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2/12/5-9)

잠언 20:23절
“규격에 맞지 않은 저울추는 주님께서 미워하신다. 속이는 저울은 나쁜 것이다.”
(새번역)

유사한 잠언 두 개를 살펴본 바 있습니다: “한결같지 않은 저울 추와 한결같지 않은 되는 다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느니라”(20:10); “속이는 저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 공평한 추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11:1). 상거래에서 특히 정직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본 잠언이 위치한 문맥은 ‘공평과 정의’라는 의미에, 독특한 교훈을 더합니다. 가렛의 통찰입니다: “이 구절은 독자가 징벌하실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 확신을 준다. 따라서, 개인적으로 복수할 필요는 없다”  또, 말빔이란 학자는, “만약 당신이 거래 중에 속았다면, 다음에는 당신 차례라면서 그를 속여 앙갚음하려는 유혹을 받지 말아라. 여기서 주어진 예는 속이는 저울을 사용하여 물건을 파는 경우이다. 당신 역시 복수하기 위해서 거짓 저울을 사용하고 싶은 마음이 들 수 있지만, 그 유혹을 물리치라! 어쨌든, 저울을 만져 속이는 행위는 전능자에게 미움을 받기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만약 우리가 어리석은 자에게 어리석게 반응한다면, 우리 또한 어리석은 자가 될 것입니다(26:4). 신자는 세상 사람들보다 한 가지를 더 알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주인이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익이 아니라, 그분의 판단을 두려워합니다. 16:11절에 따르면, 저울은 주님의 소유이고, 추와 돌은 그분이 만드신 것임을 천명합니다. 따라서, 저울과 관련하여 속이는 모든 행위마다 그분을 건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정직하지 못한 모든 행위가 그렇지만 말입니다. 시장과 종교의 삶은 불가분의 관계로서 분리될 수 없습니다. “악을 갚겠다” 하지 말아라. 주님을 기다리면, 그분이 너를 구원하신다” (잠언20:22, 새번역)

잠언 20:24절
사람의 발걸음은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겠느냐!” (새번역)

주님(야훼)이 등장하는 세 번째 잠언으로 그분의 주권을 다루는데, 성경의 가장 심오한 가르침 중 하나입니다. 다른 측면에서는 인간의 책임이 있습니다. 지혜를 다루는 잠언, 전도서, 욥기 등에서 전능자의 주권을 이야기할 때는 언제나 인간이 책임있게 살아간다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지혜는 슬기로운 사람의 길을 분별하게 하지만, 어리석음은 어리석은 자를 속게 한다”(14:8)와 같은 많은 교훈이 잠언에 있는 이유입니다. 물론 참된 길을 인식하고 그것에 맞추어 산다는 것은 어렵지만(16:2), 우리에게는 그 길만이 있습니다. 주님은 이 세상 모든 일과 사건의 배후에 계신 진정한 행위자이십니다. 이를 아는 그리스도인들은 얼마나 두렵고, 또 얼마나 안심이 됩니까! 중요한 것은 이 두 진리 – 주권과 책임 -는 성경에서 결코 조화를 시키려고 노력하지 않고, 조화될 수도 없습니다. 40년 전, 20대 비행교관 브라이언 시프는 비행학교 교장을 태우고 유망 청년 사업가 스티브 잡스와 그의 전자장비를 수송하는 책임을 맡았습니다. 무더운 날씨, 스티브의 짜증과 재촉에도 불구하고 브라이언은 비행중량계산 후 인근 비행장으로 이동해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활주로가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비행내내 무거운 침묵이 흘렀고, 임무를 마치자 교장실로 호출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교장은 스티브 잡스와 같은 사람 앞에서 담대하게 원칙을 지킨 브라이언을 칭찬하더니 월급을 두 배나 올려 주었습니다. 현재 이분은 베테랑 조종사로 은퇴하여 비행교관과 안전 강사가 되었습니다. 주님이 하시는 일이 바로 이렇습니다. “전쟁을 대비하여 군마를 준비해도, 승리는 오직 주님께 달려 있다.”(잠언21:32,새번역)

잠언 20:25절
“경솔하게 “이것은 거룩하다” 하여 함부로 서원하여 놓고, 나중에 생각이 달라지는 것은, 사람이 걸리기 쉬운 올가미이다”
(새번역)

