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20:2절
“왕의 노여움은 사자의 부르짖음과 같으니, 그를 노하게 하면 목숨을 잃는다.”(새번역)
술취한 자의 떠들석한 모습을 바보들의 목록(19:24-20:1)에 포함시킨 솔로몬은, 이제 그 바보를 왕의 손에 넘겨놓았습니다. 여기서 왕은 하나님의 통치 대리자로서, 만약 누군가 왕의 진노를 불러일으킨다면 치명적이고도 즉각적인 처벌을 받을 것입니다. 사자는 그 당시 이스라엘 지역에서 누구나 목격할 수 있는 위험한 동물로서, 사자를 만난다는 것은 죽은 목숨과도 같았습니다. 더구나 부르짖음은 사자가 먹이를 잡았을 때 하는 승리의 외침으로, 그 누구도 사자의 손에서 먹이를 구해내올 수 없습니다. 왕을 격노하게 만든다는 것은 이와 같아, 만일 그 앞에 불경한 태도를 보이거나, 맡은 일에 신실치 못하다면 목숨이 위태하고, 구해줄 사람이 없으니 조심하라는 교훈입니다. 잠언은 19:12절(“왕의 노함은 사자의 부르짖음 같고 그의 은택은 풀 위의 이슬 같으니라”)에서 같은 교훈을 주었으나, 후단이 다릅니다. 19:12절은 위험과 혜택 양쪽을 다루나, 본절에서는 위험성을 더욱 강조합니다. 그러나 바보는 자신의 분수를 모르고 교만한 마음을 품고 방탕하다가 목숨까지 잃어버리게 됩니다. 누가복음에서 주님은 하나님의 일을 맡은 우리 각자에게 경고하셨습니다. 주인이 혼인 집을 가려고 출타하였을 때, 주인이 더디 오리라 생각하고 술먹고, 남녀 종들을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게 되면 알지 못하는 시각에 주인이 이르러 엄히 벌하신다는 교훈입니다(눅12:41-48). 그러므로 우리의 삶의 자세는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눅12:35)는 말씀 자체여야 할 것입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롬13:12).
잠언20:3절
“다툼을 멀리하는 것이 자랑스러운 일인데도, 어리석은 사람은 누구나 쉽게 다툰다.”(새번역)
잠언19:24-20:11절은 “어리석은 자에 대한 교육과 벌”을 주제로 합니다. 먼저, 바보들의 목록을 열거하고(19:24-20:1), 하나님을 대리하여 이들을 교정하고 벌하는 자로 왕을 등장시킵니다(20:2-11). 그들은 게으른 자, 거만한 자, 불효막심한 자, 교훈에서 돌이키는 자, 악한 증인, 심판을 비웃는 오만한 자, 술취한 자, 다투는 자 등입니다. 본절의 전단은 다툼을 삼갈 경우 ‘지혜로운 자’라는 사회적 존경을 받지만, 후단은 모든 바보는 다툼을 시작하는 자임을 밝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통치 대리자로서 왕이 미련한 자들을 노여워하고 벌하는 것은 정당하지만, 그 결과가 다툼으로 가서는 안 됩니다. 우리 사회는 분쟁을 야기하지 않고, 오히려 그 분쟁을 평화롭게 진정시킬 수 있는 사람을 존경합니다. 사람이 왜 분쟁을 시작하고, 거기에 가담하겠습니까? 자존심(교만)을 꺾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통상 자존심을 내세우는 행동에서 다툼이 시작되고, 그 사람의 덕망은 실추되고 낮아집니다. 그러므로 “명예로 가는 길은 자신의 명예를 방어하지 않는 길이다”는 역설이 성립합니다. 사사 기드온이 미디안을 쳐부수자, 전쟁 시작 전에 요청받지 못한 에브라임 지파는 자존심이 상하여 크게 다투었습니다. 기드온은 그들이 미디안의 방백 오렙과 스엡을 죽인 전과를,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낫지 아니하냐”는 비유와 함께 말하여, 그들의 노여움을 풀고 다툼을 피하였습니다 (삿8장). 모욕을 참고 겸손한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은 잠언의 지혜자입니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잠언16:32)
잠언20:4절
“게으른 자는 가을에 밭 갈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거둘 때에는 구걸할지라도 얻지 못하리라”
‘게으른 자’는 바보들의 목록 중 첫 번째(19:24)이며, 그에 대한 벌은 ‘사회적 불명예’(10:5)와 ‘빈곤’ 입니다. 가나안 지역은 늦가을(10월-3월)이 밭을 갈 시기였습니다. 게셀(솔로몬 왕의 요새)의 달력비문(BC10세기) 내용입니다: “두 달 모으기(올리브), 두 달 파종(곡물-보리와 밀), 두 달 늦게 파종(콩과 채소), 한 달 괭이질(건초를 위함), 한 달 보리 수확, 한 달 수확(밀) 그리고 (곡식)의 무게를 재면서 포도를 수확하는 두 달, 여름 과일을 거두는 한 달.” 그러므로 늦 가을의 두 달은 곡식의 씨를 뿌려야 하고, 이는 단단한 밭을 괭이로 갈 것을 요구하나, 밭 가는 일은 비가 내려 땅이 부드러워져야 가능합니다(이른 비). 만약 그 시기를 놓치면 그 해 농사는 망친 것이며, 6개월 후의 추수의 때에 거둘 것이 없습니다. 