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2/11/21-25)

잠언20:17절
“사람들은 속여서 얻은 빵이 맛있다고 하지만, 훗날에 그 입에 모래가 가득 찰 것이다.”(새번역)

히브리 본문의 직역은 “속인 빵은 사람에게 달콤하다 그러나 후에는 그의 입이 자갈로 채워질 것이다”입니다. 여기서 질문이 생겨납니다 : “어떤 면에서 빵이 거짓일까?”  빵은 주된 음식이나, 인간의 모든 물질적 소유를 상징할 수 있는데, 그 획득방법에 따라 그 ‘빵’이 혹은 그 ‘의복’이 혹은 그 ‘학위’가 거짓일 수 있음을 말합니다. 잠언은, 거짓되거나 불법적인 방법으로 얻은 소유물은 처음에는 즐겁고 유익해 보이지만, 결국에는 해가 됨을 가르쳐줍니다.  “빵인 것처럼 보여 먹었더니, 실제로는 자갈이라서 뱉어내야하다니!” 이것이 그 정확한 뉘앙스입니다. 선지자 엘리사(비시 830년경)가 나아만의 나병을 고쳐준 것을 본 시종 게하시는 나아만 장군을 쫓아갔습니다. 그리고 엘리사의 요청인 것처럼 거짓으로 말한 뒤, 은 한 달란트와 옷 두 벌을 요구하였습니다. 나아만은 오히려 은 두 달란트와 옷 두 벌을 주고 게하시의 집까지 배달해 주고 떠났습니다. 게하시는 그것들을 집에 감춘 후, 아무 일도 없었다는듯이 엘리사 앞에 나아갔습니다. 엘리사는 마지막 회개의 기회를 주고자, ‘게하시야 어디 갔다 오는 길이냐?” 물었습니다. 게하시는 아무데도 가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엘리사는 그의 탐욕과 거짓 행위를 지적하고는, “나아만의 나병이 네게 들어갈 것이고, 네 자손도 영원히 그 병을 앓을 것이다”고 선언하였습니다. 게하시가 엘리사에게서 물러나오자, 온 몸에 나병이 발병하였습니다(왕하5장). 잠언은 가르칩니다: “거짓 수단을 통해 이익을 추구하지 말아라.”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지 말고, 주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하여라.” (잠언3:7,새번역)

잠언20:18절
“계획은 사람들의 뜻을 모아서 세우고, 전쟁은 전략을 세워 놓고 하여라.”(새번역)

18절과 19절은 “그러므로 지혜를 받으라”는 결론입니다. 지혜자는 충동적이 아니라, 신중히 숙고한 후에 일에 착수합니다(15:28; 19:2). 전단은, 모든 영역에서 행동을 취하기 전에 수행하여야 할 일반원칙을, 후단은 특히 전략을 세워야 승리를 챙취할 수 있는 전쟁을 예로 들었습니다. 전쟁에서 전략은 매우 중요합니다(24:6). 경솔히 전쟁에 돌입하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나쁜 일들만 계속 일어날 것입니다.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에서, 러시아는 전략을 충분히 세우지 않고 공격한 결과, 예상치 못한 상대방의 강력한 저항에 허를 찔렸습니다. 계획은 삶의 여타 영역에서도 꼭 필요합니다. 본 잠언은 효과적으로 이 교훈을 가르치고 적용하도록, 뛰어난 병행구조를 갖추었습니다. 사업, 시험, 아이들의 교육, 그리고 소송에서도 먼저 조사하고 전문가들과 의논하여 중지를 모은 뒤 행동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잘 모르며, 더구나 미래는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서로 협력하고 도와야 좋은 삶을 누리도록 의도하신 창조주의 지혜입니다. 그분의 뜻을 무시하고 책 몇 권 읽고 독단적으로 결정하거나, 지식 없는 사람들과만 의논하거나,  혼자 골방에서 기도를 드리다가 떠오르는 생각대로 살아간다면 어리석은 자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주의해야할 부분은 지혜의 존재 의미입니다. 지혜란,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는 우리 자신의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성취되어지는 좋은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 그것이 지혜로운 삶의 목적입니다 (고전10:31). “너는 악한 사람을 부러워하지 말며, 그들과 어울리고 싶어하지도 말아라.” (잠언24:1,새번역).

