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20:11절
“비록 아이라도 자기의 동작으로 자기 품행이 청결한 여부와 정직한 여부를 나타내느니라”
‘드러낸다’의 원어 ‘나카르’는 ‘알아내다’와 ‘가장하다’의 두 개의 뜻이 있기에,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전자는 행위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아이조차도 행동으로 자신을 알리는 것처럼 사람은 말이 아니라 행동을 보아 알게 된다는 의미이고, 후자는 사람의 죄된 속성을 강조하여 아이조차도 행동으로 자신을 위장하는데, 어른은 더 하기에 주의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전자의 취지를 따른 것이 개정개역이나 새번역이며, 문맥상 타당합니다. 품행은 아이의 인격에 대한 가장 좋은 증거입니다. 어린 아이 때부터 이미 마음의 깨끗함과 정직함을 행동으로 보여줍니다. 만약 아이가 “나는 예의바르게 행동하고 있습니다”하고 말해도, 어른은 아이의 행동을 본 뒤 판단할 것입니다. 하물며, 다 성장한 사람의 말은 행동의 증거 없이 믿을 수 없습니다(창8:21). 그러므로 잠언은 외모와 말 보다 행동이 더 나은 판단 기준임을 가르칩니다. 한편, 행동을 볼 때 재물에 대한 태도와 사용을 반드시 살펴야 합니다.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습니다(눅12:34). 사람의 가치관, 정직성, 품성 등이 그 사람의 재물을 대하는 태도에 모두 담겨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한국의 속담에도 ‘그 사람을 알려면 금전 거래를 해 보라’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의 행동에 성품이 반영되어 있다면, 선한 행동을 위해서는 좋은 성품이 필연이고, 좋은 성품은 어릴 때부터 가르쳐야 뿌리를 잘 내릴 수 있습니다. 그 내용으로 주님 경외함을 가르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이를 아는 것이 슬기의 근본이다.” (잠언9:10,새번역).
잠언20:12절- ‘언어와 사업’ 관련 잠언(20:12-19)
“듣는 귀와 보는 눈, 이 둘은 다 주님께서 지으셨다.”(새번역)
“어리석은 자에 대한 교육과 벌”(19:24-20:11절)의 단락 후, 솔로몬은 “언어와 사업”(20:12-19)에 관한 새 단락(20:12-19)을 시작합니다. 2 절씩 총 4쌍으로된 이 잠언의 구조입니다: 도입부(12-13), 본문(14-17, 신중하지 못한 언어와 사업), 그리고 결론(지혜를 받아들여라,18-19). 12절은 전 단락과 새 단락을 연결하면서, 지혜 가운데 성장하라고 교훈합니다. 상인은 정직이 최고 자질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두 종류의 저울추와 되를 사용하여 고객을 속이는 것도 마다하지 않습니다(20:9). 이처럼, 모든 인간은 도덕적 무능력에 빠져 있습니다. 마땅히, 주님이 지으신 두 종류의 인식의 기관- ‘듣는 귀와 보는 눈’ -을 사용하여 선을 위한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12). 잠언에서 ‘귀’란 ‘듣고 순종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누구로부터 듣겠습니까? 솔로몬과 같은 현자입니다. 한편, ‘듣는 귀’는 ‘보는 눈’과 함께 사용되었습니다. ‘눈’이란 ‘깨어 경성하여라’는 뜻이 있습니다만, 지혜는 ‘듣는 것’을 ‘보는 것’ 위에 놓습니다. 귀는 무조건 듣게 되지만, 눈은 초점을 맞추는 동작이 필수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듣는다’는 의미는 실질적으로 순종을 의미합니다. 창조주께서 ‘귀’와 ‘눈’을 만드신 이유는 부지런히 배우고 삶에 적용하여 아름다운 열매를 맺기 위함입니다. 만약 잠언의 제자들이 이 두 기관을 통해 경건한 지혜를 얻는다면, 사업에서 성공하지 실패하지 않으며, 살아나지 죽지 않을 것입니다.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 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잠언3:18).
잠언20:13절
“너는 잠자기를 좋아하지 말라 네가 빈궁하게 될까 두려우니라 네 눈을 뜨라 그리하면 양식이 족하리라.”
본절에서 ‘눈’은 12절과 13절을 묶는 주제어로서, ‘보는 눈’(12)의 의미를 설명합니다. 게으른 자는 잠자는 것을 ‘사랑’하지만, 그의 눈이 떠 있어야만, 자신의 재물이 상실되거나 타인에게 넘어가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타인이, 종(17:2)이든 도둑이든 거래 상대방(20:14)이든 말입니다. 이로써,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신자들은 주님의 주도권과 인간의 책임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지혜를 갖습니다. 창조주께서는 삶을 위한 기관(눈,귀)들을 주셨지만, 그것들을 책임 있게 사용할 의무는 인간에게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우리 대신 보아주시거나, 우리가 노력하지 않아도 지혜를 주신다는 생각은 처음부터 버려야 합니다. 인간은 부지런히 양 기관을 사용하여 주님의 뜻을 분별하고, 행복한 삶을 찾아 가도록 디자인하셨음을 분명히 깨달아야만 합니다. 이것이 경건입니다. 현자는 이런 사실을 인정하여 부지런히 지혜에 귀를 기울이고 찾지만, 게으른 자는 힘든 노동이 싫어서 혹은 세상이 두려워 침상 위에서 구르며 살아갑니다. 잠언의 제자는 자신의 사업과 집안을 보살피고, 근면하게 살아가지, 게으르게 얻은 양식을 먹지 않습니다(잠31:27). 그러나 성경의 다른 부분은 주님을 경외하지 않고, 사업과 일에만 몰두하여 자신의 힘만으로 살아가려는 위험성 역시 경고합니다. 우리는 균형을 잡을 줄 알아야 합니다. 이 부분이 주님의 돌보심에 대한 믿음이 요구되는 지점입니다 “일찍 일어나고 늦게 눕는 것, 먹고 살려고 애써 수고하는 모든 일이 헛된 일이다. 진실로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사람에게는 그가 잠을 자는 동안에도 복을 주신다.”(시127:2, 새번역).
