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20:26절
“지혜로운 왕은 악인을 키질하며, 그들 위에 타작기의 바퀴를 굴린다.”(새번역)
잠언은 사사로이 악을 갚지 말고 주님의 심판을 기다리라고 권고하지만(22), 왕은 다릅니다. 국가를 통치하는 왕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심판하고 악을 제거하여야만 합니다. 본절은 농경사회에서 흔히 보는 타작의 이미지를 들어, 왕이 악인을 분별하고 그들을 제거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잠언20:8). 왕의 책임 중 첫 번째는 키질로, 두 번째는 타작으로 암시되고 있으나, 고대 중동에서는 키질하기 전에 타작합니다. 타작 시에는 가시가 달린 무거운 수레(타작기)를 곡식 줄기 위로 반복적으로 굴려, 곡식을 분리한 뒤, 키질을 통해 알곡과 쭉정이를 고르고, 알곡은 곡간에 쌓고 쭉정이는 태우거나 썩혀서 거름으로 썼습니다. 이것이 알곡은 선을, 쭉정이는 악을 상징하게 된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왕의 통치는 완전하지 않고 또 유한합니다. 완전하고 영원히 공평과 정의로 다스릴 왕은 어디에 있겠습니까? 성경은 그 왕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우리 주님임을 선포합니다. 한편, 고대 이스라엘에서 추수와 타작마당은 심판의 상징이었습니다. 특히, 타작마당은 일년 중 추수 때만 바쁘게 이용됨으로, 일생 동안 쌓은 선과 악을 마지막 순간에 헤아린다는 최후의 심판과도 비슷합니다. 이를 배경으로, 침례 요한은 이미 메시야가 그들 가운데 오셔서,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눅3:17)라 외쳤습니다. 마지막 날 우리 주님은 그 영광의 보좌에 앉으사 ‘모든 악을 한눈에 가려내어’ 영원히 없앨 것입니다.“마음이 한껏 부푼 교만한 자를 보아라. 그는 정직하지 못하다.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합2:4,새번역)
잠언20:27절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느니라”
27절은 세상통치 배후에 계신 전지하신 주님을 등장시킵니다. 전단은 등불이라는 은유로 주님의 전지전능함을 나타내고, 후단은 그 해석을 보여줍니다. ‘영혼’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니쉬마”로 ‘숨, 호흡’을 뜻하는데, 아담에게 숨을 불어넣어 살아있는 존재로 만든 그 단어입니다. 따라서 직역하면, “사람의 호흡은 여호와의 등불이라…”입니다. 사람 속에서는 숨과 함께 말도 나옵니다. 따라서, ‘니쉬마’는 ‘단어 혹은 말’을 은유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경우, 사람의 말은 내면 가장 어두운 구석에 있는 사람의 생각, 성향, 의지를 드러내게 하는 주님의 등불입니다. 왕(혹은, 잠언의 제자들)은 이를 통해 사람의 깊은 속을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한편, 본절은 정의를 위한 왕의 권력(26)을 상대화합니다. 이는 왕 역시 하나님의 감시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인간의 모든 생각과 동기를 알고 계시기에, 통치 대행자인 왕를 섭리가운데 도와주고 계십니다. 즉, 왕에게 영감을 주시며(16:10, 이른바 직업적 영감), 당신의 뜻을 따라 왕을 인도하십니다(21:1). 좋은 예가 에스더서에 있습니다. 하만에 의한 유대인들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던 어느 날 밤, 페르샤 왕 아하수에로는 잠이 오지를 않아, 역대 일기를 읽혔습니다. 그 때 모르드개가 자신의 목숨을 구해주었음을 알고 부지 중 그의 원수 하만으로 하여금 모르드개를 높이게 합니다. 하만의 음모가 좌절되는 섭리의 예표이었습니다 . 물론, 이는 에스더와 유대인들의 결사적인 금식기도의 응답이었습니다. 잠언은 의인을 위로하고 악인을 근신하게 만듭니다. “악을 갚겠다” 하지 말아라. 주님을 기다리면, 그분이 너를 구원하신다.” (잠언20:22, 새번역)”
잠언20:28절
“왕은 인자와 진리로 스스로 보호하고 그의 왕위도 인자함으로 말미암아 견고하니라”
‘왕’이라는 주제어는 악인에 대한 정의로운 심판(26)과 힘없는 백성(22)위한 ‘인자와 진리’와 잘 어울리며, 이 단락을 자신이 아닌 주님을 신뢰하도록 결론을 맺게 합니다. 전단은 ‘인자와 진리’라는 미덕을 왕의 수호자로서 의인화시켰습니다. ‘인자’의 원어는 ‘헷세드’로서 ‘언약적 사랑’을 말합니다. ‘진리’는 ‘진실함, 신실함’을 뜻하는 ‘에메드’의 번역입니다. 결국 ‘인자와 진리’는 합쳐서 ‘주님과의 언약에 기반을 둔 신실한 사랑’을 말합니다. 잠언에서, 이 두 단어가 함께 사용될 때는 하나님의 은혜의 측면이 아니라, 궁핍한 사람에게 베푸는 인간적 친절을 뜻합니다. 후단의 ‘인자’의 원어 역시 ‘헷세드’로서, 왕이 ‘언약적 사랑’에 충실하면, 사람이 음식과 보약을 먹어 몸을 튼튼하게 만들듯이, 왕은 자신의 왕위를 견고하게 만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인자와 진리’라는 통치를 위한 ‘음식과 보약’은 어디에 있겠습니까? 