한 생각없이 행동하기에 가난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이득과 가난이란 단어는 샬롬의 측면이 반영된 것입니다. 반 루벤은 말합니다: “돈의 문제에서 성급함이란 탐욕을 내포하고(28:20), 언어에서 성급함은 생각이 모자람을 보여준다(29:20).” 이는 게으른 사람은 행동이 결여되어 있고, 성급한 사람은 생각이 결여되어 있음을 지적하는 말입니다. 부지런한 사람은 진실된 길로 걸어가고, 판단은 명쾌합니다. 한편, ‘반드시’와 ‘뿐이다’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들의 원어는 동 일하게 ‘아크’로서, 예외 없이 예상치 못한 결론에 도달함을 내포합니다. 자신들의 눈에 올바른 것을 행하는 자들은 그 기대에 반하여 투자한 이상의 이득(화평 등)을 얻고, 탐욕을 갖고 성급하게 행동에 옮기는 자들은 삶에 필수적인 것들을 잃어버린다는 세상의 질서는 예외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길은 인간의 길과 생각보다 더 높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의인은 흠 없이 살며, 그의 자손이 복을 받는다.” (잠언20:7,새번역)

시편119:161-168절 “신(שַׂ)”연
“권력자는 이유 없이 나를 핍박하지만, 내 마음이 두려워하는 것은 주님의 말씀 뿐입니다.”(새번역)

‘신’ 연의 주제는 ‘하나님을 공경하는 삶’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신실하게 행동하실 것을 호소하기 전에, 우리 자신이 신실하게 살 책임이 있습니다. 시편기자 역시 그 점을 잘 알고 있었고,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왔음을 선언합니다. 시인은 주님의 말씀만을 두려워 하는데, 이는 자신의 모든 행위가 언제나 주님 앞에 있기 때문입니다(161,168). 더 나아가 시인은 주님의 말씀을 ‘탈취물을 얻는 것’같이 즐거워하였고(162), 거짓을 미워하며 의로운 주의 율법을 사랑하였습니다(163). 이런 고백들이 나오는 이유는, 시인이 지금 이유 없이 권력자로부터 박해를 당하고 있어, 오직 주님의 도우심만이 해결책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시인을 구원하실 능력이 있지만 정의의 하나님이시기에, 시인은 주님의 계명을 따라 살아가면서(166), 그분의 법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된 평화, 안전(민6:24-26), 그리고 구원을 간구합니다(165,166). 좋은 예가 있습니다. 다윗은 주님의 말씀을 두려워하여 왕 사울을 두 번이나 살려보내고 정처 없는 피신생활을 택하였습니다. 한편, 161-62절에는 주님의 말씀에 대한 ‘두려움’과 ‘즐거움’의 역설적인 반응이 보이는데, 신자의 올바른 정서입니다 (86: 4,11 참조). 요한복음은 ‘너희가 나의 말에 머물러 있으면, 너희는 참으로 나의 제자들이다.’ (8:31b)고 말합니다. 우리가 제자인 여부, 즉 주님의 말씀에 머무르는 여부를 알고자 한다면 시인이 고백한 정서가 우리 안에 있는지를 확인하면 됩니다. “내가 가는 길을 주님께서 모두 아시니, 내가 주님의 증거와 법도를 지킵니다.”(시편119:168,새번역)

시편119:169-176절 ‘타우(תּ)’연
“주님, 나의 부르짖음이 주님 앞에 이르게 해주시고, 주님의 말씀으로 나를 깨우쳐 주십시오”(새번역)

마지막 연인 ‘타우’ 연의 주제는 ‘방황하나 순종합니다!’입니다. 시인은 주님의 구원을 부르짖으나 몰아닥친 환란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또 다시, 시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된 구원을 소망하며 인내하는 신자의 품격을 보여줍니다. 주님은 신실하셔서 언약대로 기도에 응답하실 것입니다. 이때 시인은 자신이 사랑하는 주님이 영광과 찬양을 받으시기를 원합니다. 시는 두 부분으로 구분됩니다, 첫째, 169-72절로서, 주님의  행동에 대한 요청입니다. 그것은 ‘깨우침’과 ‘구원’으로서, 시인은 ‘명철’을 받아(단9:2)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역경에서 구원의 길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지금 시인은 하나님께 드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직 그분의 자비를 위한 ‘부르짖음’과 ‘간구’만이 남아 있지만, 즐거움으로 가득차 있습니다(172). 왜냐하면, 말씀을 믿고 인내하는 시인에게 약속된 구원이 성취된다면, 하나님과 그분의 율법은 진리이고, 이를 선택한 자신의 정당함이 증명되기 때문입니다. 둘째, 173-176절로서, 첫 부분의 주제를 반복합니다. 시인은 기도, 하나님의 말씀(율례, 계명, 법도,율법,규례 등)에 대한 헌신, 그리고 구원을 소망하면서 주님을 찬양합니다. 시인은 여전히 고난에서 오는 상실감 때문에 ‘길을 잃은 양처럼 방황’한다는 고백 가운데 있지만, 하나님에 대한  신실함을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시인이 주님을 사랑하여서, 그분의 말씀을 삶의 등불로 삼은 결과입니다. 주님은 이런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잃은 양 같이 내가 방황하오니 주의 종을 찾으소서 내가 주의 계명들을 잊지 아니함이니이다” (시편119:1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