잠언20:19절
“험담하며 돌아다니는 사람은 남의 비밀을 새게 하는 사람이니, 입을 벌리고 다니는 사람과는 어울리지 말아라.”(새번역)

“언어와 사업”에 관한 단락(20:12-19)의 결론인18, 19절은 서로 보완적 관계가 있습니다. 18절은 ‘일을 시작하기 전에 의논하라’는 뜻을, 19절은 ‘신뢰할 수 있는 사람과만 의논해라”는 교훈이기 때문입니다. 11:13절, “험담하며 돌아다니는 사람은 남의 비밀을 새게 하지만, 마음이 믿음직한 사람은 비밀을 지킨다,”은 비교 구절입니다. 다만, 13절은 ‘비밀을 누설하는 사람”과 ‘분별력 있게 말하는 사람”을 대조하고, 19절은 “비밀을 누설하는 사람”과 “생각없이 말하는 사람”을 동일시하여, 같은 교훈을 다양하게 표현합니다. ‘험담(gossip)하는 사람’은 ‘두루다니며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남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험담’은 지혜의 부족을 보여주는데, 이는 험담 자체가  사랑의 결여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왜 여기 저기 다니면서, 사람을 헐뜯겠습니까? 그 사람에 대해 좋은 마음도 없고, 또 가볍게 여기기에 별 생각없이 화제꺼리로 삼게 됩니다. 더구나, 험담은 좋지 않은 소문을 퍼뜨리는 것을 넘어, 마치 들불과 같이 사람 사이를 파괴시키곤 합니다. 타락한 아담의 후손들에게는 험담이 너무나도 매력적입니다. 잠언은 험담을 구하기 힘든 ‘맛있는 음식’에 비유하고, 마음의 깊은 곳까지 미침을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간다”는 표현을 통해 ‘험담’의 힘을 보여줍니다(18:8). 그리스도인들은 험담의 욕구가 올라오면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험담을 피하듯이, 험담하는 사람을 피하여야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은 심판 날에 자기가 말한 온갖 쓸데없는 말을 해명해야 할 것이다.”(마12:36,새번역).

시편119:73-80절 ‘요드(יָ)’연
“주의 손이 나를 만들고 세우셨사오니 내가 깨달아 주의 계명들을 배우게 하소서” (73)

‘요드’ 연의 주제는 ‘인생, 계명을 배우는 학교’입니다. 시인은 주님이 주신 총명을 갖고 그분의 계명을 배우기 몹씨 원합니다. 계명의 원어는 ‘미추와’로서 ‘명령’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세상은 그분의 명령대로 존재합니다(시33:9). 그러므로, 그분의 계명에 대한 불순종은 멸망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시인을 조성하셨지만, 이는 시작에 불과합니다. 시인이 인생을 통해 계명을 배우고 그분의 뜻을 행하게 되어야 그분의 목적이 완성되는 것입니다(73). 이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출하신 후, 바로 가나안 땅이 아니라 시내 산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의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세상사람과 달리, 신자의 마음에는 주님의 계명(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살아 움직입니다. 이는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을 통해 계명을 가르쳐 주시고, 진리로 인도하시고, 능력을 주시는 주님을 배우게 되어, 그분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난의 유익을 토로한 시인은(71),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소망’의 메시지를 되새기는데 (74), 바울의 경험과 일치합니다: 환난-인내-인격-소망-사랑(롬5:3-5). 한편, 주님의 약속이 시인의 삶에서도 증거되기를 원하는 경건한 신자들을 생각하게 되자(79), 이들을 위해서도 주님의 인자와 긍휼이 시인에게 주어지기를 기도합니다(75-77). 지금, 교만한 자들이 거짓 행동으로 시인을 괴롭히지만 (78), 시인은 여전히 주님의 말씀을 즐거워함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또 우리의 고백입니다. “내 마음이 주님의 율례들을 완전히 지켜서, 내가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시편119:80,새번역).

시편119:81-88절 ‘카프(כָּ)’연
“나의 영혼이 주의 구원을 사모하기에 피곤하오나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 (81)

‘카프’ 연의 주제는 ‘고난, 삶의 그 현실’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는 교만한 대적들은 여전히 기세등등하고(85), 신실한 시인은 주의 구원을 기다리다 지쳤습니다(81). 그래서 시인은 외칩니다 :”Help me!”(86). 우리의 현실이 그렇습니다. 시인은 상황의 변화를 위해 절실히 주님께 간청합니다(81-84). 그가 당하는 고난이 너무나도 억울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불의를 당한 과부처럼, 시인은 도움을 위해 주님께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85-88). ‘카프’ 연이 ‘탄원의 기도’로 가득찬 이유입니다. 시인의 기도는 단순한 진술이 아니라, 인생의 필요와 고난의 현실까지 토로하는 탄원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배워야 할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인내의 끝에 ‘기도’라고 불리는 자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인내의 끝에 가게 되어 절망할 때 혼자 그 고통을  안고 살지, 기도로 주님 앞에 가지 않습니다. 원죄의 전형적인 증상입니다. 기도가 고난의 첫 번째 희생제사가 될 때가 정말 많지만, 반면 그 기도는 현실적으로 가장 확실한 치료제입니다. 왜냐하면 절망의 끝에는 ‘소망’(81-82)이라 불리는 방과 ‘순종’(83,87)이라는 또 다른 방이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그 방들로 가는 다리이자, 능력입니다. 고난은 극도로 불편할 수 있지만, 순종으로 이겨야 합니다(88). 이는 신자에게 놓여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주의 말씀은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삶의 현재 규칙 (83,87,88)이며, 장래의 소망(81-82)이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인자하심으로 나를 살려 주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친히 명하신 증거를 지키겠습니다”(시편119:88,새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