사람은 종교적으로 흥분하게 되면 성급하게 서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쓸데없이 자신에게 족쇄를 채우는 행동은 어리석습니다. 인간은 도대체 자신의 미래를 통제하지도 알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도우심이 절실하거나, 헌신의 열망이 생겨 서원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행18:18). 만약 주님께서 그 서원을 응답하시면, 반드시 이행하여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서원하고 갚지 않는 것보다 서원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고 가르칩니다(전5:5). 문제는, 사람이란 난관을 만나거나, 은혜(?)를 받아 거룩한 감정이 생기면 경솔히 서원을 하는  본성이 있습니다. 사사 입다는 암몬과의 전쟁이 임박하자, 승리하면 제일 처음 마중 나온 사람을 번제로 드리겠다는 이러석은 서원을 합니다. 이를 알리 없는 외동딸이 제일 먼저 마중나왔습니다. 입다는 두고두고 자신의 서원을 후회하면서, 참담한 말년을 보냈습니다. 어느 목사님은 자신이 지금까지 약속받은 헌금을 모두 합해보면 5백억원은 된다고 허탈해하는 말도 들었습니다. 이에 반하여 사무엘의 아버지 엘가나는 매년 서원제를 드리기 위해 성소가 있는 실로로 가서 이행하였고, 그의 아내 한나는 아들을 주시면 주님께 그를  드리겠다고 서원한 뒤, 사무엘을 낳고 젖을 떼자, 황소 두 마리와 함께 실로에 가서 주님께 드렸습니다. 주님은 한나에게 세 아들과 두 딸을 낳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균형잡힌 판단력을 갖고  냉철하게 생각하는 성품을 길러가야 합니다. “네가 하나님께 서원하였거든 갚기를 더디게 하지 말라 하나님은 우매한 자들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서원한 것을 갚으라”(전5:4).

시편119:105-112절‘눈(נ)’연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105)

‘눈’ 연의 주제는 “등과 빛되신 주의 말씀”입니다. 시인은 고난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가면서 주의 말씀의 놀라운 효능을 알려줍니다. 잠언 6:23절,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과 같이, 시인은 어두운 길을 비취는 주님의 말씀을 목격한 것입니다(105). 주의 말씀은 손전등과 같은 존재로서, 인생의 밤을 위해 반드시 구비해 두어야 하는 필수품입니다. 우리가 낯설고 위험한 지역을, 그것도 밤에 지나가야 한다면, 등불 내지 손전등을 손에 꼭 쥐고 가듯이, 고난의 시기에는 주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늘 묵상하면서 다녀야 합니다. 시인은 그 가치를 잘 알기에, 어떤 위험을 무릎쓰더라도 주님의 말씀을 지키기로 결단합니다(106). 시인은 생명이 위협을 받고, 악인들이 올무를 놓은 상황에서도 타협하지 않고 주님의 길로만 걷겠다고 결단합니다(109,110). 왜냐하면 주님의 말씀은 시인에게 기쁨의 완전한 근거이며, 또 때가 되면 주님으로부터 구원이 도착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107). 그러므로, 시인은 ‘입으로 드리는 자원제물’을 노래합니다(108). 이는 ‘즐거이 드리는 헌물’을 의미하며, 시인은 찬양의 기도로 승화시켰습니다. 고난이라는 밤의 노래들은 성막을 위해 드리는 자원예물(출36:3)보다, 더욱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입술의 제사’(시편19:15; 히13:15)입니다. 시인이 ‘주의 증거들’은 그의 유업이요 즐거움이라는 고백을 우리 역시 마음에 간직해야 합니다(111). 순종없는 기쁨은 천박하며, 기쁨없는 순종은 도덕주의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의 율례들을 영원히 행하려고 내 마음을 기울였나이다”(시편119:112)

시편119:113-120절‘사멕(ס)’ 연
“내가 두 마음 품는 자들을 미워하고 주의 법을 사랑하나이다”
(113)

‘사멕’ 연의 주제는 ‘일편단심’입니다. 시인은 우유부단한 자, 행악자, 방황하는 자 그리고 악인들과 대치해 서 있습니다. 이들 사이를 확연히 구분할 수 있는 근거는 ‘주의 법(말씀)’인데, 그 말씀은 시인이 사랑하고(113,119), 간직하며(115), 피난처와 방패 그리고 소망의 기반(114)으로서, 한결같이 마음을 쏟는 중심점(117)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말씀과 주님의 순서를 혼동하지않습니다. 시인이 경외하고 사랑하는 존재는 주님이며, 그분의 말씀은 그분을 존중하는 가장 으뜸된 수단으로서 존중합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근거로 소망을 품는 것은 주님께 피한다는 의미이며(114), 말씀은 ‘내 하나님의 계명’(115)으로, 말씀을 경외함과 주님을 경외함은 같은 뜻입니다(120). 반대로, 말씀을 거부하는 현실 타협자와 악인들은 주님께 배척당하는데(118), 그들의 마음과 삶이 그분의 말씀에 어긋나서, 주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수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사멕’ 연은 ‘눈’ 연이 강조하는 ‘헌신’의 의미를 발전시킵니다. 그 헌신은 선택적도, 타협될 수도 없습니다. 실로, 시인이 드리는 헌신의 본질은 주님과 교제하고 바른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삶 자체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주님의 판단을 두려워 합니다. 주님을 그렇게 사랑한 솔로몬도 그분의 말씀과 어긋난 우상숭배를 시작하자 심판받았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헌신의 삶’은 주님에 대한 사랑(그분의 계시를 사랑함으로 확인됨)이 주님의 심판을 두려워 하는 마음에 의해 균형잡혀져만 합니다. “내 육체가 주를 두려워함으로 떨며 내가 또 주의 심판을 두려워하나이다”(시편119: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