잠언14:22, “악을 꾀하는 사람은 길을 잘못 가는 것이나, 선을 계획하는 사람은 인자와 진리를 얻는다,”이 말합니다. 왕(지도자)이 주님을 경외하여 바른 길로 걸어가면 주님이 주십니다. 왕이 자신의 직무에 충실할 때, 즉 정의를 베풀고, 백성을 돌볼 때 왕 역시 주님으로부터 언약에 기반한 신실한 사랑을 받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은 모든 권력의 머리이기 때문입니다(엡1:22). 여기서 왕이란 모든 지도자의 한 예이고, 그 완전한 성취는 우리 주님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세상에 오셔서 나병환자와 같은 궁핍한 자의 간구를 멸시하지 않고 고쳐주심으로 그분의 영광을 보이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을 건설하시고 그의 영광 중에 나타나셨음이라” (시102:16)
시편119:121-128절–‘아인(ע)’ 연
“내가 정의와 공의를 행하였사오니 나를 박해하는 자들에게 나를 넘기지 마옵소서” (121절)
‘아인’ 연의 주제는 ‘주님이 일하실 것을 탄원함’입니다. ‘정의와 공의’를 행함으로써 세상의 빛이 되고자 한 시인의 단호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오만한 사람들이 득세하게 되자, 그는 두려웠고 (121,122) 주님의 구원과 약속의 성취를 고대하다가 지쳤습니다(123). 시인은 얼마나 더 견딜수 있을까요? 이미 하나님의 진리가 무시되었기에 마지막 보루는 그분이 일(행동)하시는 것뿐입니다 (126). ‘일하실’(126)이란 단어는 ‘행하였사오니’(121)와 동일한 히브리어 동사(’아사’)로서, 마치 시인이 ‘내 모든 노력이 실패하였으니 이제 주께서 떠맡으소서’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126절은, 시인이 121-125절에서 드리는 기도의 절정을 이루고, 나머지 두 개의 절(127-128)에서 시인은 순종을 다짐하며 끝을 맺습니다. 주님의 종으로서 주의 말씀을 따라 ‘정의와 공의’를 행한 시인이 위험에 처하자 안전을 간구하는 자세는 합당합니다. 그러나, 그의 기도는 이내 하나님의 진리를 배우고 이해하기 위한 기도로 바뀝니다(125). 왜냐하면 시인에게 주의 계명(미스바)들은 순금보다도 더 귀한 보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주의 말씀을 사랑하며(127), 모든 일에서 그 계명이 뜻하는 바를 완전히 지키려는 열망을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는 주님으로부터 배우고자 기도하며, 그분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지식), 그 진리에 대한 사랑 때문에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합니다(128). 이런 삶의 자세가 참된 부흥의 원동력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매사에 주님의 모든 법도를 어김없이 지키고, 모든 거짓행위를 미워합니다.”(시편119:128,새번역)
시편119:129-136절–‘페(פֶּ)’ 연
“주의 증거들은 놀라우므로 내 영혼이 이를 지키나이다” (129절)
‘페’ 연의 주제는 ‘주의 말씀이 주는 은택’입니다. 시인은 이 혜택을 깨닫고 감사드린 후(129-131), 그가 이중의 적- 잘못된 행위와 인간의 억압-에게 굴복하지 않도록 기도(132-135)하고, 그 말씀을 버린 자들을 크게 개탄합니다(136). 주님의 말씀의 유익 중, 시인은 두 가지를 말합니다. 먼저 주의 증거의 놀라움입니다(129). ‘놀라움’의 원어는 ‘펠레’인데, 출애굽에서와 같이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묘사할 때 사용되는 단어이므로, ‘초자연적’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합합니다. 그 증거들을 통해 시인은 주님의 초자연적 행동과 완전하심에 관한 통찰을 얻습니다. 둘째, 주님의 말씀을 깨닫게 되면, 삶의 현실을 제대로 경험해 보지 못한 단순한 자들도 지혜를 얻게 됩니다(130). 시인은 목마른 사슴이 헐떡이면서 물을 찾듯이, 주의 계명들을 사모하고 있습니다(131). 그 만큼 주의 말씀은 경건한 자들을 채워주고 새롭게 합니다. 이어서, 시인은 주님께 축복을 간구합니다. 그분이 축복하시면 은혜를 받고(132), 죄악과 역경에서 안전하게 보호하고 인도해 주며, 일생동안 그분의 호의 가운데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135a). 그뿐 아니라, 시인의 요청은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과 일치합니다(132a). 주님을 의지하는 자들은 다 복이 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주의 법도들’을 지키겠다는 헌신의 고백을 하면서, 말씀을 가르쳐 달라고 기도합니다. 우리들 역시 주님의 뜻을 행하며 배우고, 축복의 주님을 굳게 의지하여야 합니다. “그들이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내 눈물이 시냇물 같이 흐르나이다” (시편119:1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