시편119:41-48절 – ‘와우(וִֽ )’ 연
“(그리고)주님, 주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주님의 인자하심과 구원을 내게 베풀어 주십시오.” (41,새번역)
‘와우’연의 8개 절은 모두 접두사 ‘와우(그리고)’로 시작되나, 개정개역 등 한글 번역에서는 이것이 분명하지 않습니다. 시인은 ‘와우’를 매 절마다 사용하여, 간구와 결단한 내용을 순차적으로 노래합니다. 시인은 순결한 삶을 열망하지만(베트), 세상은 낯선 곳(기멜)이며 압박들로 가득차 있고(달레트), 마음 역시 탐욕 등으로 갈등을 겪습니다(헤). 이때 주님의 ‘인자하심- 헷세드’과 ‘구원’의 약속은 든든한 버팀목이 됩니다(41). ‘헷세드’는 우리가 도움이 절실할 때마다, 그 필요를 아시고, 돌아보사 공급하시며, 구원하시되, 결코 한 번도 실패하시지 않는 신실한 사랑을 말합니다. 물론, 우리의 연약함을 탓하지도 않습니다. 나병환자가 주님 앞에 절하며 간구하자, 주님께서 불쌍하게 여기셔서, 손을 대시어 즉시 완치시켜주신 사건은 좋은 예입니다(막1:40-42). 따라서, 시련을 당하여 침울할 때, 시인은 ‘살아나도록’ 기도하고(40), ‘그리고 인자와 구원’도 잊지 않도록 간구합니다(41). 이어지는 42-48절은 구원에 동반되는 것들- 담대함, 규례를 사모함, 말씀에 대한 충성스러운 순종, 주님을 거침없이 증거함, 율례에 대한 즐거움과 묵상 -을 순차적으로 적고 있습니다. 시인과 같이 우리도 주님의 사랑과 구원을 체험하면 그분의 일을 증거하지 않을 수 없고, 그분과 그분의 계명을 사랑하게 되어 그분의 뜻대로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44-46). 고난의 열매 중 하나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의 계명들을 내가 사랑하기에, 두 손을 들어서 환영하고, 주님의 율례들을 깊이 묵상합니다.”(시편119:48,새번역).
시편119:49-56절 – ‘자인(ֽ זָ)’ 연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내게 소망을 가지게 하셨나이다” (49)
‘자인’연의 주제는 ‘고난 속의 위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소망과 위로를 줍니다. 고난의 때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시인은 주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기억해 주시기를” 기도하며(49), 자신은 고난 속에도 하나님과 그분의 율법을 기억한다고 두 번이나 단언합니다(52,55). 시인이 고난 중에 ‘소망’을 갖는 이유는 주님의 약속의 확실함 때문입니다(49). 주님의 말씀은 믿음의 근간이자, 경건의 확실한 기초입니다. 따라서, 시인은 구원을 고대하는 중에 주님의 율법은 자신에게 소망의 상징이요 위로의 수단이 됨을 노래합니다(50,54). 지금 시인은 대적에게 심한 조롱과 박해를 당하고 있지만, 주님의 말씀을 신뢰하자 다시 살아남을 경험합니다(50,51). ‘덧없는 세상살이에서 나그네처럼 사는 동안’ 주님의 율례는 우리의 노래요, 밤에도 감사와 찬양의 근원이 되기에, 오히려 역경은 소망을 강화시킴을 깨닫게 됩니다(51). 시인은 조롱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나 그분의 말씀을 버린 악인 때문에 “맹렬한 분노에 사로잡혔습니다”(53). 그렇지만 본 시에서는 ‘율법 중심적’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적’이며, 믿음에 대한 자만심이 아니라 소망과 겸손의 마음을 가진 시인이 보입니다. 한편, ‘자인’ 연의 구체적인 예는, 빌립보에서 오해를 받아 매맞고 감옥에 갇혔으나, 그 밤에 하나님을 찬양한 바울과 실라입니다. 주님은 옥터를 흔드시고, 그들이 당신의 종이심을 증거하셨습니다. 이 같은 구원의 사건의 묵상은, 고난에 처한 우리의 위로이자 행복입니다 “주님의 법도를 따라서 사는 삶에서 내 행복을 찾습니다.” (시편119:56,새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