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2/10/10-14)

잠언 19:28절
“악한 증인은 정의를 비웃고, 악인의 입은 죄악을 통째로 삼킨다”(새번역)

9계명은 “거짓 증언하지 말라”입니다. 본 잠언은 잘못 양육시킨 자녀가 단순한 거짓말이 아닌, 법정에서 악한 증인으로까지 타락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는 진리에 대한 존경심이라고는 도대체 없고 악한 동기로 사법 정의를 비웃으며 이웃에게 해를 끼치는 범죄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모세율법의 ‘동해보복’ 규정(출21:22-25; 레24:16-22)은, 악한 증인을 벌할 때도 또 반복됩니다(신19: 15-21). 아간(황금과 옷), 게하시(은과 옷), 그리고 아나니아와 삽비라(경건한 신자 명예)는 탐욕 때문에 거짓말을 하였으며, 그 벌로 돌에 맞아 죽고(아간), 문둥병자(게하시)가 되고, 그리고 성령께서 직접 생명을 거두어가셨습니다(아나니아와 삽비라). 그러나, 거짓 증인들은 그것을 넘어서, 법정에서 의인을 죽이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아합 왕 때 나봇의 포도원 사건, 우리 주님에 대한 재판, 스데반의 재판의 경우입니다. 이 시대는 증인의 진술이 재판을 결정지었기에, 모세율법은 반드시 두 증인 이상으로부터 진술을 듣고 재판하도록 하였습니다(신19:15). 그러나, 아무리 선한 것도 인간의 손에 들어가면 모두 타락하게 마련입니다. 그 선한 율법을 가진 이스라엘 백성들은 형식적 규정만 충족하였지, 목적 달성을 위해 거짓된 증인들을 내세워 “죄악을 통째로 삼키는” 방법을 고안해 냈습니다. 그들의 아비는 마귀입니다(요8:44). 그리스도인들도 외형적 고백이 고백이 아니고, 진실하고 선한 열매가 맺어져야만 참된 제자입니다 (눅8:15; 롬2:28,29). “오만한 사람에게는 심판이 준비되어 있고, 미련한 사람의 등에는 매가 준비되어 있다” (잠언19:29,새번역).

잠언 19:29절
“오만한 사람에게는 심판이 준비되어 있고, 미련한 사람의 등에는 매가 준비되어 있다”(새번역)

본 잠언은 28절의 사법 정의를 농단하는 악한 증인에게는 이미 하나님이 정하신 벌이 준비되어 있음을 말합니다. ‘악한 증인’은 대표적인 오만한 사람 중 하나로서, 정의와 심판을 비웃지만, 오만한 사람은 곧 미련한 사람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섭리 가운데서 심판과 벌을 준비하고 계심을 알지 못합니다(시14:1). 하나님은 잘못된 행동에 대하여 합당한 벌을 내리셔야 당신의 영원한 공의와 질서를 확립하실 수 있습니다. 따라서, 경건한 사람들은 그분의 심판을 두려워하여, 올바른 길로 행하기를 힘쓰고 있습니다. 이들은 잘못에 대하여 질책을 받으면 통렬히 여기고 마음에 새겨 지혜를 더합니다. 단순하여 잘 속아넘어가는 자녀들은 벌(매)을 받으면 그때야 지혜를 얻어 돌이킵니다. 그러나 오만한 사람은 아주 미련하여 100대의 매를 맞아도 고칠 수가 없습니다(19:25). 이들을 위해서는 영원한 심판과 영원한 어두움이 준비되어 있습니다(마25:41;유13). H.G. 웰즈는 『타임머신』, 『투명인간』의 작가로 유명합니다. 그는 무신론자이지만, 이를 넘어 성경의 메시지와 그리스도인들을 혐오한 오만한 사람이었지만, 세상에 소망은 없다는 현실을 깨닫고 큰 고통을 받았습니다. 2차 대전 중 런던이 폭격받는 동안, 그는 공포로 몸을 떨면서,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폭탄이 아니라 어두움이다. 나는 일생 그 어두움을 두려워하면서 살아왔다”고 옆에 있는 보웬 여사에게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웰즈는 그 어두움만 두려워하였지, 빛되신 주님에게 갈 지혜는 없었습니다.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마6:23).