당장의 빈곤을 넘어 다음 해를 위한 씨조차 없는 가난한 자로 전락하여, 여기 저기 도움을 요청해야만 생존할 수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모든 인간은 생존을 위해 힘든 노동을 해야만 합니다(창3:17,18). 이를 통해 인간의 교만은 낮아지고, 비로서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기 때문에, 노동은 하나님의 지혜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게으른 자는 이 명령을 무시하여, 부지런한 부자는 마음을 낮추지 못해 천국에 가기 어려운 것입니다. ‘경건한 부지런함’의 덕목은 어릴 때부터 마음과 몸에 심겨야 하기에, “청년의 때란, 도덕적 지혜가 뿌리내리기 위해 인격의 모판을 준비할 시기입니다” (말빔). “게으른 사람은 아무리 바라는 것이 있어도 얻지 못하지만, 부지런한 사람의 마음은 바라는 것을 넉넉하게 얻는다.”(잠언13:4,새번역)
시편119: 1,2절
“그 행실이 온전하고 주님의 법대로 사는 사람은, 복이 있다. 주님의 증거를 지키며 온 마음을 기울여서 주님을 찾는 사람은, 복이 있다. ”(새번역)
시편 중 가장 긴 시로서(176절), 주제는 ‘주님(야훼)의 말씀이 삶의 중심에 서 있다는 고백과 기도”입니다. 시인은 22개의 히브리어 알파벹 순서를 따라 22개 단락으로, 각 단락은 두 구절로 이루어진 8개의 행(이행연구, 二行聯句, couplets)으로 구성하여 이 주제를 22번이나 반복합니다. 이 가운데 ‘주님의 말씀’을 뜻하는, 9개의 히브리어 단어를- 다바르, 이므라, 미쉬파트, 에다, 호크, 토라, 미스바, 픽쿠드, 데렉 – 단락의 내용에 따라 적절하게 취사선택하여 문학적 탁월성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형식은 내용에 종속되며, 각 단락은 주의 깊게 작성된 가르침이자 신앙고백입니다. 그의 선생님은 주님 자신이지, 인간 멘토가 아닙니다(102). 그러므로 이 시는 ‘토라(모세 오경을 통한 야훼의 가르침) 시’이지, ‘지혜의 시’는 아니며, 묵상의 분위기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주인이 되신 곳에, 섬김은 완전한 자유가 된다’는 놀라운 역설을 발견합니다. 자유란 하나님의 계명 안에서만 존재하는 것이지, 일탈하는 순간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 우리 생활양식을 경건한 토대 위에서 지어올리도록 하여 죄의 쇠사슬을 부수게 하시고(105,133), 또한 우리 보다도 더 위대한 지혜를 만나 주님의 뜻을 따르게 되었다는 벅찬 기쁨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을 배워야 합니다(71). 앞으로 시를 한 단락 씩 묵상하겠습니다. “너희가 나의 말에 머물러 있으면, 너희는 참으로 나의 제자들이다. 그리고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8:31,32, 새번역)
시편119: 1-8절 – 알레프(אַ)
“행위가 온전하여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음이여”
1-8절의 첫단어는 ‘아쉬레-복이 있다’입니다. ‘알레프(אַ)‘로 시작되며, 통상 ‘복’으로 번역된 ‘에쉐르’의 복수형입니다. ‘에쉐르’는 ‘곧다’ ‘똑바로 가다’란 뜻과 ‘번영하다, 성공하다’란 파생적인 뜻이 있습니다. 따라서, ‘아쉬레’는 바른 길을 걷기에, 누리게 되는 번영과 성공의 삶 그 자체를 나타내며, 과정과 결과가 다 포함됩니다. 이것이 복에 대한 성경의 기준이고, 그 열쇠는 ‘여호와의 율법(토라- 가르침)’에 대한 순종입니다. 일편단심 그분의 말씀으로 사는 자들은 곱절로 ‘복이 있습니다’(1-3). 왜냐하면 그렇게 사는 것 자체가 복이고, 그분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4). 그러므로, 주님의 율례(호크-석비에 새긴 변함없는 법령)를 행하게 도와달라고 외친 시인의 기도(5)는 첫연의 중심축입니다. 주님이 도와주시면, ‘주의 모든 계명(미추와- 명령을 뜻함)’에 주의하게 되어(6), 수치를 당하지 않고, 배울 수 있어 감사하기 때문입니다(7). 이것은 곧 우리의 기도입니다. 주의할 것은, ‘여호와의 율법’의 내용입니다. 시인에게 그것은 모세율법(의식법, 제사법, 도덕법 포함)이지만,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율법(가르침)’입니다 (고전9:21). 유대인들이 부딪힌 돌이 바로 이것입니다 (롬9:32). 그들의 우상은 모세율법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 시인에게는 올바른 순종이, 나중에는 오히려 불순종이 되었습니다. ‘여호와의 율법(토라)’에 대한 문자적 순종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 순종할 줄 알아야하며, 그분은 아들을 높이시기를 원하십니다 (요5:23). “내가 주의 율례들을 지키오리니 나를 아주 버리지 마옵소서”(시편11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