잠언20:1절
“포도주는 거만하게 하는 것이요 독주는 떠들게 하는 것이라 이에 미혹되는 자마다 지혜가 없느니라”

술취한 자의 모습은 잘못 양육된 자녀의 클라이맥스입니다. 그는 정신이 나가서, 절제도 없으며, 미친 것과 다름없어 분별의 한계와, 도덕 그리고 예절의 경계를 깨드리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포도주와 독주는 지혜와 삶을 파괴하는 악당과 다름없기에 자녀들을 엄히 경계해야 합니다. 그러나, 포도원은 이스라엘의 주력 산업으로, 잠언은 “포도즙 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는 것을 하나님의 축복의 상징으로 묘사합니다(3:10).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는 주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 공급하셨고, 아브라함이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올 때 제사장인 멜기세덱은 포도주를 가지고 영접하였습니다 (창14:18).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이 선하지만, 남용하면 안 되며, 상황에 따라서는 그 선한 것들이 혜택이 아니라 저주가 될 수 있습니다. 포도주 역시 이 두 가지 측면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잠언은 지혜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고, 출발선은 주님을 경외하는 태도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 사에 개입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단순한 인간의 지혜가 언제나 그 상황에 대한 최종 판결은 아니고,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는 데는 인간의 지성을 활용하는 것만큼 하나님을 경외하는 태도가 중요하며, 인간 관계가 정의만큼이나 고려되야 한다는 점을 깨달아야 합니다(전7:16). 그래서 르무엘 왕의 모친은 포도주는 왕에게 어울리지 않지만 괴로운 자에게 주어 그 고통을 잠시나마 잊도록 하라고 가르칩니다 (잠언31:6,7). 물론 미봉책이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하나를 붙잡되, 다른 것도 놓치지 않는 것이 좋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극단을 피한다” (전도서7:18,새번역).     

시편118:22,23절
“22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23이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

본 시의 ‘돌’은 그리스도를 지칭하며, 돌로 상징되는 그리스도는 구원과 심판 모두 되셨습니다 (벧전2:6-8;마21:42-44;롬9:32-33). 이스라엘의 공공건축물은 상부구조와 기초에 돌을 사용하였습니다. 건축자들은 여러 돌 중 적합한 돌을 고른 뒤, 필요 없는 돌은 버렸습니다. 그러나 한 공정에서 적절하지 못한 돌이 후에는 꼭 필요한 돌로 판명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버려졌던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과 같이 아주 중요한 자리에 놓여 건물의 두 벽을 결합시키고 상부구조를 올리는 기초가 된 건축현장의 사례가 구원과 심판이라는 영적 진리를 표현하는 도구가 된 것입니다. 먼저 이스라엘은 작고, 노예 처치에 있는 쓸모 없는 민족이었지만, 하나님은 이들을 선택하셔서 인류 구원의 건축자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과 약속이라는 특권을 가졌다는 선민의식으로 가득차, 불순종하고 끝내는 구원을 위해 보내주신 그리스도를 쓸모 없는 돌로서 버렸습니다(행4:10-11). 그러나 하나님은 그분을 부활시켜 구원의 주춧돌로 삼으시고, 모세율법을 폐하셔서 이스라엘과 이방인을 연결하는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하심으로, 그분 위에 성전이 지어지게 하셨습니다 (엡2:11-22). 이같이 ‘버린 돌’이 이방인을 위해서는 ‘구원의 돌’이 되고,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이 열매를 맺지 못한 이스라엘에게는 오히려 ‘심판의 돌’로 변하였다는 것은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런 교훈은 구원 받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어, 하나님의 말씀이 열매 맺도록 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 (눅11:28).

시편118:25,26절
“주님, 간구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여 주십시오. 주님, 간구합니다. 우리를 형통하게 해주십시오. 주님의 이름으로 오는 이에게는 복이 있다. 주님의 집에서 우리가 너희를 축복하였다.(새번역)

시의 배경은 축제(이 날은 주님이 구별해 주신 날, 우리 모두 이 날에 기뻐하고 즐거워하자-24)로서, 필시 유월절, 칠칠절, 그리고 장막절 중 하나입니다. 이미 성전 안에 무리는 왕과 함께 오고 있는 다른 무리를 영접하면서 축복하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천 년 동안 ‘상징과 그림자들’(히10:1)로서 행하였던 그 시편이 갑자기 실재가 되었습니다 AD30년, 종려주일에,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가고 계셨습니다. 구원의 능하신 표적들을 본 수 많은 군중들은 주님을 영접하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호산나’(마21:9)를 외쳤습니다. 이들이 외친 ‘호산나’는 원래 히브리어 ‘호쉬아나’로서 ‘이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십시오’라는 의미로서, 메시야에 대한 노래입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런 제자들을 책망하라고 요청하자 예수님은 오히려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심으로 본 시편의 성취를 언급하셨습니다 (눅37-40). 물론 나귀 새끼를 타신 것은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을 성취하신 것입니다(슥9:9;마21:4,5). 이어지는 구절 “..밧줄로 절기 제물을 제단 뿔에 맬지어다”(27)는 십자가 위에 밧줄로 매어진 주님의 팔들을 상징합니다. 이 모든 것은 죄로부터 우리의 구원을 위한 주님의 희생 때문입니다. 이제 구주의 뜻대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고전5:7).